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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 Jul 27. 2022

#14. 엄마 집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편지

까똑!

엄마 집 근처에 사는 친구가 뜬금없이 보낸 사진 한 장.

어? 엄마 집이네.....

유심히 바라본다.

손바닥보다 훌쩍 커진 목련 나뭇잎과 감나무잎, 무성한 초록 잔디, 담장이, 그리고, 그리고.......

그 초여름의 초록에 쌩뚱맞은 대비를 이루는 주황색과 노란색 플라스틱 어린이용 야외 피크닉 식탁에 앉아있는 사람... 아빠....

우리 엄마 집, 너무나 낯익은 엄마 집, 그리고 너무나 낯익은 아빠의 모습이 아무 예정 없이 훅 들어오자마자,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사진을 확대한다. 아빠는 고개를 수그리고 무언가를 보고 계시는 듯하다. 엄마가 늘 텃밭으로 가꿔서 상추며, 고추가 한창 피었을 마당 한 곁이 잡초로 무성하다. 가슴이 덜컹한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시던 일, 정원을 가꾸는 일, 하지만 이제 엄마는 잡초를 뽑고 텃밭을 가꿀 기력이 없어지신 걸까....


아빠는 밥때가 늦어지면 언제나 버럭 화를 내셨다. 너무 버럭 화를 내서 본인 또한 멎적어지면, 젖배를 곯아서 배고픔을 못 참는다는 아빠만의 정당한 이유가 꼭 그 뒤를 따랐다. 엄마는 늘 아침에 일어나셔서 아침 반찬 준비를 하시고, 조리거나, 우려내야 하는 생선조림이나, 찌개는 불을 아주 약하게 해 놓으시거나,  가스불만 켜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준비를 해 놓으시고는 마당에 나가서 밤새 꽃망울을 새로 터뜨린 꽃들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는 진딧물을 잡아주시거나, 잡초를 뽑으시거나, 텃밭의 늘어진 토마토 가지를 매어주시거나 하셨다. 어렸을 적 내가 기억하는 엄마에 대한 아빠의 최대의 불만은 엄마가 밥때 딴짓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딴짓'은 엄마가 모든 밥 준비를 해 두시고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에 가진 엄마만의 시간, 엄마가 제일 좋아하시던 정원을 가꾸는 일, 그것을 아빠는 늘 부당하게도 '딴짓'이라고 하셨다.


정원 한구 탱이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지금은 정화조로 드라마틱하게 변해버린 그 수영장은 우리 어린 시절의 즐거움의 보고였다. 그냥 물에 첨벙 하고 냅다 뛰어 들어가는 행위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신이 났다.

엄마는 수영을 하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언제나 ''펌프 물 퍼!'' 하셨다. 그러면 오빠와 언니 나는 커다란 자주색 고무대야 가득 펌프질을 해야 했다. 엄마는 펌프질을 하면 운동도 되고, 그렇게 땀을 빼고 나서 수영장에 첨벙 들어가는 맛이 얼마나 좋으냐, 하시면서 우리의 노동을 독려하셨다. 나는 막내라서 힘이 부족해서 펌프 손잡이에 기를 쓰고 잡아 매달려야 겨우 꿀꺽하고 물이 나왔지만, 오빠는 펌프질을 아주 잘했다. 오빠가 백번 펌프질을 하고 못하겠다고 나뒹굴어지면, 그다음은 언니가 펌프질을 했다. 그다음은 내가 펌프 손잡이에 매달려 두서너 번 물을 받아내면 다시 오빠가 와서 펌프질을 이어하곤 했다. 우리가 열심히 펌프질 한 그 지하수는 수돗물과는 비교도 안되게 차가웠다.  뒤뜰에 있는 펌프로 한가득 받은 대야 물을 수영장에 호스를 대어 받고 나서도 물속에 발을 담가 보면 소스라치게 차가워서 우리는 해가 조금 물을 덥혀주길 기다렸다 첨벙 들어가곤 했다. 

수영장 주변에는 토마토가 심어져 있어서 수영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토마토를 따서 수영장 물에 씻어 먹었다. 

수영장 앞에는 등나무 그늘이 있었는데, 여름이면 보라색 등나무 꽃이 조랑조랑 달린 그늘 아래서 흙도 파고 개미도 잡고 소꿉놀이도 하고 놀다가 수영장으로 점프를 하곤 했다. 

아빠가 일찍 들어오시는 날엔 내가 달려가서 아빠에게 파도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아빠는 옷을 벗고 팬티만 입고 수영장에 들어오셔서 커다란 튜브를 배에 끼고 수영장을 아주 빨리 경보하셔야만 했다. 그러면 정말 거대한( 그때 기억에) 파도가 만들어져서 언니와 나는 튜브를 엉덩이에 깔고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었다. 

아직도 나는 아빠가 볼록 나온 배에 커다란 꽃무늬가 알록달록한 튜브를 끼고 수영장을 경보하시고, 언니와 나는 더 빨리 달려서 더 큰 파도를 만들어 달라고 아빠를 조르던 그 밤을 생생히 기억한다.


