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권' 성장기 5
인생 참 묘해요.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저는 평생 가르치고 남편은 내내 회사원으로 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저는 책방과 카페를 오가고, 남편은 커피 교실의 선생님으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울산의 여러 학교에서 교사나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 요청이 있더니 아예 학기 단위로 방과후수업도 맡아달라고 하네요. 그래도 가장 마음을 쏟는 수업은 우리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커피 교실입니다.
제가 책의 힘을 믿는 만큼 남편은 커피의 힘을 믿어요. 커피는 단순한 마실거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유를 깊게 하는 도구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바이허니 커피교실>은 커피와 인문학이 만납니다.
커피의 발견에서부터 전파를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기도 하고 커피 생산지별 특징이나 품종, 가공방식은 과학과 지리가 융합되기도 합니다.
다양한 추출 방식을 시연하고 핸드드립 중심으로 매시간 실습하고 돌아가며 평가하고 감상하는 시간도 가져요.
실습이 중요한 만큼 수강생은 4명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90분 수업, 8주 교육을 마치고 나면 수강생들끼리 친해져 있는 부대 효과도 있더군요.
많은 분들이 다녀갔지만 4, 50대 남자로만 구성되었던 팀이 기억에 남아요. 아내의 권유로 참여했던 ‘젠틀맨 클래스’인데 중후한 남자들이 내리는 커피 맛은 색다른 느낌이 있더군요.
매번 남편과 함께 오는 아내들,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저는 젠틀맨 수강생들이 가정에서 커피를 내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구요. 손님이 오면 술상부터 내놓던 부모 세대를 생각하면 가족문화도 훨씬 젠틀하게 바뀌고 있어요.
좋은 현상이지요. 허니 님이 커피 수업을 더 잘하려고 애쓰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책방에서 장 담그기 교실도 하냐고요? 인연이 닿았으니까요. <한살림>에서 오랫동안 건강한 장을 가르쳐온 점순-대점금 선생이 내 친구니까요. 바이허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기도 하고요.
장 담그기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점순에게 졸랐어요. 바이허니 오픈 기념으로 교실을 열어달라고요. 제 또래 일하는 여성들에게 장 담그기는 난제 중의 난제거든요.
마트에서 사 먹는 건 생각하기도 싫은데, 친정에서 얻어먹기에는 민망한 나이가 돼버렸고, 그렇다고 손수 담그기엔 도무지 엄두가 안 나니까요. 혼자서 못할 땐 여럿이 해보는 거지요.
바이허니 뒤뜰에서 함께 담그고, 바이허니의 바람과 햇살로 함께 맛을 들이고, 가을에 한 통씩 나눠 가는 겁니다.
점순-대점금 선생이 허락했고 함께할 친구가 열 명 모였으니, 한 해 동안 진행될 장 담그기 교실이 시작되었어요. 3월 첫 수업엔 메주를 씻어서 소금물에 장을 담갔어요.
메주를 씻어서 말리는 동안, 몇 종류의 소금과 간장을 비교하며 맛보았지요. 역시 간장은 오래 묵힐수록 맛나더군요.
특히, 십 년 묵힌 간장의 맛은 그 자체가 ‘맛간장’이더군요. 메주를 씻고 말리는 일이 손에 익지 않은 초보들이고 수강생 서로는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장을 담그는 뿌듯한 마음에 어찌나 흥겹게들 일손을 보태는지요.
대점금 선생이 끓여온 된장에 각자가 하나씩 담아온 밑반찬을 스윽슥 섞은 한솥밥은 참석자들을 바로 식구로 만들었지요.
장 담그기 교실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에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장으로 만드는 전통 밑반찬도 배우고 나누어 들고 가지요.
4월엔 묵나물 교실, 묵나물은 말린 나물을 불려서 간장으로 무친 다음 들기름에 볶아낸 나물 반찬이에요. 바이허니 장 교실에선 말린 뽕나무 잎으로 묵나물을 만들었어요. 뽕잎의 거친 잎맥을 하나하나 훑어내 보니 ‘요리는 정성’이라는 말이 실감 나더군요.
