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세상은 얼마나 무너지기가 쉬운가
오늘은 목요일이고 내일부터는 호주의 연휴 중 하나인 부활절 휴일이 시작된다. 우리 회사는 약 30분전, 점심 시간을 기점으로 모든 장비를 내려놓고서 (정말로 'Tools down'이라고 이야기한다) 휴일을 맞이하기로 했다. 이번 연휴를 앞두고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내가 너무나 애정하는 우리팀 커뮤니케이션 리드가 이런 이야길 했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스켜지나가는 인연들에게까지 꼭 다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에게 다정한 건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 같아. 그 사람들과 맺는 좋은 인연과 그 에너지가 결국 다 내게 돌아오거든.
사실 내가 이분을 너무 좋아하는 이유는 이분과의 대화에서는 항상 짠하고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약함과 부족함을 스스럼없이 터놓고 공유하기도 하면서 그걸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자세에서 생각의 결이 많이 비슷했다. 내 언어가 아직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늘 큰 공감과 지지를 해주기에 대화 그 자체만으로도 내가 치유받는 느낌을 주는 그런 분!:) 그래서인지 이 대화를 나눈 후 마음이 따듯하고 단단해졌었다. 누군가에게 따듯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단순히 나의 편의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런 관계들이 모이고 모여서 내 일상을 이루면 어느 순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룬다고 믿어왔는데 그동안의 믿음에 힘을 실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의 소심하고 마음 여린 남편 웨이몬드의 생존 전략은 지금 이 곳에서 다정할 것이었고 존경하는 최재천 교수님의 책 <다정한 것이 세상을 구원한다> 에서도 다정한 생명체들은 생존에서 살아남기에 더욱 유리했다. 이처럼 다정함은 결국에는 우리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재능이며 무기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천국이 될 것이며 반대로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지금 있는 그 곳이 지옥이 될 것이라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말씀처럼 더 나아가서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비범한 능력이기도 하다.
다정함이 재능인 것처럼 체력은 곧 능력이기도 해서, 하루만 잠을 설쳐도 그날 아침의 나는 매우 까칠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요즘엔 엄마 껌딱지가 된 아가와 퇴근 후 씻고 잠든 이후에도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하며 행복한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는데, 몸에 좋은 것들을 아무리 때려먹어도 그 다음날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것은 잠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서도 나는 정말 잠에 취약한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 전날의 수면이 결국 다음날 나의 아침 컨디션을 정하게 되고 그 기분이 그날의 태도가 되지 않게하는 것은 미션에 가깝다. 커피의 힘과 따듯한 샤워, 그리고 초콜렛이나 각종 간식의 힘을 빌려도 안 될때는 절망적이다. 한껏 다운 된 상태로 아가의 등원을 준비하거나 나의 출근을 준비하고 그날의 일과들을 해나가다 보면 기운이 조금씩 올라오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는 그렇게 귀찮고 성가시던 일이 기운이 올라오고 나서는 아무런 타격감도 주지 못하는 경험을 해본적이 있는지? 분명 아까의 나는 머릿속에서 그 사람이 뭘 잘못했는지 즉각적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까칠해도 되는'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그게 나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잘 쉬고 좋은 걸 먹고 좋은 컨텐츠들을 보면서 몸에도 정신에도 영양분을 공급해주어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의 체력과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한 상태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태반이니까.
그래서 요 몇달간 최상으로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루틴들을 잡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밤 늦게도 커피를 마시며 쓰던 브런치를 놓고, 껌딱지 아가를 재워두고 잠깐 들여다보는 도파민의 늪에서도 빠져나와 열시가 되면 무조건 잠자리에 들기로 마음먹었다. 아침 여섯시면 눈을 뜨고 엄마를 찾는 아가에게 최상의 컨디션까진 아니라도 그에 걸맞는 에너지 레벨로 함께 있어주려면 잠을 사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밤이 없는 한국에서라면 불가능했을 삶이지만 이곳 호주에서는 열시면 늦은 밤이 되어버리기에 가능하다.
밤에 잠자리에 일찍 드는것 이외에도 그 다음날 먹을 식단을 간단한 건강식으로 준비해뒀다. 유튜브를 보다가 알게 된 오버나이트 오트밀 푸딩 (오트밀, 오트밀크, 치아씨드, 린 씨드, 카카오 파우더, 꿀, 블루베리 혹은 바나나의 조합)을 만들어 놓고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일어나 프로틴과 콜라겐이 든 쉐이크를 먹고 챙겨둔 런치와 사과, 요거트 같은 간식거리를 챙겨서 일터로 향하거나 집에서 일하면 저축도 되고 몸에 나쁜걸 덜 먹게되니 몸에게도 떳떳하다. 그리고 주 2회는 꼬박꼬박 우리 가족 다같이 수영장에 갔고 또 나머지 날씨가 좋은 날에는 우리 가족 다함께 산보를 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고나면 잠도 푹 잘수 있었고 아가도 활동 후엔 잠을 더 잘 자주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딱 맞는 루틴을 찾은 것 같았다. 아, 컨디션 관리 이렇게 하는 거구나? 했다.
그렇게 기고만장하고 있는 사이에 또 다시 찾아온 사건은 나의 자신만만함과 기고만장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아가가 수족구에 걸린 것이다. 아가가 아프니 그동안 유지해오던 우리의 루틴과 체계들이 모두 흔들렸다. 작은 것에도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출렁이는가. 제대로 잠도 못자고 아가를 지키고 열을 체크하고 약을 먹이며 보내는 며칠이 지나고 아가가 완전히 나으며 우리 가족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는데는 짧게는 일주일부터 길게는 한달도 걸릴 수 있는 사건이었다.
