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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름 Jan 23. 2019

별을 생각한다

나는 언젠가 시궁창에 내려앉은 별무리를 본 적이 있다. 별들은 시커멓게 썩은 하수에 발을 담근 채 하얗게 웃고 있었다. 처음엔 하얀 밥풀이 몇 개씩 뭉쳐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뜻 곤충이 붙여 놓은 알처럼도 보여서 눈길을 주지 않았는데, 며칠이 지나자 그것들은 모두 해맑은 별이 되어 있었다.


그 시궁창은 음식물 찌꺼기가 뒤섞인 하수가 흘러들고 간혹 죽은 쥐가 떠내려 오기도 하는 곳이었다. 시커멓게 썩은 진흙 속엔 빨간 실지렁이들이 섬모처럼 꼬물거렸고, 물이 고여 있는 곳에선 날파리와 모기들이 들끓었다. 간밤 취객이 토사물을 쏟아놓기라도 하는 날이면 파리들이 극성스럽게 꼬여들기도 했다. 도시의 온갖 오물이 모여들던 그 시궁창에 뜻하지 않은 손님처럼 찾아온 별은 바로 고마리의 꽃이었다.


고마리는 하천이나 저수지 주변 습지에서 자라는 일 년생 잡초다. 진흙이나 모래 속에 뿌리를 내리고 미나리나 갈대처럼 군락을 이룬다.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초지만 물속의 오염물질을 흡착하는 고마운 식물이기도 하다.


고마리는 여름이 되면 줄기 맨 꼭대기에 꽃망울을 매단다. 예닐곱 개의 밥알을 한데 뭉쳐놓은 듯한 모양으로 흰색이나 연분홍색을 띤다. 이 각각의 밥알이 벌어지면서 꽃이 되는데, 완전히 개화해도 꽃은 새끼손톱보다 작다.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꽃인 것이다. 꽃술은 조금만 멀리 떨어져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가늘다. 이 꽃술을 감싸 안고 있는 다섯 장의 꽃잎은 꼭짓점이 둥그런 정삼각형 모양이다. 때문에 완전히 개화한 꽃은 그림동화에 나오는 아기별과 같은 모습이다.


고마리 꽃


해질 무렵, 줄기 꼭대기에 매달린 고마리 꽃들만 아주 잠깐 햇빛을 받을 때가 있다. 시궁창에 고인 그늘 속으로 잎과 줄기는 잠겨 들고 햇빛을 받은 꽃잎만 하얗게 도드라지는데, 밤하늘의 별들이 찾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이곳이 썩은 물이 흐르는 시궁창이라는 생각을 하면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더러운 곳에 뿌리를 박고 그것들을 아름다운 꽃으로 정화시켜내는 모습에서 낮고 비루한 곳을 사랑하는 성자가 연상되는 것이다.

고마리


시궁창의 고마리처럼 사소하거나 흔한 것들, 혹은 천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오래전, 나는 고마리 꽃처럼 작고 예쁜 소녀의 이야기에 울컥했던 적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소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김종삼 시인의 시 <장편 2>에 나오는 거지 소녀의 이야기다.         


            조선 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 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 <장편(掌篇) 2>     


닳고 해지고 여기저기 더께가 내려앉은 옷, 떡 진 머리에 땟국이 말라붙은 얼굴, 시커멓게 때가 들어찬 손톱과 허옇게 부르튼 손, 제대로 씻지 않은 소녀의 몸에서는 악취도 진동했을 것이다. 그런 거지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식당 문 앞에 서 있었으니 식당 주인이 소리를 지를 만도 했을 것이다. 시의 1연은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거지의 모습을 건조하게 그리고 있다.


이 심상한 광경은 2연의 ‘어버이 생일’과 ‘10전짜리’를 만나게 되면서 먹먹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10전이 요즘의 화폐 가치로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싸구려 밥집에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이니 거의 푼돈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푼돈을 모으기 위해 거지 소녀는 얼마나 오랫동안 구걸을 해야 했을까, 배고픔을 견디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것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장님 어버이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 한쪽이 저릿해진다. 소녀가 내민 10전짜리 두 개는 비록 푼돈에 불과하지만, 장님 어버이를 생각하는 소녀의 마음과 앳된 몸으로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 비루한 현실이 겹쳐지면서 그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감동을 만들어낸다. 인간이 가진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울림이며 아름다움이다.  


나는 지금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먹먹함을 잊지 못한다. 시의 제목은 손바닥만 한 이야기라는 의미의 장편(掌篇)이지만 그 울림만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지속될 것 같다.


강추위만 기승을 부리고 있는 계절이다. 아무리 많은 옷을 껴입어도 시린 바람을 막을 수가 없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지만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어둡고 추운 이 시절이 생각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시궁창을 밝혀주던 고마리 꽃과 장님 어버이의 손을 이끌고 식당 앞에 선 거지 소녀를 마음속에 그려본다. 어두운 밤, 막막한 길 위에서 결국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 아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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