5월엔 장 가르기, 소금물에 메주 맛이 얼추 뱄을 때 된장과 간장으로 나눠 담고 각각의 맛으로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메주와 소금물이 담긴 무거운 장독을 탁자 위에 올리고, 간장 물을 호스로 빨아내어 탁자 아래의 빈 독으로 옮기는, 그 어렵고도 살짝 우스꽝스러운 작업은 문희 신랑 김 선생이 영문도 모른 채 맡아줬어요. 현장에 있는 누구라도 일손을 보태게 만드는 바이허니의 공동체 정신, 아니, 뻔뻔함이지요.
6월엔 물김치 담그기를 배웠어요. 이번엔 바이허니 마당이 아니었어요. 여름 특집으로 장 선생의 한옥 마당에 둘러앉아 열무를 다듬고 양념 물을 만들어 물김치를 담갔어요.
열무김치에 강된장이 빠지면 섭섭하지요. 진하게 우려낸 채수에 감자와 양파를 곱게 다져서 듬뿍 넣고 빡빡하게 끓여내는 강된장, 마당에 둘러앉아 열무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한 통씩 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찌나 뿌듯하던지요.
7월, 8월은 뙤약볕 아래 장이 가만가만 익어가길 기다리며 쉬어갔어요. 사람이든 간장이든 성숙을 위해서는 시간이 쌓여야 하나 봐요.
9월엔 막장 담그기. 덩어리 메주가 아니라 가루로 담그기 때문에 숙성이 빨리 되어요. 열흘 정도만 기다리면 막막 먹을 수 있어서 막장이지요.
고추장, 마늘, 참기름을 양념하면 쌈장이 되고요. 거기다가 깨나 땅콩을 갈아서 섞으면 더더더 맛 나는 쌈장이 된다고 대점금이 알려주네요.
10월,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선선, 곶감은 꾸덕꾸덕. 가을이 왔어요. 드디어 장독 뚜껑을 열었어요. 다소곳이 담겨있는 된장의 고운 자태에 모두 환호성을 울렸지요. 간장도 맛보았어요. 달착지근 깔끔한 맛. 내 손이 보태진 장을 보니 얼마나 뿌듯하던지요. 이 맛에 장 담그는 것 아니겠어요?
된장과 간장을 나누어 담는 것으로 장교실 졸업식을 했어요. 졸업 여행은 바이허니 둘레길 걷기. 햇살 좋은 들길을 따라서 희희낙락 걸었어요.
연못가에 홀로 선 미루나무가 쉬어가라고 손짓하네요. 미루나무가 서 있는 연못의 데크 위에 둘러앉으니 세상 근심이 다 별 거 아니네요. 등 따시고 배 부른 하루, 장 교실의 넉넉한 졸업식이었답니다.
가끔 영화관 나들이를 가면 길가에 작은 천막을 치고 타로 점을 봐주는 곳이 있더군요. 볼 때마다 타로는 젊은 청춘들이 연애운을 점치는 심심풀이 놀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바이허니에 새로 깃들게 된 <마음이 향하는 독서모임>의 영아는 타로를 통한 치유 상담을 공부한다고 자신을 소개했어요. 다들 호기심으로 솔깃해하며 번외모임으로 타로 상담을 해보기로 했지요.
반쯤은 장난으로 말이에요. 점집이나 철학관을 찾아가기엔 합리적 교육에 길들여왔고, 심리상담소를 찾기엔 삶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망설이는 친구들에게 타로 상담을 소개했어요.
그런데, 한 분 한 분 카드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는 진지해졌어요. 타로 상담은 미신도 아니고, 심심풀이 오락도 아니고 ‘내 마음 깊은 곳을 열게 하는’ 인문학적 열쇠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어요. 우선 저부터 말입니다.
첫 번째로 상담받은 친구가 빨개진 눈으로 말하더군요. 상담실 탁자 위에 휴지가 필요하다고요. 불현듯 마주친 자신의 모습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더군요.
또 다른 친구는 50분의 상담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고, 자기 이야기가 이렇게 줄줄이 나올 줄은 몰랐다 하더군요. 어떤 이는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서 제한 시간 없이 2차 상담을 받기도 했어요.
