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여기까지이거나 여기부터이거나'를 읽고
책 제목을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처음 본 책이었지만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단숨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2016년 4월, 독일에서 삼시세끼 소시지만 먹으며 모은 종잣돈을 털어 떠났던 아이슬란드. 책 속의 경이로운 풍경 사진들과 작가의 독백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곳에서 느꼈던 잊지 못할 감정과 생각들이 취기처럼 올라왔다. 아이슬란드는 그런 곳이었다. 대자연과 나, 이 둘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곳. 단, 며칠의 기억을 가지고 평생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게 하는 곳.
어쩌면 그때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섬’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된 그 순간이.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 홀로 동떨어진 ‘섬’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이.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뀐 순간이.
아이슬란드, 난 여기부터였다.
당시 아이슬란드와 마주한 나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반사적으로 나온 짧은 탄성도 그대로 다시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들리는 대로,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끊임없이 펼쳐졌던 지평선. 지구 최북단의 차가운 공기. 고요히 떠있는 빙하들. 도화지처럼 새하얀 눈. 굵직한 물줄기와 천둥처럼 떨어지는 폭포들. 하늘인지 땅인지 구분 지을 수 없었던 설경들. 그리고 기다리던 오로라를 마주했을 때 나는 사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눈으로 담아야겠어.’
한국에 돌아온 후, 부쩍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단순히 아이슬란드의 하늘, 오로라가 그리워서가 아니다. 길가의 꽃들을 바라보는 시간도 늘었다. 지하철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에 눈을 감는 시간도 늘었다. 계절이 바뀌어 공기가 차가워질 때면, 코로 크게 숨을 들이쉬는 시간도 늘었다. 아이슬란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오랫동안 찍어왔던 수많은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놓았다. 내가 놓쳐왔던 것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그것은 ‘일상을 온전히 느끼는 삶’이었다.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곳에서 3일밖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덟단어 – 박웅현) 여행을 가서 그렇게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찍고, 보고, 먹고, 느끼려고 애를 썼던 것은 그 여행이 언젠간 끝난다는 사실을,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일상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하지 않다. 지금의 나는 오직 지금 존재할 뿐이며, 내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오늘의 일상, 오늘의 풍경도 오직 오늘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온몸을 다해 느껴야 한다. 내 일상 속에서 아이슬란드를 찾아내야 한다.
많은 돈이나 명예, 권위보다 어린아이의 오감, 시인의 감수성을 갖고 싶다. 보다 많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여행자다. 파리나 아이슬란드가 아니라 ‘지구’에 여행을 온 것이다. 일주일간의 휴가, 탈출, 해외여행을 위해 일상을 ‘버티는’ 것 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을, 일상을 '여행지'로 만들어야 한다. 언젠가 지구를 떠날 날이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 우리는 최대한 이 행성을 사랑하고, 내 일상을 사랑하고, 지금 내 주변의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 오감으로 찍은 사진들로 내 머리와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가벼운 마음으로 이 여행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야수 같던 파도를 향해 걸어가더니 멈추어 선다. 바다와 파도 일몰의 황홀한 변주를 멈추어 서서 바라만 본다.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눈으로 간직하고 포말에 적셔지는 것이 이 순간을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란 것을. 그것은 어쩌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고, 성공을 갈망하는 여러 사람의 좌우명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싫다. 획일화된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을 착취하기 위해, 성과와 자본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선전문구 같다. 정말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다 뛰고 있으니까, 남들에게 뒤쳐지면 안되니까, 무작정 뛰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그 끝이 어딘지, 뛰면서 잃는 것은 무엇인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고민하지도 않는다.
뛰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정말로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힘차게 뛰어나가는 그의 열정을 마땅히 응원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의 길과 빠른 속도만을 강요하고, 아스팔트 벽에 사람들을 가두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강제적으로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긋지긋하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고? 웃기는 소리다. 오늘도 내일도 다 같이 걸으면 된다. 같이 손잡고 천천히, 주변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으며 계속 걸어가면 된다. 풀과 나무, 꽃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밤하늘의 달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한 끼 식사에 온정을 느끼며, 같이, 다 같이 계속 걸어가면 된다. 걸을 때만 비로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더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액자를 걸며, 그렇게 계속 걸어가면 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 모두 여기서부터다. 다 같이 손잡고 우리만의 속도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걸어가면 된다.
“모나거나 거칠어도, 둥글거나 뒤틀려도, 휘어지거나 납작해도, 그 모습 그대로 괜찮아. 같아지려 할수록, 보여주려 할수록, 거짓이 되니까”
“용기를 내야 하는 아주 잠깐의 순간. 그거면 충분해. 알지 못했던 곳으로 뛰어들어 봐. 너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테니”
여기까지이거나 여기부터이거나, 답은 당신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