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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ir Park 박민경 Dec 22. 2017

여자 둘, 주말 당일치기 제주여행

제목만 봐서는 뭔가 알찬 계획과 트렌디한 맛집 탐방, 인생 샷을 노리는 사진 찍기가 이어지고 셀카봉이 필수품일 것 같지만......


실상은 이랬다.


가는 비행기 안에서 지도 보며 행선지 상의(그나마 대략의 후보지 정도만).

대충 정해서 시간 되는 대로만 가고, 중간 어딘가 좋은데 발견하면 그냥 눌러앉고, 계획대로 못 가면 어쩔 수 없고 식. 행선지 상의는 그렇게 5분 만에 끝나 주섬주섬 지도를 집어넣고.

나머지 시간은 비행기 난생처음 타본 것처럼 창문에 매달려 경치 감상.   

맛집 검색 전무(제주 사는 지인에게 들은 고기 국숫집 이름 하나 달랑 얻음).

나름 인기 관광지로 여행 가는 30대 후반, 40대 후반 두 여자의 패션은, 멋내기용 명품백이나 코트, 세련된 등산복은커녕 동네 잠깐 마실 나온 차림새. 시커먼 점퍼에 각각 둘러 맨 백팩 안에는 화장품 대신 견과류, 지도, 곰돌이 젤리, 민트 껌 정도 넣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간 곳은

공항 주차장에서 렌터카 업체의 미니 버스를 타고 렌터카 사무실로 가서 소나타를 몰고 나와,

공항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국수거리.

유명한 식당인지 좁은 가게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대기번호를 듣고 (번호표도 없다. 알려주시는 번호를 기억해야 한다) 주문을 먼저 하고, 가게 밖 길가에 서성이며 기다린다.  

"저희 둘인데 뭐 먹을까요?" 주문받으시는 여사님께 여쭤보니 "취향대로 드세요" 툴툴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고기육수가 제일 맛있지만 둘이 왔으니 고기국수 하나, 비빔국수 하나 시켜 나눠먹으라고 명쾌하게 결정해 주신다.

"고기국수 두 개 시켜 먹다 보면 꼭 비빔국수가 또 먹고 싶어 지거든!"

유쾌한 말투와 힘찬 에너지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다음은 15분 거리인 제주도립미술관. 자원봉사자 분과 잠시 대화하던 중 언제든 살고 계시는 집에 놀러와 자고 가도 된다는 말씀에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작품을 볼 때는 둘이 다른 방향에서부터 시작해 돌면서 잠시 떨어져 각자의 속도로 감상했다. 중간중간 마주칠 때 인상적이었던 느낌을 공유해본다.   


사려니숲으로 이동. 눈길이라 구불구불 커브 운전이 조심스럽다. 주차장에서 숲 입구까지 운행하는 셔틀이 겨울에는 운행하지 않는다는 안내를 보고 별다른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는데 20분쯤 걸은 후에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 표지판. 주차장에서 숲 입구까지 걸어서 50분. 왕복하면 무려 두 시간이다.  

눈발과 우박이 번갈아 날리는 경사진 숲길을 예상치 못하고 두툼한 어그부츠를 어그적 어그적 신고 가자니 밧줄을 잡고 올라도 몇 번을 꽈당하며 의도치 않게 몸개그가 이어진다. 나란히 걷기에는 오솔길이 좁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로는 갈래길로 각자 가다가 이내 합쳐지기도 한다. 거리가 멀어지면 앞선 이의 뒷모습을 찍어주기도 하고, 나무에 쌓인 우박과 눈에 번갈아 혓바닥을 대고 먹어보기도 한다. 딱 구슬아이스크림이다. 마치 스티로폼 알갱이 같기도 한 특이한 질감 때문에 뽀드득 소리가 더 생생하다.

눈 내리는 숲 오솔길. 인적도 없고 흩날리는 눈발에 첫 발자국을 새기며 걷다 보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책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라며 한바탕 함께 웃는다. 유치하게 들릴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숲 요정이 당장 튀어나와도 전혀 놀라울 것 같지 않은 풍경이라 현실감 제로, 판타지 소설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입구에 다다를 무렵 빽빽한 수십 그루 나무 사이로 셀 수 없이 많은 까마귀 떼가 "까아악~~~까아악~~~" 길게도 소리를 내지르며 날아올랐다가 나무로 돌아왔다가를 반복한다. 희한한 광경이라 한참을 서서 목을 꺾어 올려보다가 이마에 까마귀 분비물이라도 맞는 거 아닌가 번쩍 생각이 들어 주춤 물러서며 발길을 돌렸다.

