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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23일간의 임정로드_Chap.4

by 모래의 남자
경찰(警察)의 고문(拷問)에 최후(最後)까지 대항(對抗)
상해일본영사관에서 사망한 병인의용대원 속보

상해 병인의용대원 리영전(李英全) 외 3명이 사명을 띠고 권총과 폭탄과 격문을 가지고 중국 상선 순천호를 타고 상해로 들어오려다가 지난 1일에 황포강 수상경찰에게 잡혀 즉시 상해 일본 영사경찰로 넘어간 후 취조를 받던 중 리영전은 지난 7일 새벽 1시 경에 유치장 안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함은 보도하였거니와 리영전은 평북 선천 출생으로 그의 본명은 리덕삼(李德三)이라는 바 성질이 본래 괄괄함으로 이번에도 고문을 받을 때에 몹시 반항하다가 그같이 된 것으로 경찰 측에서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고 발표한 것이라는데 그의 시체는 상해에 있는 그의 친동생 덕용이 가져다 봉안하고 려운형·안공근·리유필 등 여러 동지는 방금 장의 준비에 분망 중이라더라.

<동아일보 1926.6.19.>




상하이에서의 마지막 날, 일찌감치 일어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중국은 모든 지하철역과 기차역, 터미널에서 공항 수준의 보안 검색을 실시한다. 무심하게 가방을 올려놓고 개찰구를 통과하려는 순간 갑자기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려댔다.


소리의 진원은 어딘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한국에서 챙겨 온 소주 한 병이었다.


“이거, 한국에서 가져온 술이오.”

“우린 그게 뭔지 몰라. 열어서 마셔봐.”


자신의 임무에 200% 충실하고야 말겠다는 공안들의 고압적인 태도는 이겨낼 도리가 없다. 헛웃음과 함께 소주를 열어 한 모금을 들이켰다. 기상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술을 마신 건 대학 시절 엠티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웬 러시아 아저씨가 아침부터 건넨 보드카 이래로 처음이다.


빈속에 밀어 넣은 술이 가져다준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으로 지하철을 타고 상하이 중심부를 벗어나 서쪽 근교에 있는 송경령 능원을 찾았다. 중국의 국부 쑨원의 아내이자 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부주석을 지낸 쑹칭링을 기린 곳이다. 동시에 이곳은 상하이에서 활동하다 순국한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여러 국적의 열사들이 함께 잠든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거엔 ‘만국공묘(萬國公墓)’라 불렸다.

넓디넓은 땅에 뭐든 크게 만드는 중국 답게 능원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높이 솟은 나무들과 드넓게 펼쳐진 녹지 한가운데 쑹칭링의 일대기가 전시된 웅장한 기념관과 커다란 석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압도적인 스케일 속에서 적당히 둘러보다 더는 특별할 게 없겠다 싶을 무렵, 울창한 나무에 가려 볕도 잘 들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조그마한 팻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외적인 묘원(外籍人 墓园)’, 바로 외국인 묘지였다.

봉분도 없이 땅에 나란히 박혀 있는 수십 개의 작은 비석들을 살펴보니 여러 국적의 인물들 이름이 눈에 띈다. 알렉세이 같은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이름부터 에드워드처럼 영미권에서 많이 쓰이는 이름까지 다양했다.


반가운 한글 이름도 여럿 발견했다.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같은 익숙한 이름들. 이들의 묘지에는 저마다 이름과 함께 ‘1993년 X월X일 이장 대한민국(移葬 大韓民國)’이란 문구가 박혀 있었다. 한중수교 이후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내로 유해 송환이 이뤄져 비석들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 끝에 자리한 가장 마지막 비석에는 아무 설명도 없이 ‘LI YOUNG SON’이라는, 다소 생뚱맞으면서도 조선인의 그것이 확실해 보이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바로 이덕삼 열사의 묘지다. 1905년 태어나 열네 살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한 그는 이수선·이영선·이영전 같은 가명으로 활동했다.


주로 임시정부의 기밀문서와 독립신문을 국내에 전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성인이 된 후 1926년에는 한인 무장 조직인 병인의용대에 가입했다. 일본 영사관에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작전을 펼치고 조계지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치열한 의열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총기와 폭탄을 국내로 들여오려다 중국 공안에 체포돼 일본 경찰로 넘겨졌고, 심문을 받다 고문으로 결국 순국하고 만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만국공묘에서 이덕삼 열사를 굳이 찾았던 이유는, 동지들이 모두 조국의 품으로 돌아간 지금 이곳에 홀로 외로이 묻혀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기 때문에서다. 중국 정부는 연고권이 있는 후손이 직접 찾아와야 유해를 봉환할 수 있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이덕삼 열사의 고향은 평안북도 철산이고 북한이 정통성을 부정하는 임정 계열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홍범도 장군의 뒤를 따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그것도 남의 나라 언어로 새겨진 이름을 간직한 그를 위해, 기억해 주는 이가 많지 않은 그를 위해,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을 이곳에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 그를 위해 소주 한 잔을 올리고 돌아섰다. 언제가 될지 모를 한국에서의 재회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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