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6
추푸청(褚辅成·저보성)은 외부에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자기 소유의 마황탕 공장을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피신처로 제공했다. 공장 내부에서는 외국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에게 강에서 300보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상하이-항저우 간 철로가 있으니 잦은 외출을 삼가고 비밀리에 행동할 것을 당부했다.
<褚補成先生之一生(추푸청 선생의 일생), 왕쯔량(王梓良)>
조용한 시골 동네 자싱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백범의 또 다른 피난처가 있는 하이옌(海盐)으로 향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거의 옆 마을이나 마찬가지인 50km 거리다. 일산에서 분당까지의 거리쯤 되는데,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은 이 정도는 매우 가깝다고 서슴없이 표현하곤 한다.
가깝다고 해서 길이 편한 건 아니었다. 야트막한 산과 수많은 호수들을 끼고 있는 시골길은 질척임이 심했다. 삼국지 게임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모르지 않을 터다. 전투 중 툭하면 늪에 빠지곤 해서 기동력이 떨어지는 장강이남 오나라 영토의 특성 그대로다.
습한 공기를 뚫고 도착한 시골 마을 기와집에는 ‘재청별서(載青別墅)’라는 문패가 달려 있었다. 자싱에서도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위협을 느낀 백범이 피신해 잠시 머물렀던 별장이다. 그동안 보아 온 청사들과 달리 공간은 한결 여유롭고 분위기도 느긋했다.
무엇보다도 위치와 풍광이 훌륭했다. 수풀로 우거진 산세가 주는 편안함과 탁 트인 호수가 선사하는 개방감은 배산임수 같은 건 잘 모르는 까막눈에게도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곳에서 백범은 반년 가까이 은둔의 시간을 보냈다. 외로움과 번민부터 사상적 성찰과 재도약의 전략까지, 침전과 준비가 교차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백범이 자싱과 하이옌을 넘나들며 재기를 모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추푸청(褚辅成)이라는 중요한 인물이 있었다. 상하이 법대 학장 출신의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만행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정당한 민족해방 투쟁으로 이해했다.
윤봉길·이봉창의 의거 직후 위기에 몰린 백범에게 자싱에 은신처를 제공했고, 며느리 친정 소유의 재청별서로 피신을 도운 것도 그였다. 본인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행동에 나섰고, 그 기반에는 연대 의식과 함께 인도주의적 신념이 있었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추푸청뿐만이 아니다. 임정이 거쳐 갔던 지역의 중국인 공무원들이 일제 경찰과 밀정의 체포망을 피할 수 있도록 통행증을 위조해 주거나 숙소를 제공한 사례가 있다. 독립운동 자금이나 문서 등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아 도움을 준 화교 상인들의 기록도 남아 있다.
반대로 중국군에 가담해 항일전선에 뛰어든 한인들도 적지 않았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소속 같은 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함께 피 흘려 싸운 경험은 한국전쟁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보여준 그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당시는 내 한 몸 지키기도 벅찬 시대였다. 그럼에도 국적을 넘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희생을 각오하며 책임을 외면하지 않은 이들이 분명 존재했다. 바로 그들 덕분에 임정 요인들은 어렵지만 독립운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해방 이후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과거의 유대감이나 연대감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자리는 끝없이 팽창하는 뿌리 깊은 중화주의가 대신하고 있다. 급격히 오만해진 중국 정부의 경제 보복과 역사 왜곡, 일부 중국인의 무례한 태도 등 현실적인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에 불편을 넘어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감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일정 부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반감이 언제부터인가 비판을 넘어 혐오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혐오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없고, 비판의 정당성도 흔들리게 된다. 결국 우리가 손가락질하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당장 이런 의견 개진에 곧바로 국적을 의심하는 공격이 들어오는 게 이미 드물지 않은 사회다.
중국 지방정부들의 한국 독립운동 유적지 관리는 대체로 협조적이고 양호한 편이다. 만약 반대로 한국 내에 중국 독립운동 유적이 발견돼 한국 정부가 이를 보존하고 관리에 나선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중국에 남아 있는 임정 유적지를 찾을 적마다 늘 아쉬움과 불안을 남겨둔 채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아직 발굴하고 밝혀내야 할 흔적들이 너무나 많음에도, 정치적·외교적 상황에 따라 이러한 작업과 노력이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들마저 사라지거나 더 이상 발길조차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뒤따른다. 역사가 실체적 진실과 뚜렷한 근거에 이르지 못하면, 역사를 사유화하고 이용하려는 자들에게 빈틈을 내어주게 된다.
백범이 깊은 은둔에서 다시 걸어 나올 수 있었던 건, 나라를 잃고 도피하던 길에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를 도왔던 누군가에게는 이름보다 얼굴을 먼저 보고 국적보다 마음을 먼저 믿는 용기가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혐오와 경멸 대신 이해와 존중, 더 넓은 시야와 용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국경을 넘어선 신념과 연대의 힘은 여전히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일도, 바로 그러한 길 위에서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