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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과 생존이라는 양팔 저울

23일간의 임정로드_Chap.3

by 모래의 남자
…상해로 오기 전 국내에서는 3·1운동의 기운에 힘입어 상해 임시정부에 걸고 있는 기대가 컸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획기적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는데, 막상 상해에 직접 와서 보고 듣고 알게 된 임시정부는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각자 꾸려나가는 살림살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말씀이 아니었다. 임정에 참가했던 상당수의 사람들은 날로 어려워지는 임정의 상황을 보고서 국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때 2000명에 가까웠던 상해의 한인사회가 한 두 해 사이에 500명도 안되게 줄어들었다.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상해에 있는 기타 단체들도 침체상태에 빠졌으며, 대동단의 국내 및 만주의 모든 조직도 궤멸되었다. 상해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장강일기, 정정화>




상하이 도착 첫날, 스스로 얄팍한 결심 하나를 했다. 가능한 한 저렴하고 허름한 숙소를 골라 다니기로 했다. 도시 간 이동에도 가장 낡은 기차를 선택하고, 식사는 되도록 길거리에서 해결할 요량이었다. 자못 유치한 발상이지만, 100년 전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감정선에 최대한 가까이 매달려보고 싶었다.


스스로 설정한 하루 숙소 상한선은 100위안(약 2만 원)이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중국에는 ‘주숙등기(住宿登记)’라는 개념이 있다. 중국에 온 외국인이 어느 숙소에서 머무는지 당국이 파악하는 것으로, 대체로 사회주의 국가들이 갖고 있는 시스템이다.


3성급 이상의 호텔들은 대부분 전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여권만 내밀면 신상정보가 자동으로 등록된다. 하지만 그보다 급이 낮은 숙소의 경우엔 투숙객이 공안국을 직접 찾아가 신고를 하도록 돼 있다. 그리고 그런 숙소들은 내국인 전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열 군데 가까이 전전한 끝에 88위안짜리 숙소를 찾아냈다. 그야말로 건물이 쓰러져 가는 모양새였지만, 번화가인 신천지(新天地) 인근이라는 점에서 위치는 훌륭했다. 주숙등기도 10위안을 주면 직원이 대신 가서 해 주겠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직원은 다음 날 아침까지 카운터를 비우지 않았다. 난 신고 의무를 위반한 투숙객이 되고 10위안은 그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 들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숙소의 컨디션은 가격을 생각하면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취침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울 즈음 시작됐다. 신천지와 인민광장 쪽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귀를 헤집고 들어왔다. 술에 취해 흥에 겨운 목소리들에다 가끔씩 고래고래 내지르는 고함까지 다양했다. 거기에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 것 같은데 폭죽은 왜들 그렇게 터뜨려 대는지. 방 안의 시각적 고요함과 건물 바깥의 청각적 강렬함이 이루는 기묘한 공존 속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늘날 상하이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도시다. 거대한 황푸 강 양쪽으로 늘어선 고층 빌딩들은 도시의 웅장함을 자랑하고, 일몰 뒤 펼쳐지는 야경은 상하이의 밤을 더욱 화려하게 만든다. 동서양 문화가 뒤섞인 이 도시는 풍요롭고 활기차며 어디서든 기회와 성공의 이미지가 넘쳐 흐른다.


그런데 빌딩 숲 속의 작은 골목들로 발을 들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시커먼 개울물에 빨래하는 여인들, 전선줄에 어지러이 위태롭게 널려 있는 옷가지들, 정체 모를 악취와 함께 나뒹구는 갖가지 쓰레기들. 너무나도 선명하게 맞닿은 자본주의의 두 얼굴이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공존한다.

임시정부가 터를 잡은 20세기 초 상하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에서 몰려든 이들로 도시 곳곳에서 밤마다 연회가 펼쳐지고 고급 사교문화가 발달했지만, 임정 요인들에겐 저 세상 이야기였다. 나라를 잃고 타지에서 목숨을 걸어 독립운동이란 것을 해야 했던 처지의 사람들은 이 화려한 도시의 불빛 아래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시 임정 청사와 영경방은 프랑스 조계지 안의 거대한 상업지구 한복판에 자리했다. 많은 서양인들이 머물며 먹고 마시는 곳은 요인들의 주요 동선이었다. 현재도 신천지를 비롯한 중심 상권이 주변에 형성돼 있고 거리에서 서양인들을 마주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조국 독립을 꿈꾸며 한반도를 떠나 상하이에 발 디딘 이들도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훗날 나라를 되찾고 우리도 부강해지면 세계 시민들과 교류하며 신식 문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날을 위해 힘내보자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을 터다.


그러나 쫓기듯 조국을 떠나와 이제 막 정부의 문패를 달았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터라 당시 임정 수립의 소식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못했고, 그만큼 본토로부터의 경제적 지원 또한 미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것에서 비롯된 현실이 억누르는 힘은 강했다. 숨만 쉬어도 배꼽시계는 하루 세 번을 울려대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24시간을 살아야 했던 요인들에게 배고픔은 일제의 감시만큼이나 실체가 강한 삶의 위협이었다. 이들의 끼니는 시장통 낡은 국숫집에서, 그것도 국수가 아닌 국수 찌꺼기를 간신히 사 먹으면 다행인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임정의 남성들은 조계지 전차 회사의 검표원으로, 여성들은 옷가게 삯바느질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지만 그것도 운이 좋은 일부에 불과했다.


충만한 의기로 조국을 떠났던 많은 이들은 이 같은 현실에 지쳐 하나 둘 상하이를 떠나갔다. 다른 기회를 찾아 만주로, 연해주로, 일본으로, 혹은 고국으로 향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독립운동 자체를 포기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상하이에 남은 요인들 입장에서 동지들의 수가 적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장 일본 경찰들의 감시 대상이 줄어드는 셈이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을 회유해 밀정으로 만드는 것 또한 한층 더 수월한 일이 되어갔다.


그렇게 상하이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뭉쳐졌다 빠르게 흩어진 곳이 됐다. 오늘날 우리에겐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전초기지이자 전부와도 같은 상징으로 남아있지만, 그 시작의 단계는 복잡다단하며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은 이들은 문제를 복기하고 해결해 가며 더욱 강한 의지를 가슴에 품었다. 떠난 이들로 인해 높아진 위험에 맞서며 그들 몫 이상을 해내야만 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이들이, 무너질 것만 같은 순간을 견디고자 했던 이들이, 많은 사람들과 독립 의지가 떠나버린 상하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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