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쟁이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 내게 누군가 직장을 일 년 만이라도 다녀볼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학창시절과 사무 인턴 했던 때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그런 식의 질문과 조언을 많이 들었다. 내 입장에선 나를 모르니 하는 질문이고, 마찬가지로 날 모르니까 하는 중요하지 않은 조언이었다.
‘나는 조직 생활에 맞지 않는다.’라고 답변하면 자주 불쾌한 분위기로 대화가 흘러가기 쉬웠다. 왜냐하면 ‘다들 그래.’, ‘너는 왜 그래?’, ‘하기 싫은 것도 하고 사는 게 인생이야.’ 식의 답변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나도 안다. 다들 한다고 나도 해야 하는 건 아니고, 나는 이러저러하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나도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산다. 하지만 막연하게 싫은 걸 하는 마조히스트가 어디 있겠는가? 다른 이익이 돌아오니까 싫은 것도 하는 게 아닌가? 보상보다 피해가 더 크다면 과연 싫은 걸 할까? 극단적으로 100만 원 벌면서 차비만 120만 원이 나간다면 누가 그 일을 할까? 배우기 위해, 인턴 혹은 경력을 쌓기 위하고 하는 다른 이득을 위한 걸 제치고 보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손해 보는 걸 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잃어갈 만큼이나 큰 손해를 보면서 직장 생활을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할 뿐이다.”
나는 일찍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르다. 나만 다르다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조금 빨리 깨달았다는 거다.
학창시절에는 담임 외 나를 특별하게 좋아하는 교사가 많았다.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보다 성숙하고, 독특한 에너지를 좋아했다. 그래서 따로 불러내서 대화하거나, 글을 써놓은 홈페이지 주소를 묻거나, 글을 써오게 하는 교사도 있었다.
일찍이 시인이 되고 싶다는 호기를 부리며 다녔다. 영감이 있고, 예민한 존재라서 벅차고 감사했다. 물론 예민함이 불편할 때도 있었다.
끓는 영감에 미쳐 12살, 나는 글을 쓰기로 확고히 마음먹었다.”
그쯤부터 학교생활이 힘들었다. 성적이 나빠졌다. 그럴만했다. 시력이 나빠지는데 미관상 이유로 안경 착용을 안 했고, 만성 두통 때문에 약을 달고 지냈다. 그래서 수업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만성 두통으로 매번 내과 처방 약을 먹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아 한약도 지어 먹었다. 그래도 두통은 나아지지 않았다. 두통만 고통의 전부가 아니었다. 호기로운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나는 그 시절 고개를 들고 길을 걷지 못했다. 죄인처럼 땅만 바라보며 걸었다. 나는 왕따도 아니었고, 심지어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 틈에서 이유도 모르게 고통스러웠다.
원래 활발하고 튀었다. 언제나 장기자랑에서 가장 주목받는 팀을 짰고, 항상 학급 임원 활동을 했고, 발표도 잘했고, 리더 역할 하기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위 말하는 끼가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길거리를 걸어도 이목이 쏠리는 스타일이었다.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고, 그중 내 행동이 눈에 띄는 편이었나 보다. 지역에서 나를 아는 또래는 많았다. 어딘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메신저로 나를 본 목격담이 들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시선이 뒤에서 많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들을 몰라도 그들은 나를 알았다.
어딘가에 따갑게 속해있다는 것,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어쩌면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 앞에서 창피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중압감만 커졌다. 나는 사실 혼자서 중국 드라마부터 일본 애니까지 섭렵하는 오타쿠였다. 활발한 게 내 천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원래 혼자 있어야 했다.
나는 예민한 존재인데 그렇다고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조용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쁜 조합이었다.
중학교 입학 전 소집일이었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를 안내 교사에게 따졌다. 학교 공문 내용이 모순인지 착오인지 아무튼 작은 문제가 있었다. 그때 안내 교사에게 나는 소위 찍혔다. 아이들 앞에서 감히 내가 따져 묻는 게 반항적이라며 나를 주시하겠다고 흥분했다. 참고로 아이들은 내 의견에 동감했었다.
또, 입학 후 어떤 일로 담임에게 혼이 났다. 근데 처벌 수위가 너무 심했다.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를 본보기 삼아 혼내려는 게 보였다. 처벌은 받겠는데, 본보기 삼는 건 너무하다고 항변했다. 초반에는 아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결국, 선생님과 큰 소리까지 오가게 됐다. 물론 담임은 악의 없는 필요로 나를 본보기 삼았고, 내 목소리로 아이들이 선동되고 교사 자신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약자일 수밖에 없는 어린 학생이었다. 그런 부조리하고 같잖고 시답잖은 일을 견디기에 나는 너무 예민했다. 매번 소모적인 사건들이 힘겨웠고, 이따위 일에 서로 상처받는 게 아팠다. 나는 실제로 학교에서 구역질을 자주 했다. 그만큼 마음고생이 컸다.
잠시 청소년 인턴으로 사무보조 일을 했다. 인턴직 자체가 기관에서 시행하는 청소년 사업이어서 쉬웠고, 행사에도 참여시켜 재미있었다. 그때 한 살 많은 언니도 같이 인턴이었다. 그 언니는 나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는데 아마도 외모나 내적으로나 내가 훨씬 성숙해서였을 거다. 아무튼, 그 언니는 사무실 사람들과 한 내 뒷담화를 전해주곤 했다. 내용은 거의 여자들이 흔히 떠드는 뒷담 내용이었다. ‘지각했는데 화장은 다 했다.’, ‘매일 옷이 바뀐다.’, ‘아는 척한다.’, ‘어른처럼 하고 다닌다.’, ‘적극적이라 마음에 안 든다.’라는 둥 같잖은 말들이었다. 한 살 많은 언니야 어리니까 그렇다 쳐도, 소위 어른이라는 작자들이 애 앞에서 애 욕을 했다는 게, 상식적이지 못한 행동을 학교가 아닌 곳에서 또 겪는 게 신물이 났다.
나는 진작 사람들 틈에서 지쳤다. 나는 사람에게 예민하고, 다양한 사람과 집단 특유의 성격에 순응하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인 거다. 사람들과 웃고 즐겁게 지내도 집에 돌아오면 정신적으로 오염된 기분이다. 혼자서 치유의 시간이 필요할 정도인데, 사회생활이 즐겁지 않고 나쁘다면 오죽했을까.
직장 생활을 못 하는 내가 못난 거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못나지련다.
사람의 에너지는 정해진 양이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한다. 배터리가 고갈돼도 충전할 수 있지만, 100%라는 충전의 한계점이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매일 혹은 매 순간 충전할 수 있지만, 에너지의 한계는 정해져 있다.
또한, 우리는 에너지를 여러 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다. 관계, 일, 취미, 공부 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한다. 분야마다 에너지가 가는 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관계에 40%를 쏟고, 누군가는 공부에 80%를 쏟는다.
다른 경제적 활동을 위한 일을 할 때 글을 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하다못해, 누군가에게 열렬히 빠졌을 때도 글을 쓰지 못한다. 나는 에너지를 분산하는 멀티태스킹이 힘들다. 나는 한 가지에 에너지를 힘껏 쏟는다. 그 에너지가 글 쓰는 영감에 쓰이길 바랄 뿐이다.
나는 평생 이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틀린 사람은 아니었다. 언제나 최선이었다. 그뿐이다. 나는 트라우마 덩어리라서, 예민해서, 옳아서, 글쟁이라서 직장에 다니지 않는다. 앞으로도 나를 나로 인정하고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