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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잎지던날 Sep 30. 2018

황석영, 해질 무렵


수년 전에 전태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나와서 그에 관하여 증언했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항의는 대부분 알려진 사실들이었지만, 함께 편집된 옛날 필름 속에 흘러가는 평화시장 주변 거리와 사람들의 행색은 그 시대를 생각나게 했다.


그런데 제작자는 당시의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을 고용했던 사장을 용케 찾아내어 등장시켰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와이셔츠 바람으로 평범한 아파트의 소파에 앉아 말하고 있었다.
나도 어려웠다고, 그때 재봉틀 몇 대 가지고 시작했다고.

기자가 전태일의 죽음에 대한 당시의 소감을 묻자 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노인이 얼굴을 드는데 카메라가 그의 누가에 번진 물기를 잡아냈다.
그들의 형편을 전혀 몰랐다고, 그럴 줄 알았으면 좀더 잘해 줄 걸 그랬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가 도달한 현재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그는 아마도 평생을 잊지 않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회한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지난 세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었다. 어려운 시절이 오면서 우리는 진작부터 되돌아보아야 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다. _작가의 말에서


_황석영, 해질 무렵



올해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 도서전에서 구매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전혀 모르고 그저 황석영이라는 작가의 이름에 끌려서 구매했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흡사 개구쟁이가 쓴 것 같은 그의 소설은 읽는 내내 날 피식거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은 단 한 번도 웃을 수 없었다.


책은 60대 건축가 박민우와 29살의 연극연출가인 정우희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나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기성세대.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젊은이. 모든 것을 다 갖춘 것 같은 삶과 뭐 하나 갖추지 못한 청춘.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박민우의 성공에는 재개발 붐이라는 시대적 운이 따랐다. 본문에서 죽어가는 한 건축가와 박민우는 이렇게 대화한다.


 “온 세상의 고향이 다 사라졌어요.”
 “그거 다 느이들이 없애버렸잖아.”


재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모두들 떠나간 고향 위, 아니 모두를 쫓아낸 고향 위에 건물을 올린다. 이 대가로 박민우는 부와 명성, 성공이라는 부상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누군가에게는 눈물이었다. 타인의 아픔 위에 세워진 성공은 결국 자신의 트라우마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여기 박민우도 그렇다.
기성세대의 트라우마 속에서 만들어진 세상을 물려받은 정우희. 그녀는 꿈이 있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간다.

밤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연극 무대에 오를 시나리오를 손보지만 곰팡이 핀 지하 단칸방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은 참혹하기 만하다. 정우희는 사랑조차 할 수 없는 현실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꿈을 붙잡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성공한 남자와 모든 것을 포기해도 꿈을 이룰 수 없는 여자.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는 직접 본문으로 확인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제목도 그렇듯이 언뜻 보면 나이 든 한 기성세대의 회고록 같은 느낌이 있다. 나 역시 박민우라는 인물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해질 무렵은 기성세대가 아닌 우리 젊은 세대를 말하는 책이다. 정우희는 현 젊은 세대들이 겪고 있는 또 다른 시대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를 서로 떼어 놓을 순 없다. 결국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갈 뿐이다. 박민우와 정우희처럼, 지금 우리 현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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