처음 아가가 아팠을 때의 경험이 너무나 강렬하다. 엄마가 일터에 복귀하자마자 나가기 시작한 데이케어에서 아가가면역력을 키워나가는 와중에 온갖 병균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 아가가 아팠을 때, 내가 지켜오던 모든 일상과 우리 가족의 가치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두번째로 아가가 아팠을 때는 응급실에 가서 아가가 얼른 일어나기만을 기도하며 그 어떤 일상도 내게 중요하지 않음을, 모든 것을 가져가도 되니 아가만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나날들도 있었다. 세번째, 네번째가 되자마자 이제는 아가가 아픈 징조가 보이면 그 순간부터 일상이 무너지는 것을 이미 예견하면서 아가를 회복시키는데 집중했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전환이 자연스러워지며 예전보다는 그리 힘들지 않게 잠 못들던 나날들을 버텨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가가 아프고 일상이 무너졌을때 비로소 내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었나 깨닫게 된다.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삶이 출렁일때마다 다시 일깨워지는 내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는 일상. 별다른 일 없이 평범한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를 깨달을때마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게 된다.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매일 얼굴 보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료들, 가까운 친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단골 카페의 바리스타나 아가가 다니는 데이케어의 친근한 선생님들까지... 내가 속한 집단과 사회 안에서 그 일상을 다정하고 소중하게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가가 아픈데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했던 순간에 절망감에 빠지려고 했던 나를 구해준 것은 생각지도 못할 때 날아오는 동료들의 따듯한 메세지와 다독임이었다. 넌 정말 잘 하고있어, 아가가 아프면 엄마들은 약해지는데 지금 넌 너무 잘하고 있고 앞으로 더 강해질거고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거야... 그들의 메시지에 다시한번 마음을 굳게 먹고 일터로 향했다. 아직 컨디션이 100% 돌아오지 않은 아가에게 약을 먹여서 데이케어에 보내고 선생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면서도 따듯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고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감히 고백하지만 나는 한국이라는 경쟁 사회에서 삼십년을 살아오며 누군가와 어쩔수없이 나를 비교하고 이것저것 따지기도 하면서 살아왔었다.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실 그렇게 따듯한 사람도 아니었고 기분이 태도가 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호주에 와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그 비교잣대가 서서히 의미없어지기 시작하고 찌질해보였달까. 작은걸 가지고 손에 쥐려고 아둥바둥하는 것처럼 보여서 안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는 어느새부터 너도 나도 언젠가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연결된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감히 말하건데 그러기 시작하면서 내 세상이 또 한번 변했다. 내가 낫고 니가 낫고 또 이래서 잘났고 저래서 잘났고, 하면서 급을 나누고 선을 긋는 마음은 결국은 그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코 나 하나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 마음은 늘 불안하고 강박적인 삶을 살게 만들거다. 물론 성장을 위해 어느정도 결핍이나 불안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게 자의가 아니라 강박에 의한거라면 - 끊이지 않는 결핍의 굴레에 갇히게 되는 것 같다. 뭔가를 하나 이루면 그보다 더 많은 걸 가진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고 계속해서 더 높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할테니까.
만약에 지금까지도 만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어왔다면 마찬가지로 서른이 넘어 석사를 하고서 새로운 분야에서 발을 떼는 나 자신을 무모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심지어 지금 어려운 환경에 있는 모든 이들이 결코 한 두가지의 잣대로 판단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서 동등하고 완벽한 삶 (Fullness of life)을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은가. 이건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기관에서의 미션이기도 한데 나는 그래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좋고 더 오랫동안 지속가능한 구조를 만들며 계속해서 해나가고 싶다. 비록 지금은 호주에서 석사를 마치고 서른이 넘어 다시 커리어를 시작하는 출발선에 서있지만 이 출발이 결코 늦은 것이 아니라 더 오래오래 달리기를 할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 일을 더욱더 오랫동안 하기 위해서 조화로움을 찾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몸과 마음을 아끼고 돌봐줄 것이다. 건강한 음식과 좋은 습관, 사랑스러운 에너지로 가득 채워서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고싶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가까운 누군가의 일상에 조금이라도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언젠가 말못하는 아픔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위로와 응원을 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오래오래 조화롭게 살아나가기 위해서 내가 택한 전략은 역시나 나와 만나고 엮이는 모든 이들에게 한없이 다정하기이다***
어떤순간에서 누군가가 다정함으로 나를 구하는 히어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지금 내게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사람도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어떻게든 연결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아가가 아프기도 했지만, 아가가 낫고 난 뒤에는 엄마 껌딱지가 된 아가와 보내는 시간들을 최대한 밀도있게 보내려고 노력하느라 몇주간 글을 통 못썼다. 몇번은 글을 쓰다가 지우기도 했는데 너무 무리해서 허슬하며 글을 쥐어짜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조금 더 빠르게 글을 생산해낼 순 있겠지만 이 글쓰기조차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과의 시간을 더 다정한 것들로 채우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과 글쓰기도 조화롭게 해나갈수 있기를 바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넘는 사람이나 무례함을 장착한 사람은 어디에든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딱 세 번까지만 참기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