마침내 입구에 다다르자 동절기에는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내부를 잠깐이라도 걸어보자며 안으로 들어갔지만 요정 나올 것 같은 몽환적인 오솔길을 한 시간이나 걷고 보니 차바퀴 골 사이로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사려니숲 안 산책길에는 정작 흥미가 떨어져 버렸다. 곧바로 유 U턴

비자림으로 옮겨가자니 곧 문을 닫을 것 같고, 김영갑 갤러리를 가보고 싶었지만 공항과는 정반대 방향이라 후보지 중 본태박물관과 애월 해변가 중 한 곳만 선택해야 했다. 그래도 제주 바다는 한번 보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며 경치 좋기로 유명한 애월에 가서 석양을 보는 것으로 결정. 신호대기 중에 문득 허기를 느껴 운전대를 쓱 틀어 바로 보이는 짬뽕 집에 들어갔다. 바로 옆에 알쓸신잡2 촬영지라는 현수막을 붙인 꿩 샤부샤부 식당이 있었지만,,, 심지어 아침으로 면 종류를 이미 먹었지만,,, 얼큰한 국물이 당기는 순전히 그놈의 날씨 때문에 짬뽕 집으로 들어갔다. 큰 기대 않고 들어간 식당이었는데 사골육수 국물이 특허를 받은 집이란다. 한참을 걸은 후에 배가 고파서인지 정말 맛집인 건지 이유야 뭐든 간에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 행선지는 애월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지드래곤 카페를 목적지로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생각보다 많은 여러 음식점과 카페들이 모여 있어 토요일 저녁, 주차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바닷가에 앉아 조용히 경치 감상하다가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던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공사 중인 건물 앞에 대충 주차하고 세찬 바람에 눈도 거의 뜨지 못한 채 카페를 찾아가보니 입구부터 구석자리까지 정신없이 붐볐다. 기대와 조금 다른 분위기에 밖으로 나가 바로 옆의 텅 빈 조용하고 밝은 카페로 들어갔다.


제주에서 먹은 두 끼 밥값에 해당하는 금액의 커피와 케이크 값을 헉~~ (실제로) 소리 내며 지불하고,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도 유리, 천장도 유리, 바다 쪽도 유리. 사면이 유리로 된 스폿이 있어 그 위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햇살 좋은 날 그곳에 앉아 있으면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광합성이 돼서 나이 마흔에도 키가 더 자랄 것 같은 느낌이다.

워낙 심한 바람에 유리창이 터져나갈듯이 덜컹거려 좀 으스스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밖에서 와장창~~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카페 안 사람들이 모두 자동으로 기립. 차에 뭔가 떨어졌다는 소리에 몇몇 사람들이 뛰쳐나갔고 추가 보험료 아낄세라 보험 안 든 렌터카를 허술한 공사장 앞에 대충 주차해두고 온 우리는 국수보다 더 비싼 8천 원짜리 티라미수를 남겨두고 뜨거운 커피는 원샷한 채 허둥지둥 밖으로 나섰다.

방금 전 문을 열고 들어갔던 카페의 현관 앞에 주차해 둔 누군가의 차 지붕으로 철근 슬레이트가 날아와 차 전체를 덮친 걸 보며 '저 차는 보험은 잘 들어두었나' 충분히 걱정해 줄 틈도 없이 다급히 우리 차로 달려가 보니 천만다행으로 멀쩡했다. 공항으로 조금 일찍 나가자며 차를 이동하는데 마침 제주도 앞바다에 풍랑경보가 내려 해안가에서는 안전지대로 이동하라는 행정안전부의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공항에 돌아와 발 디딜틈 없이 복작거리는 면세점에서, 엄마랑 친구 둘이서만 가는 제주도 하루 여행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래지던 각자의 아이들을 위한 작은 초콜릿만 하나씩 사들고 앉아 카페에서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눈다. 비행기에 탄 후에야 오랜만에 휴대폰을 확인하려고보니 아차!! 대기하던 의자에 휴대폰을 두고 재킷과 가방만 집어왔나 보다.  

