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폴 Jul 16. 2022

그건 떡이 아니라



만날까, 유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지금 너네 동네야. 오늘 늦게 끝나? 그렇게만 말해도 알아들을 수 있다. 우리의 처음이 그렇게 생략된 부분을 호감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됐으니까.


고등학생도 대학생도 아니던 겨울, 세상과 절연하기로 비장한 결심을 했다. 결심의 증명으로 머리칼만 자르지 않았을 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되어 나를 책 속에 파묻겠다고 일기장에 썼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나를 받아줄 곳은 나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유에게 전화를 걸어 결심을 밝혔다.

이제 전화 못할 거야. 시험 끝나면 전화할게.

중요한 순간일수록 말을 아끼는 유는 한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그래, 기다릴게.


그렇게 유를 끊으면 학습의 세계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을 거란 짐작은 얼마나 순진했. 나는 일주일도 못 가서 학원에서 친구를 사귀었고, 그 친구 없이는 밥도 잠도 의미 없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유가 한 번도 공부에 방된 적 없었단 걸 떠올리면 그 결별의 시기는 더 의아하게 느껴진다. 유는 대학생이고, 나는 아니라는 것 말고 우리 사이에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첫 만남도 묘하긴 마찬가지였는데,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장소는 교실이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은 수영장이라는 점이 특히 그다. 어느 봄날 유가 다가와, 이렇게 말을 걸기 전까지 나는 유의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다.


어제 수영장에서 너 봤어.


무슨 의미일까. 순수하게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는 의미, 아니면 너를 발견했지만 인사는 하지 않았다는 의미, 아니면... 말을 걸고 싶었지만 우리의 차림새가 간소해서 말을 걸기 쑥스러웠다는 의미? 답에 가까운 의미를 찾느라 말을 잊은 동안 물끄러미 나를 보던 유가 한마디 덧붙였다.


귀여웠어.


그 말에 머릿속 소용돌이의 풍속이 더 세졌다. 그 말은 나를 뜻하는 걸까. 아니면 내 수영복, 그것도 아니면.. 발장구 치는 모양새나 수영모를 뒤집어쓴 새알 같은 머리 모양...


확실한 건 우리가 학교 밖에서 만난 최초의 반 친구란 사실 뿐이었다. 확실하지 않은 건 앞으로도 수영장에서 종종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이고. 이야기의 앞뒤를 다 듣고 보니 유는 천식 때문에 어 시절부터 수영을 익혀 혼자 자유 수영을 하러 수영장에 가는 수준이었고, 나는 기초반의 열등생이 되지 않기 위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몸을 열심히 옴작거리는 수준이었다. 약속을 하지 않는 한 우리가 수영장에서 만날 일은 많지 않을 거란 사실에 안도했던가, 실망했던가.


귀엽단 말을 들은 이후로 유를 유심히 보게 됐다. 유는 거의 언제나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처럼 귀를 막고 음악 속에 빠져 있었고, 그게 아니면 책 속으로 잠수하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두 가지를 할 때가 아니면 도무지 뭘 하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했다. 우리는 서로의 책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서 서로의 귓바퀴에 내려앉은 목소리에 먼저 접근했다. 취향이 아주 같지는 않았지만 정반대도 아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즉석 떡볶이와 가보지 못한 세상을 들려주는 노래와 서로의 집으로 가는 길이 있는 공원만 있으면 닮은 표정으로 웃을 수 있었으니까.


공원에서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세상을 상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곧 우리의 것이 될 환희와, 세계의 무거움 다 떨친 산뜻한 날들의 주인공이 우리인 시절은 그릴 때마다 다른 모습이었지만 어떤 모습이든 흐뭇하게 아름다웠다. 그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당연히 함께니까, 주말에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는 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만나서 가는 곳이 학교나 도서관뿐인데도. 사정이 생겨 못 만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나지 못할 정도의 사정이라면, 일생일대의 행사나 사건이 있을 거란 확신을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유는 한번 마음을 보여주고 나선 우직하고 굳건하게 마음을 표현했다. 좋아하면 상대의 입에 좋은 걸 자꾸 넣어주고 싶단 걸 알려준 게 할머니라면, 유가 준 것들은 할머니의 세계를 벗어난 내가 만난 최초의 순정이었다. 늦게까지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다 잠들어서 쉬는 시간에 엎드려 자다 깨 보면 머리맡에 빵이나 음료수 놓여있었다.


수업 시간 거의 다 돼서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 메로나가 놓여있었던 적이 있다. 그걸 들고 구르듯이 뛰어나가 아무도 없는 데서 녹여 먹었다. 졸다 깨서 먹는 아이스크림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반쯤 녹아 있었지만 완전히 다 녹지는 않아서 아직 분명히 아이스크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상태가 우리 사이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은 엎드려 자고 있지만 일어날 시간을 짐작할 수 있고, 수업에 좀 늦더라도 아무도 없는 데로 뛰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돌아올 사람인 걸 아는 사이.


