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어렵다.

by 즐거운 사라
맞잡은 손


우리는 태어나 살면서 언제나 사람과 함께 한다. 양육자부터 가족, 친구, 교사, 직장 동료, 그 외도 많은 사람과 만나고 교통하며 산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로 서로 협동하고, 합동하며 살아간다. 결국, 믿음을 형성하며 가는 것이다.


믿음은 무엇일까?”


믿음은 소통이다. 우리는 고차원적으로 소통하는 존재다. 우리는 태어나 1~2년 사이에 양육자와 애착을 형성한다. 한 인간의 첫 번째 믿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애착형성시기에 양육자는 아이에게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며 아이가 원하는 것에 대해 반응을 해준다. 또한, 아이는 양육자에게 집착하며 양육자의 부재와 반응에 민감하다. 이 시기를 벗어나면 아이는 성장하여서 양육자가 아닌 가족이나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 또 다른 애착자를 찾고, 아이 자신이 원하는 것에서 애착자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애착에서 중요한 것은 양육자의 반응과 스킨십이다. 우리가 타인과 믿음을 형성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에게 일관적인 태도로 원하는 반응을 지속해서 보여야 신뢰를 줄 수 있다. 원하는 반응으로 상대의 욕구가 충족되고 존중받는다고 느낀다.


우리가 더 성장한 지금도 아이가 애착을 형성하는 단계를 반복적으로 진행한다. 우리는 때로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집착하고, 그의 반응에 민감해진다. 내 욕구를 알아주길 원하고, 상대의 욕구를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관계에서든 마찬가지이다.


믿음은 존중에서 오는 것이다.”


작년에 침례(몸 전체를 물속에 담그는 세례 방식)를 받았다. 정갈한 성복(聖服)을 입은 채 계곡에서 이루어졌는데, 여름이었지만 계곡 물은 매우 차가웠다. 그리고 계곡 바닥은 험해서 신발을 신고도 걷기가 힘들었다.


목사님은 침례 동안 몸의 힘을 완전히 놓고,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물에 입수시키고 들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목사님은 차가운 계곡 물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수십 명의 성도에게 침례를 행했다.


침례를 받으러 계곡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차가웠다. 물이 점점 위로 차오를수록 찬기에 괴로웠다. 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추웠다. 기도와 함께 나는 입수됐다. 나를 젖히는 힘이 느껴지는 순간 온몸의 힘을 놓았다. 그리고 금세 목사님은 나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침례가 끝났다.


내 침례가 끝나자마자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나처럼 오롯이 힘을 빼고 의지하라고 당부하셨다. 물이 두려워 몸에 힘을 실으면 오히려 자세 잡기가 힘들고, 침례 받는 이를 입수시키고 들어 올리는 것은 목사님의 몫이기 때문에 온전히 맡겨야만 통제할 수 있었다.


찬물 속에서 힘을 놓는 것은 믿음이었다. 상대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면 그가 나를 온전히 받아줄 거라는 믿음이었다. 나의 믿음은 찬물 속에서 장시간 침례를 행하는 목회자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았고, 목회자의 역할을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믿음은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믿는 모습은 보일 수 있지만, 믿음이라는 자체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의심하는 순간, 상대에게 신뢰 되는 태도를 보일 수 없다. 의심을 보는 순간 온전히 줄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다.


믿음은 약속이다.”


믿음이 관계 속에서 훈련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책임이라는 약속과 동반된다. 믿음에 대한 약속은 마치 체인으로 묶어두는 것과 같다. 단단하고 복잡하게 엮어두어 쉽게 풀어지지 않는 체인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믿기 위해서 스스로 그리고 상대에게 믿음을 약속해야 한다.


약속을 깨면 믿음 또한 깨진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믿음이 가장 숭고한 영역 중 하나라면, 우리는 약속을 하나하나 지켜가면서 신뢰를 붙이고, 결국 믿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믿음이 어려운 이유는 그만큼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소통하려고 하고, 존중받길 원하며 존중하려고 한다. 사소한 것부터 약속을 세우고, 많은 약속을 지켜나가는 삶을 산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어렵지만, 우리는 언제나 믿음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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