욕심 아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타로 상담을 받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스스로 카드를 해석하고 싶어졌어요. 역시 저부터요. 카드의 상징을 배우고 싶어서 강좌 개설을 부탁드렸습니다. 수강생을 모았고요.
어느새 12회의 타로 기초반 수업이 끝났습니다. 강의를 함께 들은 회원들은 앞으로도 쭈욱 타로 공부를 함께 해나가기로 했어요. 바이허니 독서모임의 회원으로 참여한 분이 바이허니의 또 다른 강좌를 개설하는 것.
그러고 보니 옥금도 <마음이 향하는 독서모임>의 회원으로 참여했다가 스케치 수업 강좌를 개설하였네요.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는 곳, 꿈꾸던 모습이 이리도 빨리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군요. 공간과 사람이 만나는 놀라운 힘을 오늘도 봅니다.
여행길 골목길에서, 카페 한 귀퉁이에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에서 작은 스케치북에 스윽슥 그려내는 풍경 한 자락, 멋지지요. 아무나 할 수 있을까요?
일단 해볼 수는 있겠지요. 해보자고 살살 꼬드기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도해 봅니다. 가르쳐줄 선생님을 모셔오고, 함께 그릴 수강생도 모집합니다. 온라인밴드를 통해서요.
그런 소망을 지닌 친구들이 많았군요. 평일반 인원이 금방 마감되었어요. 주말반을 개설해달라는 댓글이 주르륵 달리네요. 그 아우성에 개설하니 주말반도 금방 마감이 되었어요.
금요반에는 연한 봄순 같은 맏언니 재경, 일상에서는 쿨한 옆집 언니지만 그림 그릴 땐 세상 진지한 선희, 우아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허당 정옥, 솔직담백 씩씩한 정민, 마주 앉아 토닥대는 라경과 진향이 함께 합니다.
스케치반 만들어 달라고 오래도록 압력을 넣었던 선희, 정옥이 있는 반이라 그럴까요? 배움에 열심들입니다. 진지한 만큼 그림 솜씨도 쑥쑥 성장하고 있습니다.
토요반도 볼까요? 누구에게든 마음의 곁불을 내어주는 미옥, 뭣이든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희영, 하는 일이 넘 많아서 수시로 결석하면서도 ‘절대 짜르지말라’고 떼쓰는 정숙과 하는 일이 넘 많아서 당분간은 쉬고 있는 난영, 마스크 위 눈빛이 빛나는 문희, 토요반의 청일점이자 에이스인 광원, 나이 들어도 여전히 ‘예쁜 아줌마’ 양미, 늦게 합류했지만 배움의 속도가 빠른 진혜, 대기표 들고 오래 기다렸던 부애가 있습니다.
토요반은 시끌시끌합니다. 서로의 그림을 넘겨다보며 놀리고 제 그림을 자랑질해대느라 바쁩니다. 그러다 문득, 조용…하다 싶으면 각자 제 그림에 코를 박고 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드러날 때까지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시간이 쌓이는 만큼 그림도 쌓여갑니다. 책방의 서가, 마당의 수국, 교회의 첨탑, 논둑길 미루나무 등이 모여갑니다. 연필로도 그리고, 펜으로도 그리고, 색연필로도 칠하고, 물감으로도 칠해봅니다.
신기하게도 같은 풍경을 그리지만 모두 다릅니다. 선이 다르고, 면이 다르고, 시선의 높이도 다릅니다. 그림을 보면 그 풍경에서 무엇을 더 드러내고자 하는지 작가(?)의 의도가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린다는 건 하루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나 봅니다.
이 귀한 시간, 이 귀한 장면들을 허투루 보낼 수 있나요. 삐뚤삐뚤하기도 하고, 기우뚱하기도 하지만 조금씩 나아가는 그림들! 그 귀한 성장의 기록을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그렇죠. 우리에겐 바이허니 갤러리가 있잖아요. 차곡차곡 모은 여행 스케치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바이허니는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합니다. 공간이 넓지도 않고 유명 강사를 모셔올 역량도 안되지만, 우리 중에서 남다른 재주를 가진 이가 선생이 되고, 그 재주를 배우고 싶은 이는 수강생이 되지요.
