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재인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 중
중복 없이, 모든 벽을 훑는다. 벽돌담은 우툴두툴했다. 얼마나 큰 미로일까, 얼마나 오래 걸릴까. 왜 저승은 날 이런 미로에 던진 것일까, 하고 그녀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으며 걸었다. 꽤 걸었는데 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내내 낮인 모양이었다.
그때, 담벼락에 닿은 그녀의 손끝에서 뭔가 피어났다.
글씨였다.
나는 태어났다.
그렇게 시작하는 글씨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조금 더 걸었다.
나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자랐다. 볼이 통통하고 발그레한 아기가 되었다. 나의 엄마는 직접 산 소고기를 다졌다. 쌀을 불리고 당근을 썰었다. 그걸 끓여 나를 먹였다.
희한하게, 너는 마트에서 산 이유식은 죽어도 안 먹고 구역질을 했어. 웩, 웩, 하고. 그래서 내가 다 손으로 만들어 먹여야 했지. 입은 고급 이어 가지고 말이야. 그녀의 엄마가 오래전 했던 말이었다. 잊고 있었다. 그렇게 정성 들여 키웠어, 엄마가, 너를. 그녀는 그때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고 말았는데, 그때, 고마워, 사랑해,라고 했어야 했다.
그녀는 계속 걸었다. 기억에서 사라졌던 일들이 손끝에서 피어올라 이야기를 빚어냈다. 아, 맞아, 이런 일이 있었어.
자신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그걸 하염없이 읽느라,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그렇지만, 결국 거기 이르렀다.
나는 홍대입구역 9번 출구에서 남자를 만났다.
그 얼굴, 눈, 코, 입, 그리고 입에서 피어오르던 입김, 갈색 코트, 꽈배기 문양의 검은 터틀넥, 헐렁하던 청바지. 다 기억이 났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다듬었던 머리칼과, 도드라지던 눈썹. 발갛던 볼.
그녀의 걸음이 좀 더 느려졌다. 맞아, 이런 일이 있었어.
그리고 남편이 쓰러지고 세상을 떠나는 부분에 도착했다.
다음 이야기는 소설 <내가 만든 여자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연인지 아닌지, 죽음의 문턱에서 만난 미로. 미로의 벽을 훑으며 걸어가 보니, 태어났을 때부터 나의 모든 것이 글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행복하고 철없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소개팅을 만난 남편 이야기. 그리고 어느덧 그가 세상을 떠난 후까지 다다랐습니다.
거기에는 뭐라고 기록되고 있었을까요?
독특한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여성의 이야기들
낮에는 복싱, 저녁에는 암벽을 등반하며
매일 한 편의 글을 쓰는 작가 설재인.
서울대 수학교육과 졸업 후 교사로 일하다
퇴직하고 무급의 복싱 선수가 된
소설가가 선보이는
여성이 주인공인 12개의 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