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코 앞이다. 맘카페에서 늘 뜨거운 감자였던 추석은 올해도 어김없이 그렇다. 친정에 언제 가냐에서 양가에 가냐 마냐로 달라졌을 뿐. 어떤 이는 센스있는 시댁 어른이 먼저 오지 말란 카톡을 보내셨다며 자랑이다. 어떤 이는 나라 권고는 아랑곳않고 추석 계획을 세우는 친인척 탓에 속앓이 중이라 토로하기도 한다. 여러 기사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해주시면 얼마나 좋겠냐며 한숨을 쉬기도 한다.
“아들, 딸, 며느리야! 이번 추석에는 고향에 안 와도 된당께~”
“아들, 며늘아~ 이번 추석 차례는 우리가 알아서 지내마~”
그런데 말이다. 나는 저 플랜카드가 불편했다. 자리가 모자랐던걸까. 왜 ‘사위’는 없는거지? 불현듯 며칠 전 남편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우리도 추석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양가에 거의 매일 오가고 있는 상황인지라 가냐마냐는 이슈가 아니었다. 우리의 주제는 몹시도 클래식했다.
“내 의견은 딱 하나야. 일할 때 같이 일하고, 쉴 때 같이 쉬는거. 여자들만 부엌에 들어앉아있지 않는거.”
시댁에서의 그림은 이랬다.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며느리가 함께 들어온다. 시어머니는 음식을 준비 중이시다. 네 명이 소매를 걷어부치며 부엌으로 들어선다. 어머니는 손사레를 치며 두 아들을 내쫓는다. 도움이 안되는 것들일랑 방해나 말라고. 정 하고 싶으면 이따 설거지나 하라고.
친정에서의 그림은 이랬다. 한 명의 아들, 한 명의 딸, 한 명의 며느리, 한 명의 사위가 문턱을 넘는다. 엄마는 하이톤으로 우리를 반긴다. 마찬가지로 음식준비가 한창인 부엌엔 일거리가 산더미다. 결혼 후 1,2년 쯤 부엌일에서 열외였던 아들은 이젠 며느리와 세트다. “엄마, 뭐부터 하면 돼?”하면서 부엌에서 손부터 씻고 있다. 엄마도 이젠 그러려니 하는 눈치다. 딸은 딸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할 일을 찾아 나선다. 문제는 그 뒤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사위다. 딸은 사위의 옆구리를 눈으로 찌른다. 아내의 싸인을 받은 사위는 쭈삣쭈삣 난이도 1의 중간 설거지 더미를 향해 다가서지만 누군가 득달같이 달려와 저지한다. 장모님이다.
“자네는 저기 가 있게. 피곤할텐데 좀 쉬어.”
순간 집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딸과 아들은 장모님의 며느리 눈치를 살핀다. 장모님에게 등 떠밀린 사위는 ‘나보고 어쩌란거야’하는 표정으로 손님방으로 떠밀린다. 아들은 ok. 하지만 사위는 no.
우리 엄마는 사위를 차별한다.
잠자코 내 얘기를 듣던 남편이 깊게 한숨을 쉰다. 우선 인정한다. 내가 답답해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60년 넘게 사신 어른들의 생각을 바꿀 자신은 없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우리 딸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좋겠어?”
남편은 말이 없다.
“우리 각자 잘할 수 있는걸 하자. 같이 일하고 같이
놀자고 이야기하자. 어머님껜 당신이 해. 울 엄마한텐 내가 할게. 사위 차별하지 말라고.”
결혼 9년차다. 난 이제 사위 사랑은 장모님이란 말을 반만 믿는다. 왜냐, 그 사랑엔 ‘청탁’이 반 쯤 섞여 있기 때문이다. 내 딸을 잘 살펴달라는 청탁, 내 딸을 귀하게 여겨달라는 청탁, 이 땅의 무수한 딸엄마들이 씨암탉 잡아 끓이며 건네던 그 청탁.
난 그 청탁이 필요없다고 말할 참이다. 하실거면 아들이랑 사는 며느리에게도 하시던가, 그럴 생각없으면 사위에게도 하지 마시라 할 참이다. 엄마가 오빠와 하나 다를 바 없이 귀히 여기고 살뜰히 살펴 키운 딸은 아들 못지 않게 반듯하게 잘 컸다. 사위는 그런 딸과 나란히 재밌게 사는 사람이지 딸을 부탁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니, 그런 청탁 하지 마시라고 할 참이다. 전도 부치게 하고, 조기도 굽게 하라고. 딸이
시댁에서 기꺼이 하는 그 일을 사위도 처갓댁에서 하게 하라고. 나도 나중에 내 사위들에게 그럴거라고. 엄마의 시대에는 딸을 시집 보낸다는게 부모 다음으로 평생 비빌 언덕 하나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지만 요즘 시대 우리는 서로의 언덕이라고
말없이 행주로 식탁을 훔칠 엄마에게 난 제일
중요한 이 말도 할 참이다.
내 배우자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줄 수 있을만큼 엄마 딸 바르고 단단하게 키워줘서 고맙다고. 엄마 사위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그 차별은 이제 엄마가 받을 차례라고.
앞으로 몇 번이 남았을지 아무도 모르는 우리의 추석을 다같이 애틋하고 안녕하게 보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