엄마는 우리 집 설계를 그 당시 꽤 크고 유명한 건축회사에 맡기셨다고 한다. 

우리 집 터에는 암반이 많아서 집은 평평하고 너르게 지어지는 대신, 계단과 계단이 오밀조밀 연결이 되어 지어졌다. 정원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아빠가 늘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시거나, 대문 밖에 누가 지나가는지 바라보시거나,  앞집 아저씨에게  "우리 작은 딸은 이태리에 살아!(이태리에 산적 없음)" 우리 큰 딸은 뉴욕에 사는데 연봉이 얼마야 (늘 0을 하나 뒤에 더 붙이심)" 등의 어르신 헛소리 방송을 하는 작은 테라스가 있다.

그 계단은 적벽돌 색의 작은 타일로 촘촘하게 덮여있고, 아빠가 늘 앉아 계신 그 테라스 바로 밑은 초호 화형 개집이 있다. (우리는 개를 기른 적이 거의 없는데, 정말로 널찍하고 아름다운 개집이 세심하게 설계된 것으로 봐서 엄마 말씀대로 유명 건축회사가 맞는 듯하다.) 그 모자이크 타일의 계단과 테라스를 지나면 현관이 있다. 그리고 바로 왼쪽이 "응접실",  우리 집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다.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 그래서인지, 엄마가 신경을 써서 장만하신 살림의 대부분은 이곳에 모여있었다. 커다란 스피커와 LP판을 올려놓고 바늘을 살짝 올려놓으면 엄마가 좋아하는 헤리 베라 폰테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롯데 파이오니아의 오디오 세트, 반짝이는 크리스털 방울이 대롱대롱 삼단으로 달려있는 크리스털 조명, 엄마가 좋아하는 코발트색 카펫과 그 위에 코발트색 (모조) 가죽 소파, 그리고 아마도 박물관에 전시해도 될 법한 최초의 에어컨 모델이 아직도 우리 응접실에 떡하니 걸려있다. (심지어 아직도 작동이 잘된다) 하지만, 이곳은 난방이 되지 않아서 겨울엔 추웠고, 우리가 늘 밥을 먹고 생활을 하는 부엌, 방, 식탁과 동떨어져 있기도 해서 우리는 어쩌다 이곳을 사용하곤 했다. 

그래도 아빠는 너른 창으로 정원을 내다볼 수 있는 응접실을 사랑하셨다. 한 구석에 놓여있는 안마의자에 앉아계시다가, 작은 수첩을 뒤적거려 지인과 친척의 전화번호를 찾아서 어딘가에 전화를 하시거나 시대의 지성인이 읽는다는 TIME 지를 읽으시거나 하셨다. 그런 지성인은 배가 고파지면, 정원에서 화초를 가꾸시는 엄마에게 왜 밥때에 밥 안 주고 딴짓하냐고 냅다 소리를 지르시곤 하셨다. 


응접실에서 우리는 또 여섯 단의 계단을 올라가야 우리의 본무대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식당과 부엌이다. 엄마 말씀대로 정말 유명한 건축가가 맞나 싶은 의문이 시작되는 곳이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살짝 고개를 쳐들면, 계단 끝에 정면으로 이 집 부엌의 맨 낯을 볼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물론 그 부엌 앞에는 식탁이 부엌을 살짝 가려주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중 어수선 장관을 보여주는 꼴이었다. 식탁 위는 늘 아빠가 뱉은 생선 가시가 말라 붙어 있었고, 물컵, 영양제, 주전자 등이 놓여 있었으며, 모델하우스가 아니고서는 부엌에는 늘 분홍색 고무장갑과 수세미 그리고 노란 트리오 병이 자리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부엌과 식당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계단 끝에 냅다 정면에 붙어있는 구조를 엄마는 싫어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그 부엌 옆에 붙은 작은 부엌방 (예전에는 식모라고 불리는 일하는 분이 사는 방을 이렇게 꼭 부엌 옆에 만들었다고 한다.)으로 부엌을 옮기시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신 듯했다. 