출발 3분 전. 출발을 지연시킬 수는 없고 직원이 확인해보겠다며 일단 김포에 가 있으란다. 김포에 도착하자마자 직원이 다음 비행 편으로 휴대폰을 받을 수 있을거라고 안내해준다. 50분 정도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그게 대수랴.


휴대폰도, 읽을거리도 없는 수하물 카운터 옆 의자에 혼자 앉아 조용히 여행을 돌아본다. 휴대폰을 감사히 받아 들고 출구로 나오는데 큼지막한 렌즈의 카메라를 든 여학생들이 내가 방금 나온 곳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오나요?" 물으니 가수 '하이라이트' 그룹 멤버들이 곧 나올 거란다. 요즘 큰 아이가 학교에서 체육 수행평가 연습 때문에 하루에 수십 번씩 듣고 있는 그 노래의 주인공? 피곤함을 잠시 접고 그 자리에서 바로 뒤돌아 무리에 합류. 돌아선 지 1분 만에 가수들이 출구에 등장하여 나도 총총 따라가며 사진을 찍어 집에 돌아가 아이에게 자랑스럽게 사진을 건넸지만 알고 보니 아이도 노래만 알 뿐 가수 얼굴은 못 알아본다. 칫.


다음 날 아침 뉴스를 검색해보니 제주 산간에 40cm 폭설, 도로결빙으로 차량 고립, 강풍으로 항공 결항 및 지연, 풍랑으로 배 전복, 철근과 나무가 뽑혀 날아가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했다고 한다.


새벽 6시에 나가 밤 12시에 돌아오는 18시간 꽉 채운 하루 동안의 여행. 후보지에 있었던 김영갑 갤러리, 방주교회, 본태박물관, 비자림은 결국 가지 못했지만 크게 아쉽지도 않다. 여행은 때로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했는지 중요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냥 마음이 맞는 사람, 배려와 합이 잘 맞는 사람과 무엇을 보든, 무엇을 먹든, 무엇을 했든 그 자체로 힐링이 될 때도 있다. 너무 오래간만에 제주를 가 보기도 했지만 가족 아닌 친구와 단 둘이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꽤 먼 길을 떠나본지도 언제인지 기억이 희미하다. 떠나기 전부터

두 사람, 두 여자, 두 친구, 두 아줌마, 두 중년(?)의 가슴 두근거리는 설레임 만으로도 이미 여행의 즐거움은 그 몫을 다했다.


여행의 동행자는 회사 업무 때문에 만나게 되어 알고 지낸지 어느덧 십여 년이 지난 9살 차이 친구이다. 이제는 내가 처음 만날 당시 이 분의 나이가 되었고, 이 분은 어느 덧 50이 다 되어 간다. 하지만 마음만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걸 보면 십년 후에도 여전할 것 같다며 허헛 웃는다. 회사일로 시작된 인연이다보니 오랜 시간 지났음에도 아직 서로 존댓말을 쓰고, 빈번하게 만나 식사하고 수다떠는 것은 아니지만, 때 되면, 또는 좋은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늘 생각나고 만나게 되는 사람이다. 첫만남에 나이 묻고 바로 언니 동생 사이가 되어 말을 트고 격식없다며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언행을 하는 사이보다 더 격식있지만 더 편안하다.  


참고로 이 날 지출은,

1. 항공 20만 원(주말, 성인 2인)- 신규 발급받은 신용카드의 프로모션으로 한 명은 무료

2. 렌터카 19,700원+가스비 12,500원 (가스충전소 못 가고 바로 반납하여 거리만큼 계산하여 지불)

3. 식사 1만 4천 원 (고기국수 7천 원, 비빔국수 7천 원)

4. 식사 2만 원 (짬뽕 7천 원, 탕수육 13,000원)

5. 애월 카페 3만 원(최대 지출. 비엔나커피 8천 원, 티라미수 8천 원, 홍차 케이크 6천 원)

두 명 경비 총 30만 원 남짓.


하루 사용하기에 물론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비행기 타고 장거리 여행 기분 느끼며, 승용차 빌려 타고, 밥 두 끼 먹고, 산 보고, 바다 보고, 작품 감상하고, 하이킹하고, 일도 째고, 아이들도 잠시 맡겨두고, 마음 맞는 이와 대화하고 하루 종일 "아~~좋다~~~"외친 비용으로 비싼 가격은 아니었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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