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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 Mar 17. 2022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편지

왠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일과 결단을 사랑한다.

내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 함축되는 지도 모르겠다.

나의 마음에 삐딱선이 있는 건지, 도발이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많은 것인지 그 안에서 소리질러대고 있는 것의 정체를 잘 모르겠으나, 내가 처음 무언가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바라는 바를 따르지 않고, 내 성격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말을 할란다. 하고 질러버린 기억은 중학교때 학교 부회장을 하면서 교장실에 들어가서 심하게 따졌던 일이었다.


나는 학교 학생회장 선거에서 아주 쌩뚱맞은 존재였다. 부촌인 평창동이 이웃한 학교였던 지라, 학교에는 꽤 잘나가는 재계와 정치계 인사의 자녀들이 많이 있었다. 롯데제과의 손녀도 있었고, 해표식용유 그룹의 손녀도 있었고, 덕망있는 9시 뉴스 메인엥커의 딸도 같은 학년이었다. 그녀들은 늘 학교행사 곳곳에서 학교를 대표하는 일을 해오곤 했으므로, 의례 학교회장 부회장은 그런 재계의 자녀들이 맡아서 하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학교 회장선거에 나간 일은 그 당시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들의 공약은 화장실을 싹다 바꿔 준다거나, 강당 의자를 교체 해준다거나 전체, 학급 TV를 교체 하는 것이였지만, 나의 공약은 '여러분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와 같은 미천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해표식용유 손녀딸이 회장이 되던 해, 내가 간발의 표 차이로 부회장이 되었다. 해표님의 손녀 따님은 햇님처럼 따사롭고 고분고분하고 인성이 고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해 우연히 학기 초에 걷었던 졸업앨범 대금을 11월 즈음에 학교에서 또 다시 걷으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 집기를 싹 다 바꿔 줄 형편은 못되는 출신이었기에,  여러분의 손과 발이라도 되어 뭔가를 해야한다는 사명으로 가정통신문을 들들 뒤져서 같은 금액, 같은 명목, 같은 안내장이 두번 나갔다는 사실을 명탐정 홈즈와 같이 추적해 내고는 해표님께 이 부조리를 학교측에 항의하자고 말했다. 해표님은 당황했다. 해표님이 좀처럼 나와 함께 나서주지 않을 것을 감지하고는 나 혼자 담당 선생님께 따져 물었던 기억이 난다. 담당 선생님은 엄한 짓을 하고 다닌다면서 나를 심하게 나무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혼자서 교장실에 가서 봄에 학교에서 걷었던 앨번대금 가정통신문과 겨울에 새로 받은 가정통신문을 교장실 탁자위에 올려놓고 쥐새끼 머리통을 꼭 닮은 교장선생님께 따져물은 기억이 생생히 난다. 그 이후의 기억은 어슴프레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학교에 심하게 찍혀서 많은 선생님들의 미움을 산 기억이 난다. 


어학을 전공하고 쌩뚱맞은 회계사 준비를 할 때 제일 크게 콧방귀를 껴주신 분은 나의 아빠다. 

''머? 니가 미국회계사를 하겠다고? 건방지게 다니던 회사나 잘 다닐 것이지''

이렇게 콧방귀를 팽팽 끼던 아빠는 나의 합격소식을 대청봉 등반 중에 들으셨는데, 껄껄껄 한참을 웃으신 기억이 난다. 그러시고는 엄하게 나도 우리 가족도 아니고 대청봉 산장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맥주를 쏘셨단다.

아빠의 콧방귀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사를 일년 쉬면서 밤낮없이 공부했다.

좋은 점수로 합격은 했지만, 내놓아라 하는 회계법인에 들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하루는 회계학원에서 친했던 후배가 누런 봉투를 들고 어딘가로 가는 것을 보고 그 봉투가 뭐냐고 물었다. 

"어, 언니... 이건.... 삼*회계법인 원서인데..." 이상하게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디서 받았어?"

"리셉션에 있긴한데...."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는 와중에 잽싸게 리셉션에 뛰어갔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리셉션 책상 안쪽을 기웃거리며 누런 봉투를 찾았다. 사이드 책상 한구석에 쌓인 누런봉투가 보이길래 한 장을 쓱 들고 나와서 열심히 원서를 적어서 제출했다.

그리고 몇 달뒤 삼*회계법인 복도에서 만난 후배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 언니! 여기서 일하는 거야?"

"어 나 감사 3본부, 너도 합격한거야? 잘됐네. 어느 본부야?"

