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의 세계를 열어주고 단단히 다져주는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경험 중에서 유독 온몸의 감각 세포에 각인되다시피 강렬하게 기억되는 경험이 있다. 내게도 살면서 그런 경험이 딱 몇 번 있었는데, 바로 2016년의 겨울이다. 길고도 혹독했던 그 겨울의 11월 1일—날짜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그날—태어나서 처음으로 믿었던 사람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얼마 만나지도 않았던 그 당시의 남자친구가 보기 좋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게 걸려서 묻고 따지지도 않고 이별을 통보했는데, 미안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마당에 오히려 잠수를 탔던 것이다! 그리고는 바람의 상대였던 사람과 계속해서 당당히 만남을 이어나갔다. 할말하않.
지금 생각해 보면 뒤도 안 돌아보고 이별을 통보한 나에게 오히려 칭찬을, 그리고 또 바람의 상대였던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게 상황을 알려줬던 어른스러움(?)에 박수를 쳐주고 싶은데, 그 당시의 나는 상당히 슬퍼했었고 또 분노했었다. 그가 아쉬운 게 아니라 너무 곱게 보내준 것에 대해 분이 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한몇 주간은 마음이 약해져서 그 커플의 소식을 듣지 않기 위해서 소셜미디어도 일절 하지 않았었는데 지인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듣고야 만 그들의 소식. 나와 헤어지고 나서 그들이 여행 간 곳이 바로 영화 <라라랜드>의 배경이 된 LA였다. 오노! 왜 그랬는진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울적한 기분에 취해서 그 당시 상영하던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오히려 그 영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지금까지 세어보진 않았지만 몇번이고 반복해서 보다보니 거의 모든 대사를 기억할 정도로 심취해서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에 하나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영화를 사랑하게 되면 그 모든 대사들과 캐릭터의 감정들이 내재화되어 나의 세계에 스며들게 된다. 시작이 어떠했든 간에 내가 이 영화를 그만큼 사랑하고 몰입해서 보게 된 이유에는, 내가 사랑하는 동생이자 1인 브랜드 '스튜디오묘미(Studio Myomi)'를 꾸려나가는 내 하나뿐인 여동생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회사에 들어가서 '커리어 우먼'으로 일하고 싶었던 나에 비해 늘 자신의 것을 하고 싶어 했던 나의 자매님. 단 한 번도 직장인으로서의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그녀는 안정적인 대기업에서 35년을 재직한 아빠를 보고 자란 세 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예체능의 길을 걸었다. 어떻게 보면 자매님은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스타일인 엄마를 닮았고 나는 엄마와 아빠를 반반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 예로는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과 똑같이 회사에 들어간 것 같았지만 편하게 잘 다닐 수 있었던 외국계 대기업 (B2B업계의 공무원이라 불리던)에서의 정직원을 뿌리치고 광고업계에 발을 들인 것에서부터 엄마의 자유로움과 아빠의 추진력을 반반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한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걸 뒤로하고 해외에 나와 처음부터 다시 새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매일 전화하고 연락하는 스타일의 자매는 아니다. 그렇지만 종종 이야기를 나누면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속이 뻥 뚫리고 감성이 촉촉해지고 세상이 좀 더 컬러풀해지는, 말하자면 소울메이트 재질이다. 내가 소울메이트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것 같지만... 참 세상에 몇 명 없다.
무튼,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가에 대해 감사해한다. 좋아하는걸 업으로 삼으며 그에 따라오는 경제적 부담과 직업인으로서의 안정을 온전히 떠안고 살아갈 용기, 그리고 K장녀로 태어났음에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원하는 삶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었던 선택은 절대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 윗 세대의 엄마 그리고 다른 여성들이 조금 더 나은 교육을 받고, 조금만 더 많은 권리를 보장받아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몇 번이고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특권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있는지도 몰랐던 선택지가 우리에게는 손을 조금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이들의 제자리 뛰기가 이어졌었다는 것을 안다. 멀리서 보면 제자리에서 뛰는 것 같아도, 누군가 조금씩 조금씩 그 뜀뛰기를 이어받아서 여자 아이들의 권리와 선택에 대한 기준을 높이고 또 인식을 바꿔왔다.
나는 모두가 아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더 나은 기회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내가 우리의 엄마들보다 더 깨어있고 그들이 말하는 '신여성'인 것은, 그래서 그들이 기여해 온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에 의문을 제기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현상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려고, 나 조차도 자꾸만 잊어버리고 그들을 답답해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기억하려고 적어둔다.
보수적인 것 같지만 세상에 열려있고 깨어있는 아빠와 엄마 덕분에 우리는 자라나면서 의도적인 남녀차별은 받아본 적이 없다. 물론 시대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으니깐 크고 작은 귀여운 수준의 차별도 있었지만 대놓고 '여자니까' 혹은 '남자니까' 이러해야 한다는 차별은 받은 적이 없기에, 스스로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그만큼 원하는 게 있으면 몸과 마음을 다해 노력할 수 있었다. 높은 기준을 가진 아빠를 보고 자라서 완벽에 집착하기도 하고 또 자유로운 엄마의 영향으로 그런 우리를 놓아줄 줄도 아는, 두 가지의 면을 다 가진채로.
