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육 개월의 회고
올여름에 처음으로 연재를 시작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글을 쓰면 된다는 단순한 명제를 깨닫고 시작한 시리즈를 어느새 육 개월째 쓰게 되었다. 사실은 생각만큼 부지런히 글을 생산해내지 못해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심히 느끼는 중이긴 하다. 그러나 계속 어떻게든 이어오고는 있는데—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계절은 돌고 돌아 벌써 겨울이 되었다. 아가는 추워진 날씨 탓인지 어마무시한 무언가 (아마도 감기 바이러스의 일종이겠지만)에 옮아왔고, 이 바이러스에서 저 바이러스로 옮겨가며 한 달을 꼬박 앓았다. 그러고도 잔재가 남아서 온 가족들이 모두 돌아가며 기침을 하고 한 명씩 차례로 심한 몸살을 앓고서야 모두가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정말 무언가를 이루고 성장하기 전에는 고난이 있기 마련인 것인지도 모른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비유를 쓰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이렇게 꼬박 한 달을 아프고 나니 움직임과 인지능력, 감정 표현과 사회성 등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훨씬 발달한 18개월 아가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나도 그만큼 성장했을까? 그래서 이번 화에서는 돌잡이 아가가 수도 없이 아프면서 토들러로 자라나는 동안 나는 어땠는지 돌아보려고 한다. 분명히 반짝이는 하이라이트도 있었지만 또 너무나 괴롭고 공허했던 시간들도 엄연히 있었으니, 우리 삶은 모두에게나 한결같이 공평하다.
지난 육 개월을 돌아보면 정말 꾸준하게 열심히 일했고 행복했으며 영감을 주는 사람들이 속한 집단의 일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것은, 영감을 주는 반짝반짝하고 프로페셔널한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은 약간의 긴장(Peer Pressure)과 함께 신선한 자극을 주는데 게다가 그들이 진실되고 인간적으로도 존경할만한 점들을 갖고 있다면—그 어려운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나는 경이로움을 느끼며 일터로 향한다는 거다. 호주 직장 문화 특성상 누구라도 바닥을 드러날 만큼 압박을 받거나 뭔가에 쪼이는 상황 자체가 없어서 그런 걸까 생각해 봤는데 (물론 그런 곳도 있겠지만 우리 회사는 비영리기관이고 국제개발협력을 하는 사람들의 특성상 사명감이 짙어서 덜 한 걸 수도 있다) 그런 걸 생각하는 자체가 내가 한국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힘들고 스트레스받아도 그걸 주변에 티 내거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지 않고, 어떻게든 유머와 공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유연하게 그 상황을 이겨내는 그런 컬처가 이 기관의 본연의
모습이자 60년간 사람들이 나고 들면서도 지키고 가꿔온 전통이었다.
직장에서 안정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안정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특히 해외에서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소속이 생겼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이 안정과 소속감이 주는 정신적 만족감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았다. 0에서부터 쌓아올린 이 소속감과 안정감은 이걸 얻기 위해 노력한만큼 이유있는 온전한 내것들 중 하나였다. 게다가 너무 감사하게도 일에만 집중하고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는(!!!) 좋은 매니저와 팀을 만났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더욱더 포텐셜이 나오는 것 같다. 스스로 프로젝트를 이끌어가고 목표를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면서 나도 잊고 있던 추진력과 창의력 같은 것들이 발휘되기도 했고 또 그걸 당연히 여기지 않고 인정해 주는 분위기여서 한 달에 한번 열리는 스태프 미팅에서 연속으로 스태프 어워드를 받기도 했었다. 이건 소소하게 가족들과 자축했던 작은 성취였는데 호주 회사에서 혼자 외국인으로 일하면서 얻어낸 인정이어서 의미가 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어와 문화 차이를 넘어서서 진심은 통하고 누군가는 그걸 알아준다는 것을 느껴서 아주 기뻤다.
그래서 처음의 어리바리한 친근한 이방인이었던 나는 영어가 부족하니 일이라도 잘해야 한다라는 부담감으로 홀로 외국인인 것을 너무나 크게 생각했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회사의 여러 인터내셔널 오피스에는 아예 로컬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고 그들과 일하는 파트너와 로컬 커뮤니티들은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문화차이와 나 스스로 만든 편견과 벽 같은 걸 서서히 넘으면서 나도 점차 내 정체성을 찾고 본연의 캐릭터가 나오기 시작했다. 호주 와서 계속 INFP로 살아왔는데 이제 다시 E 성향이 조금씩 나오고 있어서 기쁘다.... 아직 영어가 좀 부족해서 그들과 완벽하게 수다는 못 떨지만 그래도 수동적으로 듣던 거에서 벗어나서 내 푼수스러움과 허당끼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 게, 많이 편해졌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렇게 적응해 나가는 동안 회사에서 준 랩탑을 빼고는 전부 석사를 하며 쓰던 것들을 그대로 써왔는데 육 개월 수습 통과가 확정되면서 여러 가지 장비들을 구비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은 이런저런 귀여운 핑계들을 만들어서 단짝에게 선물 받았는데 도구들로 인해서 생산성이 극대화되는 걸 느끼면서 이 또한 커다란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육아 역시도 사랑과 기쁨을 최고치로 주는 영역이었으나 그에 비해서 내가 잘하지 못하는 영역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괴롭기도 했다. 에너지가 바닥이 났을 때는 감정 컨트롤이 안 되었고 혹시 내가 우울증인가 싶을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평일에는 워크스테이션에 서서 동료들과 미팅을 하고 아사나(ASANA)의 To-Do-List를 지워나가며 기쁨과 만족, 성취감이 넘치는 일과를 보냈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그 와중에 아기 밥을 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나면 남편과 나는 모두 뻗어버리기 일쑤여서 우리의 다른 집안일들은 자꾸 밀렸고 어지러워진 집안을 보는 게 스트레스였다.
