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사고같은 부딪힘이 필요할지 몰라요 | 나은

저처럼요.

by 삶예글방

시원님, 오늘 저는 아주 촉촉한 하루를 보냈어요. 저희 집에 물난리가 났거든요.



늦은 아침을 챙겨먹고 애인과 산책을 다녀왔는데, 산책길에 투닥거리며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저의 갈증을 털어놓으며 대화하고 걸었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다 집 근처 뒷산까지 올라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산에 오르니 어쩐지 마음도 좀 편안해지고 충분히 마음을 털어놓아 그런건지, 더 이야기를 하더라도 집에 빨리 들어가서 하고 싶더라고요. 아, 오늘 쓸 편지도 오후에 아르바이트 가기 전에 어서 써야지 싶기도 했구요.


집에 와보니 문을 여는데 콸콸콸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리는 거 있죠? 한 발짝 들어서는데 찰박 - 나면 안되는 소리가 들리고, 출렁이는 질감이 운동화까지 느껴졌어요. 당황해서 빠르게 중문을 열었더니 온 집에 가득 물이 차올라 강을 이루고 있더군요. 원인을 찾으러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들어가 보니 주방 안쪽의 세탁기 수도 호스가 뽑혀 세탁기로 들어가야 할 물이 온 집을 적시고 있었어요. 주방과 거실에 가득 출렁이는 물을 모래 쓸어담듯 쓸어담았어요. 세상에, 살다가 물을 쓸어담는 일이 올 줄은 몰랐어요.


어찌나 허무한지 쓸어도 쓸어도 다시 물바다가 되는 바닥을 보면서 너무나 막막한거예요.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거실과 주방의 물을 겨우 퍼내고, 쓸어담고, 닦아내니 그제서야 조금 마른 바닥들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했어요. 끝은 있구나. 싶어서 다행이다 하고는 한 숨 돌리려고 책방으로 쓰는 현관쪽 방 문을 열어보았어요. 도착해서 그 방이라도 지켜보려고 바로 문을 닫고 수건과 천 등으로 막아두었거든요.


그런데 왠걸, 책방 문을 열었더니 그 방이 가장 깊은 호수가 되어있지 않겠어요? 온몸에 힘이 쫙 풀렸지만 낙심하긴 일렀어요. 한숨 쉴 시간에 한시라도 빠르게 물을 주워담아야 했으니까요. 고민도, 망설임도, 효율도 필요 없었죠. 그저 빠르고 부지런하게, 물이 다 담아질때까지, 찰박거리는 물이 더이상 반짝거리지 않을때까지 스크래퍼로 바닥을 긁어 쓰레받이에 물을 모아 양동이에 옮겨 버리는 작업만 오백번 넘게 한 것 같아요. 혼자였다면 아마 천 번을 넘게 움직였어야 했겠죠? 낮의 투닥거림은 온데간데 없고, 눈앞에 닥친 물난리에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최고의 팀워크를 발휘했답니다. 어처구니 없어 웃음이 자꾸 나왔어요.



그리고는 어느새 저녁타임 아르바이트 지원을 가기로 한 날이어서, 연희동에 다녀 왔습니다. 일복이 터진 날인지 위어도우 피잣집에서도 정말 손님이 많고 바빴어요. 정신없는 네 시간 지원이 끝나고 겨우 집으로 왔어요. 계획한 일들은 모두 미뤄지고 취소되고, 물난리 정리를 이어서 하고는 겨우 잠시 온갖 젖어버린 천과 빨래들, 수건과 걸레들을 빨래방에 세탁 돌려놓고 가까스로 책상에 앉았답니다.



하여 오늘 저의 갈망은,, '보송한 평안' 입니다. 하하


아니 어쩌면, 일상의 무탈한 시간만 있다면 오히려 무료하다 느끼려나요, 계속 오전의 다툼이나 투닥거림으로 여전히 낯가리고 조금은 껄끄러운 하루를 데면데면하게 보냈으려나요? 물난리 덕분에 어색함이고 서운함이고 진즉에 물살에 떠밀려보내고는 아이처럼 웃으며 서로 위로하고 토닥이며 저녁밥을 신나게 먹었어요. 내가 뭐에 불편함과 서운함을 느꼈는지 잊어버릴만큼 강렬한 사고 덕분이었을까요? 어떤 게 맞는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종일 집안을 정리하고 물을 닦아내다가 마음도, 켜켜이 쌓인 먼지와 묵은 때도 씻어내버리는 시간을 보낸 거 같아요. (심지어 목욕'절대'싫어 고양이 망고의 발바닥도 마알간 핑크색을 되찾았답니다. 하하)


시원님의 이번 주 시선집과 편지를 읽으면서, 그 목마름이 가득 느껴졌어요.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질문 속 더해지는 갈증의 마름이 여기까지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다가 오늘의 저를 발견하며 생각했죠. 어쩌면 시원님께도 그 시선이 글로 변환되기 전의 사고같은 부딪힘이 있지 않았을까. 갈증과 메마름이 되기까지, 목마름에 갈망과 질문이 피어나기까지의 첫번째 추돌이 있지 않았을까. 저는 계속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그 부딪힘에, 그 사고같은 충돌에 조금 더 직면하고 추상抽象에서 다시 구상具象으로, 순화하지 않은 날것의 순간으로 마주하고 언어화해보는 것이 필요하진 않을까 - 하는 질문이 저에게 피어났답니다.


물론, 마주하고 직면하는 순간 불편하고 피곤한 전쟁의 시작일 수 있겠지만, 고행과도 같은 사고와 난리가 한 편인 사람과 힘을 합치게도 만들기도 하고, 또 당장 눈앞의 현실에 발을 오롯이 딛고 내리는 비를 맞아낼 때 그 낯설고도 차가운 물의 감촉과 소리에 잊혀졌던 감각들이 깨어나듯이, 시원님의 갈망도 - 촉촉이 적셔줄 언어와 시원님에게 어울리는 삶의 모양을 발견하게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요.


부디 촉촉한 단비같은 언어와 방향을 맞이하는 밤,

그리고 새로운 한 주 보내시길 바라며


나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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