너는 어느 마켓 좋아해? 하고 묻고 그 마켓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사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정도로 호주 사람들이 사랑하고 일상의 일부인 마켓. 이곳 시드니를 포함한 호주 전역에는 주말이면 온 동네에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네별로 마켓을 다니며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른 부스들과 특색 있는 문화들을 살펴보는 것이 마케터로서도 그리고 이곳에 온 지 다섯 살 된 이민자인 내게도 인간적으로 큰 즐거움이다.
그런데 이 마켓은 그저 작은 부스들이 모인 공간이 아니라, 호주 사람들만의 지역 경제 살리기에 기여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더 니치 한 취향들을 가진 스몰 비즈니스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 취향을 응원하고 소비하며 자신의 색깔도 더 강해지는 것이다. 브랜드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정말 제대로 된 나만의 것을 찾는 사람들은 마켓에 와서 몇 시간이고 둘러보며 모래 속에서 진주알을 찾는 기쁨을 느낀다. 나 또한 그중에 한 명인데, 그건 내가 그들에게서 동생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스몰 비즈니스를 꾸려가는 이의 고단함과 자신이 창작해 낸 것에 대한 자부심이 동시에 묻어나는 걸 보면서 내 자매가 느낄 일의 기쁨과 슬픔을 간접적으로 느낀다. 일이라고 할 수도 없을만큼 그녀와 물아일체가 된 자식들 같은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는 출산의 고통과 보람이 조금이나마 다가와서 그들을 더욱 응원하게 된다. 최근 산 것중 가장 잘 한 소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좋아하는 목걸이와 바디오일 같은 것들을 그 곳에서 샀다.
영화 <라라랜드>에 등장하는 작가, 화가, 시인 그리고 배우들은 예술가로서의 꿈에 나아가면서 깨지고 다친다. 부서지는 마음들을 안고도 또다시 그 꿈이 너무 소중해서 나아가야만 했던 그 연약하면서도 강한 캐릭터를 보면서도 동생을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그 영화를 좋아하고 공감한들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동생이 공감하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그 한없이 연약해서 부서질 것 같은 마음과 굳은 심지로 자신의 것을 이어나가는 면이 동생에게 공존한다는 것은 내게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첫째로는 흔들릴지언정 동생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오는 안도감이며, 둘째로는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지만 그게 모순이 아니라 그 합이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인사이트이다.
결국엔 결핍과 불안을 원동력 삼아서 성장하고 살아남는 내 자매의 회복탄력성에 대한 믿음과 그런 자매에 대한 자부심이 나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 가족 전부에게 자랑일 걸? 그리고 나의 친한 지인들과 오래된 동료들은 모두 그녀를 응원해 왔다는 걸 안다. 마음이 뭉클하게도 말이다.
비슷하게는 지금 일하고 있는 비영리기관에 처음 입사해서 알게 된 같이 일하는 동료와 더 가까워진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의 가족 중에 파트타임으로 비영리 기관에서 상업용 글을 쓰고, 나머지 시간을 투자해 자신의 책을 쓰는 시인이 있다. 시도 쓰고 마케팅도 하고 디자인부터 재고관리까지 다 하는—말하자면 1인 출판사인 셈이다.
고단하고 지난한 싸움을 계속해나가는 그들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는 우리들은 같은 마음이었는데, 가끔씩 내게 기대주고 고민을 털어놔주어서 고마웠다.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싶은데, 아무튼 우리는 그 마음으로 인해서 서로 척하면 척 아는 그런 동료가 되었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그의 마음을 전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가족을 응원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는 알기 때문에 그런 응원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우리를 이어지게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친구가 했던 말인데, 역시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는 존재가 생기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슈퍼파워가 있나 보다. 이것 역시도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친구가 가진 시선이겠지,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얼마전 자매는 서촌에서 팝업스토어를 열었고 잘 마쳤다. 그 일주일간 친구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거라는데 그때 이곳에 있는게 야속했다. 나 답지 않게 기분이 가라앉고 마음이 또 연약해져서 솔직하게 그 마음을 남편과 그녀에게 털어놓았는데, 오히려 어른스럽게 나를 위로했다. 오구오구 내 동생, 다 컸다.
여담인데, 인트로에 이야기한 그 사건(?)과 별개로도 LA는 나와 인연이 깊다. 그들로 인해 우연찮게 <라라랜드>를 접했고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러고 시간이 흘러 다니던 외국계 회사에서 해외 연수를 보내주던 기회에 지원했었는데, 랜덤으로 글로벌 짝꿍(정확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남)을 맺어주며 도시를 골라주었는데 그 도시가 바로 LA였다. LA에 있는 회사에서 이 주간 근무하고 그곳에서 만난 ENFP 친구와 꿈같은 시간을 보내며 영화 <라라랜드>에 나오는 모든 장소를 돌았다.
잘 기억은 나진 않지만... 아마도 내가 연수를 위한 설문지에 좋아하는 영화로 <라라랜드>를 쓰기라도 했던 걸까? 역시 하나의 사건은 다른 사건을 야기하고 그 사건들과 선택들의 총합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부담스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