또 아가가 잠을 잘 못 자는 날에는 퉁퉁 부은 얼굴로 대충 아침을 주고 등원을 시키기까지 너무 에너지 소모가 심했고, 우리의 에너지가 바닥을 칠 때마다 등장하는 코코멜론(Coco Melon)에 의지하여 조금의 쉼과 여유를 연장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카톡이 쌓여갔고 여기 친구들의 왓츠앱 메시지를 읽고 답장할 기운이 없었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라이프 어드민들이 놓여있었는데 그걸 해결하기로 해놓고 에너지가 없어서 완성을 못하다 보니 스스로 자존감이 떨어졌다.
이렇게 또 번아웃이 오려고 마음속에 서서히 꽈리를 틀고 있는 게 보였다. 몇 주간 번아웃인가, 우울증인가, 아니면 향수병인가,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내면은 어지럽고 여유가 없고 또 한편으로는 공허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아무리 감사한 일이 일어나도 그리고 아무리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상태여도 그것에 반응하기가 어려워지고 감정이 무뎌진다. 마음속으로는 혼자만 있고 싶은데 또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 이유를 채 알아차릴 틈도 없었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역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쉬지 않고 교외로 나들이를 갔다. 아가와 남편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들은 행복했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게 오래가진 않는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점점 속이 병들어가는 게 느껴지면서 겉으로도 티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그런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는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아서— 예전에 좋아하던 말랑말랑한 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했고, 의식적으로 향초를 켜기 시작했다. 일상 속에 감성을 촉촉하게 해 줄 요소들을 넣었다. 그동안 너무 팍팍하게 여기서 살아남아야 돼, 생산성 생산성!!! 하며 지낸 것 같아 책상 옆에다 우리 아기의 포토제닉 한 모습을 액자에 담아 가져다 두고, 예쁜 말씀과 나눔들이 쓰여있는 책들을 함께 쌓아두었다. 방에는 공기청정기를 가져다 두고 일하기 전에는 무조건 청소기를 돌리고 샤워를 하고 환기를 했다. 꽃이 있으면 그건 무조건 워크스테이션 근처에 두고 방 안에 있는 식물 친구들에게도 더 신경을 써주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는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어도 이럴 때일수록 건강식으로 꼭 챙겨 먹기로 다짐하고 16:8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 아침 열 시부터 오후 여섯 시 사이에만 먹을 수 있는 소중한 식사를 무조건 신선한 재료로 내 손으로 직접 챙겨 먹기 시작하니, 정말 신기하게도 먹는 양은 줄었는데 훨씬 덜 피곤해졌다. 지금 시작한 지 삼 주째인데 밤에 잠을 훨씬 깊게 자게 되고 혈색이 좋아진 것 같다. 피곤해서 눈 뜨려고 블랙커피 진하게 마시던 일과를 버리고 아침에 30분, 점심에 30분 걷기를 시작하니 커피 없이도 몸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씩 몸이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면서 더 많은 에너지들이 생겨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조용히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 나가는 훈련 중이다. 이렇게 하다가도 언젠가 아가가 아프면 또 우리의 일상이 흔들릴 것을 알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루틴을 견고하게 만들어두고 싶다.
나와 일하는 동료들은 대부분 바쁜 시간을 쪼개서 지역 사회의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겐 오랫동안 해온 취미가 있으며 그걸 본업과 동등한 선상에 놓고 지키고 가꿔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친구의 와이프는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는 기관에서 일을 하면서 책도 쓰고 직접 마케팅부터 출판까지 다 해내는 시인이다. 이들이 나와 똑같이 풀타임으로 일을 하고 또 애가 셋이거나 나보다 부양할 가족이 많은데도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도전이 되었다. 내가 언제까지 아가가 있다는 것을 핑계로 하고 싶은 것들과 해야만 하는 것들에 핑계를 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에 경종이 울렸다.
역시 사람은 닮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그런 사람들 틈에 있어야 한다.
물론 그들 틈에 있으면서 가끔은 나는 아직 갈길이 멀기 때문에 그들과 내가 다른 것 같아 좌절감도 들고,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따듯하게 받아주는 팀이어서 그 너그러움에 마음속 깊이 위로받았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