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5
4·29 사건 발생 이후 왜는 나의 목에 제1차로 20만 원의 현상금을 붙였고, 제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해 주둔군 사령부 3부 합작으로 현상금 60만 원을 내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치(Fitch) 부인이 급히 2층으로 올라와서 “우리 집이 정탐꾼에게 발각된 모양이니 속히 떠나셔야겠어요.”라고 알려주고, 곧 아래층으로 내려가 전화로 자기 남편을 불렀다. 부인은 자기네 자동차에 나와 부부인 양 나란히 앉고 피치 선생은 운전사가 되어 뜰 내에서 차를 몰고 문 밖으로 나갔다.
일본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불란서인·러시아인·중국인 등 각국의 정탐꾼이 문 앞과 주위를 수풀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인 집이라 어찌할 수가 없어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란서 조계지를 지나 중국 지역에 이르러 자동차를 멈추고, 나와 공근은 기차역으로 가서 당일로 가흥(嘉興·자싱)의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백범일지>
임시정부의 1920년대는 많은 이들의 열정과 희생 그리고 기대로 뜨겁게 불타올랐지만, 동시에 그 열기가 빠르게 식어버린 시기이기도 했다. 독립투쟁의 노선을 둘러싼 갈등과 만성적 자금 부족이라는 내부적 문제, 여기에 점점 거세지는 일제의 압박은 이들의 의지를 짓눌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백범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창설했다. 본격적인 의열 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의 의지를 되살리고자 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조국과 동포들에게 알려야 했다.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이봉창,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그 임무를 수행했다.
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그 당시에도 국내외의 이목이 집중될 정도로 파급력은 상당했다. 배후 주동자로 지목된 백범에게는 막대한 현상금이 내걸렸다. 성과에 고무될 틈도 없이, 두 열사의 희생에 슬퍼할 틈도 없이 백범이 상하이를 떠나 자싱으로 피신해야 했던 배경이다.
임시정부의 두 번째 도시 자싱으로 떠나는 날, 상하이 조계지에서 기차역까지 부러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나를 둘러싼 정탐꾼들은 없었지만 당시 백범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20분 정도가 소요되는 15km 남짓한 길이었다. 여러 나라들의 공관 앞을 지나가는 다소 빽빽한 구시가지 길. 당시에는 교통체증 같은 건 덜했을지 모르지만 길이 좁고 불편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도 백범에게는 그 시간이 생사의 기로였을지 모른다.
상하이를 떠나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공식 기록이 충분치 않다 보니 아무 근거 없는 추측의 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10년이 넘는 노력과 동지들의 희생에도 목표에 가까워지지 못하고 몸을 피해야 하는 현실. 좌절과 아쉬움이 아무래도 가장 크지 않았을까. 동시에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어떤 전략으로 다시 시작할지에 대한 고민도 머릿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에게 자싱은 독립운동의 방향을 다시 설계해야 할 새 거점이었다.
낡은 구형 기차를 타고 상하이 남쪽으로 1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자싱.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낮은 인구 밀도에서 오는 여유로움, 정돈된 거리의 깔끔함, 수려한 풍광이 주는 안온함까지. 번잡함과 난잡함 사이를 줄타기하던 상하이와는 완연히 달랐다.
길이 복잡하지 않아 백범이 머물렀던 집을 찾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호숫가에 위치한 2층짜리 전통 가옥 앞, ‘金九 避难处(김구 피난처)’라는 커다란 명패가 나를 맞아줬다. 안으로 들어서자 두루마기를 입은 백범의 흉상과 자싱에서의 행적이 담긴 다양한 기록들이 전시돼 있었다. 1층은 내빈 접견을 위한 응접실과 집무실이, 2층은 침실로 사용된 공간으로 작은 침대와 책상·화장대 등이 비좁게 자리하고 있었다. 탁 트인 창밖으로는 잔잔한 호수가 넓게 내다보여 시원함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침실에서 바로 이어지는 작은 선착장이었다. 위급 상황이 닥쳤을 때 1층 정문이 아닌, 곧장 호숫가로 뛰어내려 배를 타고 탈출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그 시절의 긴장감이 흐르는 공기가 건물에 녹아 있는 듯했다.
김구 피난처 인근에는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도 따로 보존돼 있었다. 외관은 비슷했지만 규모는 조금 더 컸다. 2층은 방 한 칸마다 침대 여러 개가 배치돼 있어 마치 게스트하우스 같은 느낌이었다. 1층은 비교적 넓은 식당과 회의실이 있어 상하이에서의 청사처럼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하이처럼 굵직한 활동의 기록이 남아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자싱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 장소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저 백범과 요인들이 잠시 머물렀던 곳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상하이를 떠나며 느꼈을 복잡한 심경, 막막한 미래를 헤쳐 나가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눈에 보이는 큰 사건이나 족적이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의미가 덜하다 여기는 것은 분명 섣부르다.
“거기, 누구요?”
갑자기 들려온 성마른 목소리가 짧은 감상을 깨웠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건물 경비원이었다. 아무렇게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는데 관리를 맡은 사람이 있었다. 짤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허, 한국? 저번 8월 달에 무슨 기념일이라고 몇 명 왔을 때 이후로 처음이군.(아마 광복절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한국 사람들 많이 안 옵니까?”
“여긴 작은 시골이잖아. 자싱이 어딘지도 모를걸.”
수긍이 어렵지 않았다. 이름난 도시도 아니거니와 딱히 관광 콘텐츠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곳이었다. 한국인 관광객 입장에서는 상하이만으로도 일정은 충분하다. 심지어 대표적인 임시정부 청사도 상하이에 있다. 굳이 여기까지 방문하러 오는 것이 의미가 없진 않겠으나, 사실 그런 선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자싱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역사적 의미가 서린 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분명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과거의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가까이 가 닿아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그렇기에 현재 시점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가치 판단의 토대를 제공한다.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넘어 당시의 정세나 세간에 통용되던 정서를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지적 호기심 충족과 함께 때로는 예상치 못했던 재미와 만족의 포인트도 나타나곤 한다.
무엇보다도 눈앞의 현장감은 분명 글줄이나 사진과는 결이 다른 임팩트가 있다. 누군가의 흔적을 따라 걷고 그들이 머물렀던 곳을 바라보며 잠시라도 같은 질문을 품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역사에 관심을 갖고 숭고함 속에 힘들여 발길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생업일 수도, 또 다른 흥미와 관심사일 수도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만 집중하기에도 인생은 그리 길지 않으며 때로는 벅차기까지 하다. 그러니 역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누군가의 우월감의 원천이나 손가락질의 근거가 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다만 관심이 사라지면 공간은 머잖아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비어버린 공간과 휘발된 기억은 빠르게 변질되거나 소멸의 길로 접어든다.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는 금세 잊히게 되고, 언젠가는 아무도 묻지 않게 된다. 어쩌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사라지는 순간조차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