그때 알았다. 금방 녹는 걸 주는 것만큼, 이내 사라지는 걸 손에 쥐여 주는 것만큼, 단단한 사이에만 가능한 확신은 없다는 걸. 매일을 함께 보내는 사람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널 좋아해, 라는 말 들은 적 없었지만 너한테는 내 장기를 줄 수 있어, 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뭉클했다.


속세와 연을 끊겠다는 다짐으로 들어간 기숙 학원을 나와 속세의 욕망이 들끓는 시내 한복판의 입시 학원을 다니면서도 나는 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같은 처지의 친구가 많아져 공부할 시간이 점점 부족해졌다. 학원 앞의 강가는 어두워지면 재수생과 대학생을 구분하지 못해서,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강가에 앉아있으면 연애 아닌 연애가 시작되기도 했다. 유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지만 시험이 끝날 때까지 연락하지 않겠다고 말한 게 걸렸다. 유는 가끔 나를 생각할까. 아니면 나처럼, 새로운 환경에서 만난 친구들에 둘러싸여 나를 잊었을까.


수능 하루 전인 예비 소집일은 매서운 날씨는 아니었다. 그도 여름이 나자마자 성급히 겨울로 진입한 기분이 이어지던 때라 코트를 꺼내 입고 주머니에 손을 꽁꽁 뭉쳐 넣었다. 싸늘해서 뚜렷하게 표정을 들키는 공기 중에 손을 내놓고 싶지 않았다. 날이 조금만 더 쨍했더라 선글라스를 쓰고 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연애 아닌 연애를 끝낸 지 얼마 안 돼서, 길에서 헤어진 사람을 만났을 때 즐거운 표정이면 안된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날씨를 닮은 흐린 얼굴로 운동장을 슬슬 가로지르고 있을 때, 멈춰 있는 세상에 펄럭이는 건 코트 깃뿐인 것 같았다. 손 아까보다 더 힘을 주어 주머니 속 어둠을 쥐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은 건, 그때 내가 돌아보는 마음 없이 도착하려는 마음만 가진 바퀴였던 탓일 것이다.


바퀴가 낸 길에 끼어든 소리가 차차 가까워지고 눈에 들어오자, 일 년 전과 똑같은 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때와 같은 차림을 한 유는 헤어질 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추운 운동장에 혼자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반가웠지만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널 만나지 않는 동안 나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어. 너한테 말 못 할 연애도 하고, 태어나 처음 술도 마시고, 우리가 함께 좋아하던 사람의 콘서트에 다른 친구랑 가고, 매일 강변에 앉아 시간이 흐르는 걸 바라봤어... 라고 말할 순 없었으니까. 그건 평생 비밀로 해야 했으니까.


너 기다렸어.

날? 왜?

내일 수능이잖아.


유가 내민 보따리는 묵직해서 한 손으로 받기 힘들었다. 주머니에 넣어 놨는데도 찬 손을 꺼내 보따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뒤이어 유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는 보따리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내가 만든 떡이야.

떡? 만들었다고, 산 게 아니라?

응, 경동시장 가서 재료 사서 다듬고... 새벽에 빚고, 쪄서 가져온 거야. 아빠랑 같이.


바람이 불어서 머리가 헝클어졌는데 두 손을 다 쓰고 있어서 머리를 쓸어넘길 수 없었다. 유가 대신 머리칼을 넘겨주자 바람이 한층 더 세졌다.


내일도 갈게. 교실 들어가기 전에 따뜻한 차 줘야 되니까. 커피, 유자차?

... 유자차.



생각지도 못한 좋은 선물을 많이 받았지만 그 떡만큼 나를 울린 건 없다. 집에 와 보따리를 풀어보니 차곡차곡 담긴 그 많은 떡이 다, 몸에 좋다는 재료를 열 가지도 넘게 집어넣고 만든 보약이었다. 떡에 눈물이 자꾸 떨어져서 씹는 동안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느낄 수 없는 맛이 맛의 최고봉, 진미 중의 진미 걸 그때 알았다. 유는 그날만 기다렸다고 했다. 수능 하루 전날이면 학교에 올 테니까. 종일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몇 시에 올지 모를 사람을 기다리느라 새벽부터 만든 떡을 들고 유가 운동장에 서 있는 장면. 새로운 사람에 빠져 잊었다가도 다시 유에게 돌아가는 이정표가 있다면 바로 그 십일월의 운동장일 것이다. 오늘이 다 갈 때까지 주머니에서 손을 뺄 일은 없을 거라 생각던, 그리움이 한순간에 터지면 몇 번의 계절 같은 건 순식간에 뛰어넘는 걸 몰랐던, 십일월.


십일월에서 멀리 가지 않은 유는, 오늘도 설명 없이 음식 사진을 하나 보내고 덧붙인다.


가자.


한마디에 나는 움직인다. 그건 지구 반대편에서도 나를 움직이게 할 한마디, 함께 먹을 한끼를 위해 지구 반 바퀴를 건 이유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부 터미널 일곱 시 삼십 분의 이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