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의 전환점
1947년 1월, 요시다 시게루는 연설에서 공산당을 두고 불량배라고 말했다. 이에 반발한 공산당은 2월 1일 총파업을 예고했다. GHQ의 민주화로 노조가 합법화된 뒤, 공산당은 산별노조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총파업을 저지하고 나선 것은 GHQ였다. 총파업 전날인 1월 31일, 공산당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며 총파업을 취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GHQ를 해방군으로 믿었던 공산당은 이후, GHQ에 대한 불신을 키워 반미정당으로 거듭난다. GHQ 역시 공산당과는 거리를 두는 한편, 지나치게 보수적인 요시다 시게루의 리더십에도 불안을 느끼고 중의원을 해산한 뒤, 총선을 다시 치르도록 지시했다.
1947년 4월 20일, 제1회 참의원선거가 치러졌다. 일본국헌법이 만들어지면서 폐지된 귀족원 대신 참의원이 새로 생긴 것이었다. 결과는 총 250석 중 사회당 47석, 자유당 38석, 민주당 28석이었다. 그러나 무소속이 절반에 가까운 111석이었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닷새 뒤인 4월 25일, 23대 중의원선거가 치러졌다. 일본국헌법이 시행되기 직전의 선거였다.
일본국헌법은 국회의원만이 총리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외교관이었던 요시다 시게루는 중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한다. 지역구는 친아버지의 고향인 고치(高知)현이었다. 요시다 집안에 입양된 뒤로 기반이었던,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 출마할 생각도 했다고 하는데, 최종적으로 고치현을 선택한 이유는 지역구 관리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도쿄와 가까운 가나가와현이라면 수시로 지역구에 왔다 갔다 해야 하지만, 아예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시코쿠의 고치현이라면, 자주 안 가도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요시다 시게루다운 에피소드다.
요시다는 첫 당선에 성공했지만,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131석으로 제2당으로 전락했다. 사회당이 143석을 차지하며 제1당, 민주당이 124석으로 제3당, 국민협동당이 31석으로 제4당이 되었다. 22대 총선에서 제3당이었던 진보당은 당의 핵심 세력이 공직추방을 당하면서 위기에 빠졌는데, 여기에 자유당 내에서 비주류였던 아시다 히토시(芦田均)가 참여함으로써 민주당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사회당, 자유당, 민주당의 의석수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기에 이념적 거리가 가까운 자유당과 민주당이 연정을 꾀할 수도 있었지만, 요시다 시게루는 제1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것이 헌정의 상도라며 야당으로 물러났고, 사회당과 민주당, 협동당이 연정하여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깨끗하게 물러난 요시다를 칭찬했지만, 사실 요시다는 3당의 연정이 난관에 부딪힐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쓰(片山哲)가 총리로 취임하였다. 일본 최초의 사회당 총리다. 사회당에서 다시 총리를 배출한 것은 반세기 가까이 지난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자민당과의 연정으로 총리로 취임했을 때였다. 그나마도 이때는 자민당이 제1당이었으니, 사회당이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으로 제1당이 된 것은 1947년이 유일하다. 사회당의 후신인 사민당은 국회에서 1석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워 정당 해산 직전인 상태인 이상, 앞으로도 이 기록이 깨질 일은 없을 것이다.
가타야마는 최초의 기독교 신자 총리이기도 하다. 에도시대에 기독교는 금지되었고, 메이지유신 이후 해금된 이후에도 교세는 성장하지 않았다. 지금도 기독교 신자는 일본 전체 인구의 1~2%에 불과하다. 최근 총리가 된 이시바 시게루 역시 일본에서는 소수파인 기독교 신자다.
가타야마 내각의 업적으로는 내무성 해체, 민법과 형법 개정 등이 있는데 이는 정권 차원에서 추진했다기보다는 GHQ가 추진한 개혁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사회당 정권다운 업적이라면 노동부가 만들어졌고, 실업보험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3당 연정은 난항을 거듭했다. 사회당, 민주당, 국민협동당 사이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제1당이었던 사회당 내부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심했다. 결국 9개월 만에 가타야마 내각은 무너졌고, 1948년 3월 연정 내부에서 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가 총리 자리를 물려받았다.
아시다 내각 역시 쇼와전공 사건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아시다 히토시를 비롯한 정권 중추가 쇼와전공이라는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인데, 후에 무죄가 선고되었다.
아시다 히토시가 그만둔 뒤, 요시다 시게루는 다시 총리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유당에서 이름을 바꾼 민자당은 여전히 원내에서 소수정당이었기에 정권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국헌법에서 참의원의 임기는 6년, 중의원의 임기는 4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해산이 없어서 6년의 임기를 꼬박 마쳐야 하는 참의원과 달리 중의원의 경우는 대부분 4년의 임기를 채우기 전에 해산된다. 일본국헌법에서 중의원 해산은 내각불신임안이 통과되었을 때로 규정하고 있다.
23대 중의원 선거는 일본국헌법 시행에 맞춘 해산이라는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24대 중의원 선거는 요시다 정권의 운영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밖에 없었다. 이후 중의원 해산은 정권의 연명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아베 신조가 중의원 해산이라는 수단을 활용해 정권 운영을 수월하게 한 경우가 있다.
1949년 1월의 24대 중의원 선거에서 중도 3당에 실망한 일본인들은 요시다 시게루의 민자당을 선택했다. 민자당은 264석을 획득한 반면, 민주당은 69석, 사회당은 48석, 국민협동당은 14석에 그쳤다. 반면 공산당은 35석을 차지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제1차 요시다 정권에서는 자유당은 안정적인 여당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요시다의 당내 기반 역시 불확실했다. 자유당은 하토야마 이치로가 만든 하토야마의 당이었고, 자유당의 주류는 하토야마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요시다는 기껏해야 하토야마 대신에 앉힌 바지사장에 불과했지만, 그 오만한 성격 때문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일단 야당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재집권함으로써 요시다의 권력 기반은 훨씬 튼튼해졌다. 24대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들은 요시다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당선된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가 대표적이다. 둘 모두 관료 출신으로 요시다가 스카우트한 인물들인데, 이후 이케다와 사토는 훗날 총리 자리를 두고 대결하는 라이벌이 된다.
요시다 내각에서 가타야마 내각, 아시다 내각을 거쳐 다시 요시다 내각이 들어선 과정은 GHQ 내부에서 진보적인 민정국(GS)과 보수적인 참모 2부(G2) 사이의 대리전이라 볼 수 있다. 헌법 제정을 비롯해 민주화 개혁을 주도했던 민정국은 요시다를 축출하고 사회당과 민주당의 중도 정권을 창출했지만, 결국 G2가 지원한 요시다가 장기 정권을 구가하게 되었다.
GHQ는 민주화와 반공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노조를 장려하고 공산당을 해금한 정책은 전자와는 부합하지만, 후자와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 직후에는 군국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민주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일련의 민주화 개혁이 성과를 거둔 뒤에는 반공이 힘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는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제정세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45년 8월에만 해도 미국은 소련과 협력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죽음으로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반공주의자였고, 스탈린은 동유럽을 공산화했다. 1946년, 반공주의자였던 처칠이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하면서 냉전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동아시아에서는 상황이 심각했다. 원래 미국은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아시아의 주니어 파트너로 삼을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벌어진 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 밀렸다. 한반도는 대한민국과 북한으로 분단되었다. 미국은 점차 중화민국 대신 민주화가 성공한 일본을 아시아의 주니어 파트너로 만들기로 전환한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반공의 교두보로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