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재인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 중
본 연재는 카멜북스 소설 <내가 만든 여자들> 중 단편 <바지락 봉지>의 일부를 발췌하였습니다.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기 때문에 연재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서 <내가 만든 여자들>에서는 전체 이야기를 자세하게 만날 수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남편이 눈을 뜬 것은, 쓰러진 지 이 주째 되는 날이었다. 오빠! 하고 부르려 했는데 큰 힘이 목젖을 쥐고 누르는 것처럼 윽윽, 응응, 거리는 소리만 났다. 응응, 소리를 내며 그녀는 울었는데 눈물 때문에 자꾸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남편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선명 해졌다를 반복했다. 눈물을 닦고 싶었는데 오른손은 남편의 손을 잡느라, 왼손은 그의 얼굴을 쓰다듬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자기야.
남편이 말했다.
윽, 응, 응?
자기야. 그 어느 미로에 갇혀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윽. 으.
벽에 손을 대고 걸으면 돼. 절대 손을 떼지 않고 계속 걸으면 돼. 그러면 무조건 빠져나올 수 있어.
으.
꼭 기억해. 꼭. 꼭이야.
그 말을 끝으로 남편은 숨을 후, 토해 낸 후 멈추었다.
남편은 일찍 어머니를 잃었다. 시아버지와 시동생 하나가, 그녀와 함께 장례식장을 지켰다. 언니, 그냥 그렇게 간 거예요? 의식 한 번도 못 찾았어요? 유언…… 같은 거라도, 없었어요? 입술을 밀랍으로 봉한 듯 꾹 다문 시아버지를 대신해 시동생이 물었을 때, 그녀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어떤 미로에 갇혀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 그걸 마지막 말로 남긴 채 죽었다고, 어떻게 저들에게 이야기하고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남편이 쓰러진 날부터 온 세상은 논리와 개연성, 인과관계를 무시한 채 멋대로 돌아갔다. ‘왜’를 전혀 찾을 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둥그런 연속체를 이루었다. 그 연속체가 그녀의 팔다리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응, 없었어요…… 그녀는 대답하다가, 또 왈칵 울음을 토했다.
원망. 살아 있을 땐 티끌도 없던 원망이, 죽은 남편을 향한 마음을 가득 메웠다. 마지막 힘이 있었으면, 미로 따위 얘기할 힘이 있었으면, 그녀는 매일 생각했다. 그러면, 사랑해, 사랑해, 라는 말을 해도 되잖아. 미로가 다 뭐야. 어쩌라는 거야. 어쩌자는 거야.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탕탕 쳐도 진정이 안 되어 물을 석 잔은 마셔야 했다. 왜, 왜 그런 헛소리만 하다 간 거야. 왜…… 아무리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었다.
남편이 쓰러진 이후 그 어떤 것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라고 그런 얘길 한 거지. 마지막 순간에. 왜.
사랑해, 같은 말 대신.
내일 다음화가 이어집니다.
이 주 만에 눈을 뜬 남편이 유언인 듯, 아닌 듯 뱉은 마지막 말이 '미로를 빠져나가는 법'이었습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궁금증,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도 아니고, 고작 '미로를 빠져나가는 법'이라니... 참 이상합니다.
그는 왜 그런 말을 남겼을까요? 미로에 던져진 '나'는 이때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독특한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여성의 이야기들
낮에는 복싱, 저녁에는 암벽을 등반하며
매일 한 편의 글을 쓰는 작가 설재인.
서울대 수학교육과 졸업 후 교사로 일하다
퇴직하고 무급의 복싱 선수가 된
소설가가 선보이는
여성이 주인공인 12개의 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