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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북스 Oct 28. 2019

사신(死神)의 변덕이 저를 살렸어요.

<혼자를 지키는 삶>


경찰서 시무식에서의 일이다. 서장님이 나더러 신년 인사를 한마디 하라고 하시기에 절찬리에 상영 중이던 영화 <신과 함께>를 보고 온 이야기를 했다. 소방관인 주인공이 불타는 건물에서 추락해 사망하고 동료들이 오열하던 초반부에서부터 눈물이 터져서 영화를 보는 내내 숨죽여 훌쩍거리느라 애먹었다고. 우리 경찰도 마찬가지로 죽음과 가까이서 일하고 있지 않은가, 동료와 국민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한 해를 보내자고 했다.

“현장에서 함부로 행동했다가는
사신이 명부에 이름을 적으니 경찰관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서장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파출소에서 근무하며 먹신과 잠신의 총애를 받던 때의 일.

나도 사람인지라 출근하기 전에 먹는 때 이른 저녁밥과 서너 시간의 얕은 낮잠으로 야간근무 열두 시간을 버티기엔 역부족이었다. 운전을 하고, 이야기를 듣고 달래거나 으름장을 놓고, 때로 전력을 다해 뛰거나 수갑을 채우고, 때때로 꼬집히거나 걷어차이다 보면 청하지 않고도 얻어먹은 욕 몇 마디로는 달랠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대기근무 두 시간은 얇은 벽 너머 들리는 민원인들의 고성과 언제 부를지 몰라 켜둔 무전기 소리로 선잠조차 들기 힘들었지만, 그마저도 건너뛰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신과 잠신이 주는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단 한 곳 있었다. 삼거리에 있는 버거킹 드라이브 스루 맞은편 교통섬이 바로 그곳이었다. 배고픔과 졸음과 사람에 시달리다 보면 교통섬에 세워 둔 순찰차에 앉아 와퍼 주니어를 빈속에 욱여넣고 잠시 뻑뻑한 눈을 감고 있을 겨를이 간절해지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밤 와퍼 주니어를 사는 것이 내 차례니 네 차례니 하며 순찰차를 타고 버거킹으로 향하고 있던 때였다. 버거킹 삼거리 왕복 6차로 한가운데에 SUV가 한 대 서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운전자가 자는 건지 죽은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현장에 도착해 순찰차를 문제의 차 뒤에 세우고 안을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핸들에 볼을 대고 엎드린 운전자의 어깨가 들썩 들썩하는 것이 딱 음주운전 중에 잠든 모양새였다. 큰 소리로 부르며 창문을 두드리고 손전등으로 얼굴을 비추어도 그는 도무지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별수 없이 차 문을 비틀어 열 생각으로 119에 도움을 청했다. 손실보상과 손해배상과 국가의 구상권 행사 그리고 자비 변상에 관한 짧은 논쟁 끝에 찰 둘과 119 대원 둘, 도합 네 명이 힘을 합해 차를 좌우로 흔들며 고출력 손전등으로 차 안을 밝혔다.

이때 사신死神이 예고 없이 나타나더라.


사신은 차 안의 남자를 깜짝 놀라게 해 깨운 뒤 브레이크에 얹어 둔 발을 떼게 했고, 기어가 드라이브에 놓여 있던 차를 앞으로 나가게 했으며, 더욱 놀란 남자가 차를 멈추는 대신 가속 페달을 밟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순찰차 안으로 뛰어들어 가속페달을 힘껏 밟도록 했다.


나는 곧 SUV를 앞질러 순찰차를 삼거리 한가운데에 급히 세웠다. 충격과 파열음을 예상하며 숨을 멈추던 찰나, SUV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순찰차에서 불과 이삼 미터 떨어진 곳에 겨우 멈춰 섰다.

소란스러웠던 삼거리에는 한순간 정적이 흘렀고, 
얼마 안 있어 남자가 넋 나간 표정을 한 채 차 밖으로 나왔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미란다원칙을 고지하고 그를 끌어다 순찰차 뒷좌석에 태우고서 문을 쾅 닫았다.


사신 같은 소리 하며 웃기지도 않은 소설 쓰고 앉아 있다고 누군가는 한마디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야간근무 때 기회만 생기면 뭘 먹거나 눈 좀 붙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기 보존 본능에 충실한 내가 앞뒤 가리지 않고 그런 상황에 뛰어든 일을 다른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 뭔가에 홀려서 그랬다고 할 수밖에. 가까스로 사고를 면한 것도, 마지막 순간에 사신이 내 이름을 명부에 쓰는 일을 어느 다른 밤에 하기로 변덕을 부렸을 뿐이라고 할 수밖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는 공무원의 순직을 인정하는 일에 
법관의 마음 씀이 너무 박하지 않기를 바란다. 
생삿길은 예 있으매 우리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리니.

경찰관의 근무 현장에서 실제로 아찔한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지난 9월에는 음주 운전을 한 20대 남성이 부산 도심을 휘젓고 다닌 것도 모자라 흉기로 경찰관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이런 순간에 경찰관들은 초인적인 순발력을 발휘해 사람들의 목숨을 지킨다고 합니다. 매일 위험한 순간이 도사리는 경찰관의 현장을, 그리고 그 현장에서 순직한 이들을 함부로 여기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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