"어, 난 택스본부"

나중에 그녀가 나에게 들려준 말은 그 원서는 sky대학 졸업자에게만 나눠주는 원서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 본부의 본부장이 들려준 말은 " 야! 박민아! 내가 너 택스본부 쓰레기통에서 주워온거 알지"

갑자기 국내 최대시중은행의 미국회계감사기준 용역을 맡은 우리 본부에서 미국회계사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 때 택스본부에서 미국회계사를 공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쓸만한 애좀 줘. 하니까. 쓸만한 애들 우리가 다 뽑았지. 하면서 "아 참! 희안한 애가 있던데, 일본어 전공했던데, 자네본부 일본 클라이언트 많잖아?" 하고 쓰레기통에서 주워 건네준 사람이 나였던 것이다.

남들 모두 일본어 전공하고 재무제표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니가 무슨 회계사?라고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본의아니게) 원서 도둑질을 해서, 쓰레기통에서 구원이 되서 회계사가 되긴했다. 


"아이고, 그런 집을 왜 사셨어요? 무당이면 모를까 누가 그런데 산다고"

이것은 실화로 부동산에서 내가 산 집에 대해 들은 이야기다.

우리집은 구기동 꼭대기, 차 한대가 겨우 들어가는, 차가 마지막으로 닿는 그 곳, 바위와 산세의 기운이 어마어마 하게 쏟아지는 바위산 밑의 집. 그 부동산 사장님 말대로 그 바위 밑에는 촛대가 늘 몇대 놓여있곤 하는 것으로 봐서 무당이 공을 들이는 장소는 맞는 듯 했다.

그 곳에 집을 짓는다고 했을 때, 모두들 ''아이고, 그 돈으로 아파트 사서 편하게 살지, 차 한대 간신히 올라가는 곳에 공사를 어떻게 하려고''했다.

아파트 가격이 겁나게 오른 요즘을 보면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짓기를 시작했다. 전초전은 설계사였다. 그 집은 군사제한지역, 그린벨트 지역, 고도제한지역 등 골고루 모든 제한을 두루두루 갖고 있었기에, 평탄히 집을 지을 요량은 애초에 집어던지는게 좋은 곳. 50평의 땅. 거기에 두채의 집을 짓겠다. 뒷마당엔 차가 두대 주차되어야하며 그 차는 집 안에서 방향을 틀도록 뒷마당이 설계되지 않으면 300미터 45도 경사길을 후진해 나가야만하는 슬픈 운명에 빠지므로 죽어도 뒷마당에서 차 회전이 되어야만했고, 앞마당은 두 집이 골고루 각자 갖아야만 했으며 각 집은 4인가족이 살 수 있는 3개의 방과 2개의 화장실을 갖길 원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반 이상의 설계사는 안녕히 계시라고 돌아갔다. 도전심으로 시작한 설계사도 구청 미팅이 끝나면 다시 행운을 빈다며 돌아갔다. 뚝심 있게 버틴 설계사도 설계허가가 두 세번 퇴짜를 받자 그동안 감사했다며 물러났다.

그렇게 포기해야하나 하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이 있으니 길이 있을 것이라며 줄기차게 스스로에게 물으며 교보에서 만난 한권의 책이 있었으니 ''일본의 작은집''이라는 책이었다. 6평부터 시작하는 작은집 이야기와 기발한 설계 아이디어가 있던 그 책을 열번 넘게 보고서 드디어 계단을 양쪽 집이 주고 받으며 최대한 로스 없이 모든 공간을 사용하는 설계도를 직접 그려서 그 집은 완성이 되었다.

무당만이 살 수 있다는 그 산기운과 바위기운을 받은 그 집을 너무 사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집에서 3년을 채 살지 못하고 그 곳을 떠났다.


나는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과 고집을 믿고 밀고나가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이치, 남들 모두 가라는 방향이 아닌 곳.

내 마음이 믿는 곳, 내 마음이 원하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해야하는 시작은 외롭다. 시작도 전에 수많은 질문으로 이미 지쳐있다.

뭣도 아닌 내가 회장 선거에 나갈 때도 수근대는 소리를 들어야했고, 무당이나 산다는 바위산 밑에 집을 짓는 과정은 험난하고 고단했다. sky대학 출신도 아닌 쓰레기통에서 구출된 원서로 간신히 회사생활을 할 때도 버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생각과 가고자하는 방향으로 줄기차게 노를 저어왔다. 앞으로 전진하지 못해도, 앞이 어딘지 분간 조차 할 수 없을 때도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내 마음이 말하는 곳이었다. 수백번 물어도 어느 누구도 답을 주지 못할 때, 어느 누구의 답을 들어도 그 길을 따르고 싶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가자. 그 곳이 앞선 걸음이 되었는지, 뒷걸음질이 되었는지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알겠지. 

그냥,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고, 내 마음을 힘껏 믿고 다시 조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길을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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