우리의 주무대는 역시 식탁이었다. 우리에게는 6인용 타원형 우아미 가구 식탁과 4인용이지만 5명도 앉을 수 있는 상일가구의 원형 식탁이 있었는데, 엄마는 계절이 바뀔 때 식탁을 타원형에서 원형으로, 원형에서 타원형으로 바꾸곤 하셨다. 엄마는 늘 밥상을 차리시기 전에 나와 언니에게 "진아, 민아! 상봐!"라고 하셨는데, 언니는 그 당시 그 말을 알아듣고 식탁을 닦고 다섯 식구의 숟가락을 놓곤 하였는데, 나는 언제나 상만 바라보고 후다닥 사라졌다. 처음에는 "상봐"라는 말 뜻을 정말 눈으로 보라는 말로 알아서 그랬는데, 나중에 언니가 하는 것을 보고 그 뜻을 알고 나서도 나는 늘 상만 바라보고 사라져서 언니가 씩씩 거리며 상보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식탁 왼쪽으로는 다시 방이 하나 있고 그곳은 주로 객식구가 묵어 가는 방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이 그 방에서 묵었다 간 것으로 기억한다. 이 방에는 아주 큰 다락이 있었는데, 나와 언니는 이곳에 조용히 들어가 엄마 몰래 노는 것을 무척이나 재밌어했다. 다락은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 쪽의 미닫이 문으로 닫혀있는 이 다락의 맨 오른쪽 문을 열고 언니가 들어가고 맨 왼쪽 문을 열고 내가 들어간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말소리만 들릴 뿐 서로 볼 수가 없다. 각자가 손전등 하나씩을 갖고 들어갔지만, 중간은 물건으로 가득 막혀있어 서로를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놀이는 언제나 각자의 공간을 아름다운 보금자리로 바꾸는 일을 하고는 온갖 다락 물건을 헤치고 서로의 보금자리를 방문하여 누구의 보금자리가 더 아름답고 아늑한지를 비교하는 놀이였다. 다락에는 온갖 물건이 있었으므로 이 놀이는 보물선을 탐지하는 기분이었다. 주변은 온갖 물건으로 가득하고 어두웠고, 손전등에만 의지해서 보금자리 꾸미기에 필요한 물건을 찾아야 했다.  어쩌다 우리가 애기 때 갖고 놀던 삼발 한 플라스틱 인형 대가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지만, 다락 놀이는 언제나 흥분되고 신비로웠다.  


식탁의  오른쪽은 널찍한 화장실이 있다. 그 화장실은 작은 침실로 연결되고 그 침실은 다시 안방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 안방은 식탁에서 남쪽으로 직진하는 작은 통로를 지나면 나오기도 하는  이 집에서 가장 양지바른 곳이자, 우리 삼 형제가 뺑뺑돌기를 하며 잡기 놀이를 할 때 늘 통과해야만 하는 주 통로이기도 하였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면 식탁의 한쪽 귀퉁이에는 뒤뜰 펌프가 있는 외부 문이 나 있고 다른 한 귀퉁이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리고 그 계단 바로 입구에 우리를 호출하는 벨이 있다. 

엄마는 밥상이 차려지면 언제나 벨을 누르시고 "상진민!!! 밥 먹자!!!" 하고 부르셨다. 오빠 상열이, 언니 진아, 나 민아의 줄임말이다. 그 벨 소리는 아주 사납고 간결하게 본론만 전하는 모드로 단조롭고도 신경을 긁기에 충분한 소리였다. 우리가 꾸물대는 날에는 그 벨은 길게 냅다 이어졌다. 삑삑 삐비 빅 삐비비빅삐빅!!! 

이층은 세를 줄 수도 있게끔 별도의 독립된 공간이다. 두 개의 양지바르고 널찍한 방과 작은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세심하게도 별도의 출입문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일층과 이층을 가르는 어떤 문이나 벽도 없고 벽을 만드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한 구조라서 이층 세입자는 아랫집 아저씨의 버럭 외침에 늘 노출되어야 하는 구조이다.(이것이 두번째로 유명 건축가를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엄마는 이층에 신혼부부 세를 들인 적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에 세입자가 함께 산 적은 없는 것으로 봐서 엄마는 아빠의 버럭 외침에 노심초사해야 하는  세입자의 안녕을 위해 일찌감치 이층 세수입을 포기하신 것 같다. 


엄마 집은 살면서 불편한 점이 있거나 아쉬운 점이 분명 있는 설계였지만, 나에게 어린 시절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기에 충분한 집이었다. 집 마당 전체는 뺑 돌아가면서 구석구석이 있고, 집 안에서도 계단으로 위아래층과 응접실을 쪼르르 쪼르르 오르락내리락할 뿐 만 아니라, 뱅글뱅글 화장실과 침실 안방을 순환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구석구석에 다락과 개집이 있어서 우리는 마음껏 온 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소꿉놀이를 했고, 숨기 놀이를 했고 뺑뺑이 잡기 놀이를 했다. 

비록 아빠는 엄마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셨지만, 부처님 같은 우리 엄마는 이번 생에 내 책임을 다해서 다음 생에 저인 간을 만나지 말아야지 하는 인생의 소명으로 그 화를 다 받아내고 참으시며 늘 햇살처럼 따뜻하게 우리 곁을 지켜주셨고 가정을 지키셨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 가정을 꾸리고, 경제력이 생기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30-40대에 나는 엄마에게 그 집을 싹 다 리노베이션 하자고 제안했다. 이것도 말이 안 되게 지었고, 여기도 불편하다면서 유명 설계사의 설계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또 나는 왜 그렇게 똑똑하고 예쁘고 마음까지 고운 엄마가 늘 버럭버럭 하고 다른 사람 배려가 없는 아빠와 평생을 살았냐고, 이것은 불공정하다고 따진 적도 있다.


오십이 되어서 나는 그 불편한 집의 아름다움을 본다.

묵묵히 참고 지켜준 엄마 덕에 풍성했던 내 어린 시절의 고마움을 본다.


엄마 집엔  햇살같이 따사로운 엄마가 있었다. 

여름밤 파도풀을 만들어 주신 아빠가 계시다. 


불편함 속의 아름다움, 

부당함 뒤의 숭고함, 

그것이 엄마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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