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자지 같은 기획, 밑장에 깐 철학
인생과 공부에도 경영에도 철학이 있고 심지어 개똥에도…
옛 서양 철학자들을 보면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보통 수학과 과학, 미술 등 투잡 쓰리잡은 기본으로 했으니 말이죠. 철학이라고 하면 디지털과 동떨어진 걸로 보이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지금의 디지털 기술과 콘텐츠도 과학과 철학인 셈이니 어느 정도 맥이 닿아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 이 두 가지를 같이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네, 맞습니다. 주제가 철학이라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억지 부려봤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디지털 기획에 '철학'이라는 기초를 세우진 못했습니다. 일을 하다 보니 디지털 기획의 기저에 깔린 철학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고, 그렇게 해야 그 기획이 더 오래간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저에게 2013년은 그런 면에서 상징적인 해였습니다. 철학이란 걸 진지하게 고민하고 만든 기획이 있었거든요. 이 글을 통해 당시 배경이 알려지면 타 방송국 관계자들이 저를 죽이려 할 수도 있긴 합니다만, 10년 정도 된 일이니 공소시효(?)도 그렇고 이젠 흔한일이 됐으니 어느 정도 정상 참작될 거라고 봅니다.
'2013년 10월 21일'
방송국 최초로 저녁 메인뉴스 방송이 포털 두 곳에 동시에 생중계됐습니다.
물론 이 메인뉴스는 지상파 것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습니다. 오후 8시에 포털 센터 위치에 등장했으니 말이죠... 여하튼, 여기엔 로그인도 필요 없었으며 댓글로 실시간 채팅도 가능했습니다. 타 방송국도 처음엔 눈치를 보다 하나둘 포털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저희 단독으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준 시간은 한 달에 불과했습니다만, 뭐 어찌 됐든 포털에서 메인뉴스를 실시간으로 보는, 일종의 온라인에서 메인뉴스의 보편적 시청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공격적인 기획이기도 했고 나름 도박이기도 했습니다. 시청률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내부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저에게 일을 맡긴 윗분들은 저보다 혁신이란 단어를 더 잘 알아서 몸소 보여주는 더 무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대체 포털에서 메인 뉴스를 처음 생중계한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냥 대형 온라인 시장을 이용한 일반적인 기획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신생 언론사였으니 공격적인 기획이 가능한 일이었다고도 하겠죠. 그땐 포털에 방송뉴스를 다 넘기는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단 비판도 들었습니다. 네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걱정 인형을 끌어안더라도, 다음의 '두 가지 가치'가 더 컸기 때문에 일은 저지를만했습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보편적 시청권과 소통입니다.
"로그인 없이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우리는 로그인이 필수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회사도 돈을 벌려면 자신들의 플랫폼을 익명으로 사용하는건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용자 입장에서 보면 로그인이 불편한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터넷을 잘 모르는 어린이와 노인처럼 말이죠. 때문에 저는 포털과 협업할 때 저렇게 로그인 없이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또 하나, 바탕이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11년 제가 보도채널에서 뉴스 PD 하던 시절, 인근에는 형편이 좀 어려운 분들이 사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 한 복판에는 한 카페가 있었는데, 그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그곳엔 공용 컴퓨터가 2대 있었습니다. 커피를 먹기 위해 가끔 그곳에 가면 어린이와 노인이 컴퓨터를 쓰기 위해 수시로 들락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꾸준히 지켜본 바, 사랑방을 찾는 사람들은 재미난 동영상을 보거나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봤습니다. 형편이 좀 그러니 사랑방의 그 컴퓨터는 그들에겐 세상의 창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걸 찾아가는 첫 창구는 포털이었습니다.
만약 포털에서 직접 우리 뉴스가 실시간으로 보인다면 적어도 이들에게 정보의 시차는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소통의 도구인 채팅도 중요한 영역이었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실시간 채팅을 한다는 건 당시 사람들에겐 재미를 주는 요소였지만, 그 외에도 대중들은 참여를 통해 뉴스에 대한 뜻밖의 정보를 주거나 제보,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저한테 포털 생중계는 여러모로 굉장히 의미가 깊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철학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죠.
물론 이런 기획이 실현되기까지는 피땀을 흘린 여러 회사 관계자들이 있었고 가장 중요한 결정과 조언을 해주신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 그분들께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철학 관련 사례를 더 들어보죠. 지난 2015년 가을쯤 전 회사에서 디지털뉴스 부서 창설을 위해 발령이 났습니다. 초기 설계 인력은 부장과 저, 둘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규모가 커지긴 했지만, 20명 남짓이었고 이때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인력은 대단한 일들을 해냅니다. 1년 만에 페북 한 계정에서 주간 3500에서 4천만까지 도달한 겁니다. 당시 인스타그램은 팔로우가 10만이 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그 당시에 저희는 정치인 발언을 각색 같은 거 없이 생짜 그대로 짧게 잘라서 만들었습니다. 사건의 흐름을 구성식으로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발언과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 들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 클립의 경우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객관적 영상 전달도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정치인의 말이 행해진 현장의 공기 흐름과 분위기 등 텍스트에서 느끼지 못한 걸 독자들은 읽습니다. 그리고 댓글로 또는 마음속으로 각자 판단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재미있는 건 저런 쇼츠에 사람들은 댓글과 대댓글의 추천을 통해 그 콘텐츠를 규정해버린다는 점이었습니다. 독자들이 답을 내리는 건데, 제 기억엔 대부분 번뜩이고 재치 있는 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댓글을 달고 영상을 다시 만드는 게 유행이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알고리즘이 확증편향을 강화하기 전 단계의 모델이었기 때문에 현재와는 다르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당시 정치 클립을 통한 실험만으로도 객관성 클립의 반응에 대해 충분히 검증이 되었었다고 봅니다. 어쨌든 콘텐츠 기획에는 항상 철학이 있다는 것을 명심을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디지털 기획을 할 때 어떤 철학을 밑에 깔고 싶으신가요.
공감할 수 있고 정의가 잘 된 철학을 깔고 있다면 그게 아주 얇더라도 사람들은 분명히 좋은 반응을 할 겁니다. 어떤 채널이던 콘텐츠던 굉장히 편안하고 따뜻하게 또는 재미있게 볼 것이기 때문이죠.
오늘은 철학의 중요성 그리고 제가 했었던 일들엔 어떤 철학이 깔려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궁금한 질문이 있으시면 이메일로 요청해 주시면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진실을 코딩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