그래서일까요? 바이허니에 오시는 손님이 어떤 재주가 있는지, 어떤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지 늘 살펴보게 됩니다.
여고 동창생 애자에게 오래된 고향 친구 임홍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서로 친구의 안부를 묻다가 임홍이 니트디자이너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온라인에 올라온 그녀의 작품을 구경하니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녀는 옷보다 실부터 디자인한다고 하더군요. 바로 추진했어요. 그녀가 고르고 조합한 실로 니트교실을 열기로요.
가을 햇살이 스며드는 바이허니 별채에서 간간이 들리는 웃음소리, 바삐 움직이는 손. 알록달록 조합된 실로 어떤 이는 목도리를, 어떤 이는 모자를, 어떤 이는 손가방을 들고나오더군요. 어떤 이는 자신을 위해, 어떤 이는 어머니를 위해, 또 어떤 이는 친구를 위해 만들었겠지요.
봄이면 바이허니 현관 앞에는 화려한 꽃 잔치가 열립니다. 척과리에서 정원을 가꾸는 강 선생님이 수시로 봄꽃을 한 아름씩 가져다주시는 덕분이지요. 장독에 한 무더기 꽂아만 두어도 바이허니가 얼마나 환해지는지요.
그런데, 어느 날 연이가 뒷마당에서 통나무 몇 개와 바구니 를 주섬주섬 주워 나오더니 멋진 꽃동산을 만들어내더군요.
30년 일하고 퇴직했다는 연이에게 이런 재주가? 알고 보니 공무원이면서 꽃꽂이 사범으로도 활동한 재주꾼이었어요. 그 재주를 딸인 지원이가 물려받았나 봐요. 지원이가 꽃꽂이 전문가 과정을 배우고 있더라니까요.
어느 날 연이가 지원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하더군요. 재능 기부냐고 하니, 기부는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는 거라며 손사래를 치네요. 지원이는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떼는 젊은이니 바이허니에서 기회를 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가르쳐볼 기회, 바이허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라면 첫 수업의 실수도 배움의 발판이 될 수 있겠다고요. 가르치는 것도 배우고 익혀야 잘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더 조심스러워하고 배우는 사람들이 응원과 격려를 하는, 조금은 생소한 수업이 진행되었어요.
연이는 재료로 쓰일 꽃을 지원에게 안겨 보내고 정작 자신은 나타나지도 않더군요. 더 이상의 관여는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거라고 선을 그어버리더군요. 지원은 특별한 도구가 없이도 할 수 있는 <핸드타이드 꽃다발> 수업을 진행했어요.
길섶에 핀 야생화 몇 가지만으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내추럴 핸드타이드>, 물병이든 음료수병이든 어디라도 꽂아두면 된다더군요. 중요한 것은 꽃 한 송이로도 일상을 밝힐 줄 아는 삶의 태도라고요. 연이 딸 지원, 실기 수업뿐 아니라 태도와 전달력도 타고난 선생이더군요.
준비해온 재료도 워낙 많아서 일반손님들도 꽃다발을 한 묶음씩 안고 가셨지요. 뜻밖의 꽃 선물에 너무 기뻤다는 감사 인사는 제가 두고두고 듣고 있어요.
바이허니는 어떤 강좌가 개설될지 계획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다른 재주를 지닌 분을 만나게 되면, 혹은 배우고 싶은 걸 알려주면 또 하나의 강좌가 만들어질 겁니다. 얼마 전에는 ‘앙금플라워 떡케이크’를 만드는 분이 다녀가셨어요. 동그란 백설기 위에 팥 앙금으로 꽃을 만들어 얹는 케이크더군요. 연말쯤 감사의 떡케이크 강좌를 개설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무엇이든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바이허니클래스, 앞으로도 재주꾼을 발견하고, 연결하고, 모으겠습니다. 하루하루 흐르는 바이허니의 일상에 예쁘게 박히는 즐거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