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한국은 처음이시죠?
요즘 예능프로그램을 보니 연예인이나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외국인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서울메이트' 등의 콘셉을 들여다보니, 문득 작년 여름 우리 가족과 함께 지냈던 Ann이 떠올라, 늦었지만 앤과 함께 나누었던 특별한 추억을 떠올려본다.
'겁 없이 미국에서 살다 온 가족' 집에 미국 할머니가 '겁 없이 한국으로 여행' 오셨다.
- Ann은 누구?
1932년생 86세. 미국 동부 조지아주 애틀랜타 거주. 전직 교수였던 남편 Jim과의 사이에 두 딸(62세, 60세)을 두었다. 전직 영어교사. 초중고등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20년 간 일하고 퇴직.
비영어권 나라? 처음. 아시아? 당연히 처음! 한국? 말할 것도 없이 86년 생애 처음!!!
Ann은 나의 지인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친하게 된 미국인 친구의 친구의 며느리의 할머니.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사돈의 팔촌의 당숙 쯤 되는 사이라고나 할까?!
- 왜 한국인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프로그램처럼 한국에 친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메이트'처럼 셀럽의 집에 초대받은 것도 아닌데, 고령에 꼬박 하루 걸리는 장거리 여행길,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굳이 오신 이유는? 바로...... 이 남자 때문.......
지. 창. 욱. (운명의 장난? 배우 지창욱은 Ann이 꿈에 그리던 한국땅을 밟기 며칠 전 군입대했다. 며칠만 일찍이었다면 Ann과 함께 지배우가 입소하는 훈련소 앞에서 노란 손수건이라도 휘휘 흔들어 주었을 텐데). 앤은 기황후, 뿌리 깊은 나무, 위험한 상견례, 선덕여왕, 공항 가는 길, 밀회 등 한국 드라마의 열혈팬으로 모든 장면과 세세한 디테일을 마치 어제 본인에게 일어난 일처럼 잘 기억한다(사실 정작 본인일은 어제 일도 가물가물하다). 송중기, 유아인, 송승헌, 이동욱, 정일우, 이병헌 등의 배우들을 좋아하지만 특히 지창욱의 열렬한 팬이다.
한국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앤은 5년 전부터 드라마에 빠지면서 한국방문을 버킷리스트에 올리게 된다. 남편 Jim은 장거리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도시남과는 거리가 먼 정원남(정원 가꾸기에 온 힘을 기울인다는)이기 때문에 일찌감치 동반 여행은 포기. '혼자서라도 반드시 가고야만다'는 굳은 각오로 단체관광에 합류했지만 일정을 찬찬히 보니 고대하던 서울에서의 일정은 강화도와 DMZ 투어를 포함하여 사흘뿐, 대구, 경주, 부산 등지를 도는 기간이 더 길었다. 드라마 곳곳에서 비치는 서울의 모습과 한류 스타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을 보기 원했던 Ann으로서는 대실망일터. 그러던 차에 우연히 앤은 며느리 브리트니의 시어머니 셰리의 친구 히데의 친구인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혹시. 만약. 설마. 가령. 우리가 승낙한다면 패키지 투어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 집에서 일주일 가량 함께 머물며 서울 구경도 해보고, 한국 음식도 맛보며, 평범한 한국 가족의 일상을 공유해볼 수 있을지 조심스레 물어오셨다. Hide는 부담스럽다면 No를 해도 된다고 하였으나 나는 망설임 없이 "Okay~No problem"을 외쳤다.
왜냐하면, 첫째, 히데의 부탁이니까! 둘째, 우리 가족도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 설렘과 준비
오케이를 외친 그 날부터 Ann과 이메일 수십 통을 주고받았다. 가족 소개, 취미, 직업, 좋아하는 드라마와 배우, 가보고 싶은 장소, 먹어보고 싶은 음식, 먹지 못하는 음식, 아침식사 메뉴, 취침시간과 기상시간 등등. 굳이 손님맞이를 위해서라기 보다 서로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사는, 전혀 다른 문화와 연령대의 친구를 사귀어가는 과정이 즐겁기만 했다.
나는 앤에게 대략 아래와 같은 주의사항과 준비물에 대해 알려주었다.
