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알려진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는 1903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27년 <참회의 칼날懺悔の刃>로 데뷔한 오즈는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까지 30여 편의 영화를 감독하며 일본 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런 오즈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프로파간다 영화감독으로 동원되었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중국 전선에서 종군 감독으로 활동했다가 일본에 귀국한 오즈는 1943년 여름, 일본이 점령한 싱가포르로 가게 된다. 싱가포르에서 오즈는 인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프로파간다 영화를 촬영할 계획이었다. 영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은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스의 인도국민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의 임팔을 공격한 일본군과 인도국민군은 참혹한 실패로 끝났고, 임팔 작전은 무모한 작전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즈의 프로파간다 영화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오즈는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싱가포르에서 미국 영화만 보며 시간을 떼웠다.[1]
1946년 2월, 오즈는 싱가포르에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오즈가 귀국 이후 처음으로 촬영한 영화가 <셋방살이의 기록>(長屋紳士録, 1947년 5월 개봉)였다. 이 영화에서는 패전 직후 도쿄의 풍경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셋방살이를 하는 오타네는 미아가 된 소년을 본의 아니게 떠맡게 된다. 밤에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싸는 아이를 구박하고 못마땅해하면서도 함께 생활하면서 정이 들게 된다. 소년이 헤어졌던 아버지를 찾아 집을 떠나고 나자 오타네는 눈물을 흘리며 그런 착한 아이가 또 어딨겠냐고 말한다. 그 직후의 마지막 장면에선 우에노(上野) 공원을 배회하는 전쟁고아들을 비추며 끝난다. 전쟁고아 문제를 다룬 영화임이 드러난다.
당시 우에노 역 주변은 전쟁고아들이 노숙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우에노뿐 아니라 일본의 대도시들에는 전쟁고아들이 넘쳐났다. 애니메이션 <반딧불이의 묘>의 원작 소설은 노자카 아키유키(野坂昭如)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노자카 역시 패전 직후 고베에서 여동생과 함께 노숙 생활을 하다가 여동생이 기아로 인해 사망했다.
이처럼 도시에 전쟁고아들의 참상을 보다 못한 GHQ 공중위생복지국은 1946년, 일본 정부와 지자체에 대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일본 정부는 그해 9월부터 거리에 나앉은 전쟁고아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의 대책은 점령군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치운 데 그쳤고, 인도적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당국은 전쟁고아들을 억지로 납치하다시피 해서 수용시설에 보냈는데, 쇠창살이 막힌 감옥 같은 곳에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채 갇혀 지내야 했다.[2]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은 심각한 식량난에 빠지게 되었다. 전장과 식민지에서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수요는 급증한 반면,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의 쌀 수입이 끊기면서 공급은 줄어들었다(식민지 조선의 쌀 수출이 일본 본토의 식량 공급을 얼마나 지탱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 본토의 쌀 생산 역시 태풍과 흉작으로 크게 줄었다. 1942년 태평양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배급제는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배급제는 이러한 식량난과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는 기능할 수 없었고, 식량난을 가속화시켰다.
1946년 5월 19일, 황궁 앞 광장에 25만 명이 운집해 식량 사정 개선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때 한 공산당원이 "짐은 배 터지게 먹고 있다. 너희 인민들은 굶어 죽거라(朕はタラフク食ってるぞ ナンジ人民 飢えて死ね)"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당시는 천황에 대한 불경을 처벌하는 형법 74조 불경죄가 폐지되기 전이었기에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GHQ 당국은 불경죄 적용에 난색을 표했고,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었다가 사면된다. 불경죄는 1947년, 형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배급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암시장이 유행하게 된다. 신주쿠, 이케부쿠로, 시부야, 신바시 등 현재 도쿄의 번화가는 이때 암시장이 들어섰던 곳들이다. 암시장의 물자 없이 살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암시장의 경제사범들을 재판하는 사람으로서 암시장에서 산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배급된 음식만 먹었던 야마구치 요시타다(山口良忠) 판사는 1947년 10월 11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일본의 육해군은 미국의 점령 직후 해체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빼돌린 군수 물자들이 암시장에 유통되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물자가 암시장에 풀리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식량 사정이 좋았던 농어촌에 가서 사 들인 식량을 도시의 암시장에서 되팔기도 했다. 중국인, 대만인들이 중국에서 밀수한 물자도 있었다.
패전 직후 일본에서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은 승전국(미국)도 패전국(일본)도 아닌 제3국이라는 의미에서 "삼국인(三國人)"이라 불렸다. 암시장에서는 이들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패전 직후의 식량난에 허덕이던 일본인들에게 얼마 전까지 이등국민으로 여기고 멸시하던 식민지인들이 파는 식량을 암시장에서 사는 경험은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점령군으로 군림하던 미국을 대상으로 직접 원한을 해소할 수 없었으니 식민지인들이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삼국인"이라는 말은 차별적 표현으로 통용되었다.
