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의 임정로드_Chap.1
3월 1일에 우리 대한의 독립을 선언함으로부터 우리 이천만 민족은 마음과 목소리를 합하야 거짓 없는 우리의 의사를 세계에 선명하되 엄정한 질서와 평화로운 수단으로써 하였도다. 대한민국 원년 3월 1일에 이미 우리 민족이 자유 민족임을 선언하고 인하여 금년 4월 10일에 임시의정원과 임시국무원이 성립되니 이에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의 일치 화협한 의사와 희망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지라. 만일 일본이 여전히 한일 양 민족의 영원한 이익과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무시하고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의 점유를 계속할진대 우리 민족에게는 오직 최후의 혈전이 있을 뿐이니 3월 1일의 공약의 제3조를 따라 최후의 1인까지 전쟁함을 불사할지며 아울러 이는 자유와 생명의 전쟁이니 최후의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기를 성명하노라.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선언서>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는 매년 수많은 한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저마다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소셜 미디어에 인증샷을 올리면서 애국심에 젖곤 한다. 작고 초라한 청사를 바라보며 촉촉한 상념에 잠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곳이 임시정부의 최초 탄생지는 아니다. 엄밀히 말해 상하이에서의 마지막 청사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만 최소 두 차례 청사를 옮겼고, 아마도 그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중국 내 11개 도시를 유랑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이 사실을 모른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기에 시험에도 출제되지 않으며, 학교에서도 그리 공들여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을 간단히 살펴보자. 3·1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하이에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임시의정원을 창설했다. 이들은 하루의 격론 끝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하고 다음 날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과 함께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결성했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탄생했고 서울에서는 13도 대표 국민대회를 통해 한성정부가 출범했다. 세 단체는 그해 9월 11일 상하이에서 이승만을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하고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4월 11일로 제정된 배경이다.
첫날 상하이 푸동 공항에 내리자마자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처음 태동한 장소로 알려진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를 찾아야 했다. 내가 가진 얕은 정보는 현재 지명으로 서금이로(瑞金二路)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 하나뿐.
9월 초 상하이 날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더웠다. 두 눈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두 시간을 넘게 걷는다는 것은 엄청난 체력과 그 이상의 정신력을 요구했다. 죽일 듯이 내리쬐는 땡볕에 수많은 갖가지 탈것들과 사람들을 헤치고 전진해야 했다. 그렇게 건물을 하나하나 살피며 시원한 숙소로의 퇴각을 고민하던 중 벽에 붙은 표지판 하나가 기적처럼 눈에 들어왔다.
‘大韩民国臨时政府诞生地旧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지 구지)’
기어이 찾아냈다는 성취감은, 그러나 찰나에 불과했다. 건물이 낡고 초라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깔끔해서 100년 전 실제로 존재했던 건물은 아니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역시나 빗나가지 않는 법. 확인해 보니 이곳은 중국 정부가 자체적인 조사를 통해 임의로 특정한 장소였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맞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가 열린 장소였으니 엄밀히 말해 ‘국회’의 자리에 가깝지 ‘정부’의 청사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찜찜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어쩌면 두 시간 동안 눈에 스쳐 지나간 수많은 곳들 중에 어느 한 곳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를 남긴 채.
임시정부가 서금이로에서 하비로(霞飛路)로 옮긴 두 번째 청사는 비교적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당시 이삿짐이 많았을 리 없으니 물리적으론 어렵지 않은 이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에도 일제의 감시로 인한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웠을 터. 어쩌면 긴장으로 손에 땀이 맺히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비로 청사는 보다 더 번화한 큰길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근대 양식의 깔끔한 6층 건물이었다. 얼마 전까지 의류 브랜드 H&M의 대형 매장이었다는데, 도착했을 땐 텅 빈 상태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임정이 머물던 당시 이곳은 소박한 2층짜리 건물이었다. 1919년 이들이 떠난 뒤 1920년대 들어 헐려버리고 지금의 건물이 들어섰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세 단체의 통합 회의가 바로 이곳에서 열렸고, 연통부와 교통국이 설치됨으로써 체계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된 장소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튿날 아침 일찍 찾아간 마당로(馬當路) 청사는 임정이 1932년 상하이를 떠나기 전까지 사용한 마지막 장소였다. 상하이에서 유일하게 현장이 완벽에 가깝게 보존돼 있고 국내에도 익히 알려져 있어 상하이를 찾는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실제로 이날 아침에도 단체와 개인이 뒤섞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모습이었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보이는 건 좁은 막다른 골목 그리고 그 측면에 일렬로 나 있는 10개의 출입문들이다. 그중 네 번째가 임정 청사로 연결되는 문이다. 지금이야 커다란 명패와 안내문이 자리 잡고 있지만 당시에는 불청객이 쉽게 눈치채기 어렵게 만드는 효과를 꾀했을 것이다. 20년 전 교환학생 시절 처음 방문했을 적엔 그저 초라하게만 보여 서글펐는데 이제와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기능적 구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건물은 3층으로 이뤄져 있지만 면적 자체가 워낙 작다 보니 규모는 매우 협소하다. 이 좁은 공간에 내무부·외무부·군무부·재무부 같은 부처 명패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요인들의 집무실과 침실까지 구겨 넣어진 모습이다. 건물 한가운데 위치한 계단은 성인 두 명의 교행이 쉽지 않을 정도로 비좁고 가파르다.
사진을 남겨야 했다. 촬영 금지 팻말을 발견하고 잠시 고민했으나, 기록을 오롯이 눈에만 담아갈 순 없다는 기자의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슬그머니 휴대전화를 꺼내 곳곳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흡사 소비에트 비밀기지에 잠입한 007처럼 은밀하게 촬영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벽에 달린 CCTV와 눈이 마주쳤다. 이내 어디선가 무전기를 통한 고함이 들려왔고, 곧바로 누군가 계단을 쿵쿵 뛰어오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급박했다. 경험상 중국은 이런 대목에서 자비와 관용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찰나의 고민을 지나 잽싸게 그러나 침착하게 카카오톡 메신저를 열고 가장 먼저 보이는 채팅창에 사진들을 모조리 전송했다. 차오르는 전송 게이지가 그렇게까지 답답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싶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나타난 중국 관리인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내밀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 내보인 과한 몸짓은 일말의 시간을 벌어줬다. 휴대전화는 내 손에서 그의 손으로 넘어갔고 사진 원본은 모두 삭제됐지만 목표 달성에는 성공했다. 억울하고 아쉽다는 혼신의 마지막 연기도 잊지 않았다. 아주 잠시나마 그 옛날 문익점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상하이에서 임정은 이 세 군데 청사 외에도 많은 곳을 옮겨 다녔다. 그나마 번듯한 건물에 머무를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요인들의 거처나 타인의 집에 의탁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상존하는 위험 속에 계획을 수립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장소를 가릴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들의 발자국이 상하이 어딘가에 더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좁고 낡은 방, 땀이 스며든 책상, 떨리는 손으로 적어 내려갔을 문서 한 장. 언젠가 들이닥칠지 모를 검은 그림자에 대비해 누군가는 가방을 늘 반쯤은 싼 채로 지냈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것은 거창한 기념비가 아니라 그 같은 일상의 틈에 배어든 치열함이었다.
일제의 감시망과 자금의 부족 속에 지금의 동네 주민센터보다도 작은 공간에서 ‘나랏일’을 보고 독립운동을 해 나가던 시절. 당시 이들에겐 비애와 좌절감을 떨쳐버리고 결기와 희망을 품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