1. 8월 중순은 연중 가장 덥고 습한 때이므로 가능한 한 건강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두시라.
2. 나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으니 이해 부탁드린다. 영어가 훨씬 더 유창한 첫째 딸 클로이가 마침 여름방학 기간이므로 의사소통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3. 미국 조용한 동네의 정원과 수영장 딸린 평범한(?) 하우스와 달리 우리 집은 작은 아파트라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단, 호텔에서 머무는 것과 달리 '리얼 한국'을 체험해볼 수 있다는 장점.
4. 쇼핑시간을 아끼기 위해 한국에서 반드시 구입하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알려주시라. 미리 구매해 두거나 판매하는 곳을 알아두겠다.
앤은 짐을 꾸리다가도 "긴소매의 가디건이 필요할까? 공연을 볼 때 정장 스커트와 구두가 필요할까?" 등등을 물으며,
1. 여행에 대비해 걷기 운동을 많이 하고 있다.
2. 너의 영어실력은 충분히 훌륭하다. 오히려 내가 한국어를 공부해두지 못해 아쉽다.
3. 한국 드라마에서 침대, 화장실과 주방이 모두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보았다(아마도 원룸). 공간의 크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한국 집에 머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을 뿐이다. 생각만 해도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4. 구매하고 싶은 것은 '공항 가는 길'에서 이상윤의 어머니가 만들던 전통 매듭 장식, '기황후'에서 지창욱이 먹었던 곶감, 지창욱이 광고하는 얼굴 마스크팩(주름을 없애겠다는 기대는 없지만 오직 지배우가 광고한다는 이유로)
마치 나란히 앉아 커피 한잔하는 것 같은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이메일 내용이 얼마나 길었던지 대부분의 끝맺음은 '앗, 벌써 Jim의 점심을 준비할 시간이군요.' '어머, 벌써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네요'였다) Ann이 유머러스하고 유쾌하며 적극적인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앤과 한국에서 만날 것을 나 또한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에서 2년을 지내고 돌아온 직후 한국 집의 인테리어를 몇 가지 바꾸었는데, 샤워부스를 만들어 미국에서처럼 건식 화장실(바닥에서 물을 사용하지 않는)로 리모델링한 것, 거실에 3인용 가죽소파를 없애는 대신에 8인용 원목 테이블을 두어 여럿이 함께 식사나 차를 할 수 있도록 바꾼 것이 다행이었다. 덥고 습한 8월의 날씨가 가장 걱정이었지만, 작은 벽걸이 에어컨과 화장실이 딸린 안방을 Ann에게 양보하는 것에 남편도 선뜻 동의하면서 해결.
웰컴 카드를 정성스럽게 쓰고, 개인 타월을 비롯한 욕실용품을 챙기고, 웰컴선물로 상주 반건조 곶감 한 박스와 지창욱 주연의 '위험한 상견례' 사진집을 브로마이드와 함께 포장하고, 쇼핑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지창욱이 광고하는 마스크팩을 미리 구매하여 침대 맡에 놓아 두니 준비 끝.
- 첫 만남
집 근처 인천공항 리무진버스 정류장에서 앤을 처음 만났다. 본인이 입을 옷과 가방의 종류와 색상까지 상세하게 알려주셨으므로 버스에서 내리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단번에 앤을 알아볼 수 있었다. 15시간 비행을 하고 온 80대 노부인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은 미소를 활짝 지어 보이는 앤은 꼿꼿한 허리에 큰 키, 사진 속 단발 생머리와 달리 '빠글'헤어스타일이었다 ('뽀글'보다 좀 더 찐~하게 말았다. 총 3주 간의 여행 동안 머리 손질을 편하게 하기 위해 평생 처음 시도해본 스타일이라며 익숙하지 않은지 부푼 머리에 손가락을 꽂아넣고 슥슥 매만졌다).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트렁크 두 개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축 늘어진 백팩을 어떻게 가지고 오셨는지. 친근한 뽀글 헤어스타일 덕분인지, 주고받은 이메일 덕분인지 처음 만났지만 오랜만에 아주 반가운 친구를 만난 기분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