1946년 11월, 미국에서 450톤가량의 물자가 일본에 도착했다. 이른바 LARA(Licensed Agencies for Relief in Asia) 물자였다. 이 라라 물자 덕분에 학교 급식이 시작되었고, 많은 어린이들이 아사를 면했다. 미국은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이다.
원래 전쟁이 일어나면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중일전쟁 발발 전과 태평양전쟁 종결 직전의 물가를 비교하면 베이징은 894배, 상하이는 1000배가 올랐다. 반면에 도쿄와 경성의 물가는 2.5배 정도에 머물렀다.[3] 식민지에서는 조선은행, 대만은행, 만주중앙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을, 동남아시아 등의 점령지에서는 군표를 유통시킴으로써 일본 본토의 인플레이션을 최소화한 것이다.
조선은행 발행 잔고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할수록 급증했다. 1943년 10월에 10억엔을 넘긴 조선은행의 발행 잔고는 44년 8월에는 20억엔, 같은 해 12월에는 31억 엔, 1945년 8월 15일에는 48억엔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부터 조선은행이 폐쇄한 9월 30일까지 한 달 반 동안 38억 4000만엔을 발행했다.[4]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그러한 버퍼가 사라지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일본 본토에 들이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일본 정부는 1946년 2월 금융긴급조치령을 발포했다. 시중의 엔화를 은행에 예금하도록 한 뒤, 출금을 일정 기간 동결하고, 화폐를 새로 바꾼 것이다. 이로써 인플레이션도 어느 정도 억제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셋방살이의 기록>에 이어 오즈 야스지로가 두 번째로 만든 영화는 <바람 속의 암탉(風の中の牝雞, 1948년 9월 17일 개봉)>이었다.
다나카 기누요가 연기한 주인공 도키코는 어린 아들 히로시와 둘이서 생활하고 있다. 남편 슈이치는 전쟁에 나간 뒤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상태다. 도키코는 기모노를 파는 등 간신히 생계를 꾸리며 남편의 귀환을 기약도 없이 기다렸다.
그런데 아들 히로시가 큰 병에 걸리자 도키코는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매매를 한다. 병원비를 지불하고, 아들도 다 나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슈이치가 전장에서 돌아온다. 슈이치는 도키코가 성매매를 한 사실을 알게 되고 분노하여 계단 위에서 밀어버린다. 뒤늦게 슈이치는 도키코를 용서하고 부부는 화해하며 영화는 끝난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있었을 법한 이야기다. 생활고 때문에 성매매를 하게 된 도키코 같은 여성은 많았고, 전쟁에서 뒤늦게 귀환한, 혹은 귀환하지 못한 슈이치 역시 많았을 것이다.
1919년에 태어난 야마자키 도미에(山崎富栄)의 경우 역시 그랬다. 1944년 야마자키는 미쓰이물산의 직원 슈이치와 결혼했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의 남편과 이름이 같은 슈이치였지만, 그는 결혼 열흘 만에 필리핀으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도쿄에 폭격이 심해지자 피난을 떠났던 야마자키는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행방을 알 수 없었던 남편 슈이치는 전사 처리가 되었다. 야마자키의 27세의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1947년, 지인의 소개로 우동집에서 야마자키는 유명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를 만나게 된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기성의 가치가 붕괴된 사회에서 다자이는 작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적 아노미를 상징하는 단편소설로 <토카통통>이 있다.
작가에게 어느 젊은이가 쓴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는 군대에서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로 듣고 자살하려 한다. 그때 어디선가 기둥을 망치로 치는 "토카통통"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살을 그만둔다. 그리고 군대에서 사회로 돌아온 그는 직장을 찾으려 해도, 연애를 해 보려 해도, 작가가 되려고 소설을 쓰려 해도 어디선가 "토카통통"이라는 환청이 들리면서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한 편지에 대해 다자이 본인을 연상케 하는 작가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쓰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사치스러운 고민이군요. 저는 그다지 동정심이 안 생깁니다. (중략) 마태복음 10장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지옥으로 멸할 수 있는 이를 두려워 하라" 이때의 "두려움"은 "경외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예수의 이 말에 번개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당신의 환청도 멎을 겁니다.[5]
여러 해석이 가능한 결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다자이의 최후를 생각하면, 비극의 징조처럼 느껴진다.
1948년 6월 13일, 야마자키 도미에와 다자이 오사무는 도쿄 근교 다마가와에 투신해 자살한다. 다자이는 몇 차례나 자살 미수 소동을 벌인 전력이 있고, 소설 속에서도 이따금 자살을 암시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자이는 향년 38세, 야마자키는 28세였다.
[1] 神奈川文学振興会(2023)『生誕120年没後60年小津安二郎展』神奈川文学振興会, p.34
[2] 中村光博(2020)『「駅の子」の闘い:戦争孤児たちの埋もれてきた戦後史』幻冬舎, p.170
[3] 多田井喜生(2020)『朝鮮銀行:ある円通貨圏の興亡』筑摩書房, p.212
[4] 앞의 책, p.216
[5] 太宰治(1950)『ヴィヨンの妻』新潮社, P.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