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해도, 교만하더라도 괜찮다고 칭찬해주세요.
사라양은 한마디로 무지해요”
충격이었다. 피가 뜨겁고, 가슴이 떨렸다. 침선생님은 내가 모르는 게 많다면서 나에게 무지하다고 했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똑똑하다는 말에 익숙했다. 그래서 내가 무지하다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15살 때 몸이 안 좋았다. 반신(半身)이 저리고 아파서 잠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다. 그쯤 옆집에 침을 놓는 분이 이사 왔다. 침을 잘 놔서 유명한 분이라고 했다. 몸이 아픈 원인조차 막연할 때, 뾰족한 수가 없어 침선생님을 찾아갔다.
침을 맞으러 가면 침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다. 보통 환자들은 30분 정도 침을 맞고 갔는데 나는 적어도 1시간은 넘게 머물다 갔다. 침을 맞고 나서도 한참 누워서 대화를 나누다가 집에 갔다. 침선생님은 나를 좋아했다.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나와 일부러 시간을 보내는 것부터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두세 번 같이 산책을 했다. 누워서 대화만 하다가 산책을 하니 놀라운 게 한둘이 아녔다. 침선생님은 맹인이었는데 동행할 때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다른 감각이 뛰어나게 발달해서 인지, 침선생님은 앞이 안 보이는 사람 같지 않고 노련했다. 나보다 예민한 감각에 경이로웠다. 눈이 안 보여 다른 감각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의 노력과 의지가 어떤 것일까, 감탄하면서 부끄러워지곤 했다.
나는 많지 않은 침선생님과의 시간이 즐거웠다. 나에게 무지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심 알고 있었다.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양하고 좋은 소프트웨어를 늘리라는 말이었다. 나에게 멍청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채울 수 있으니 더 채우라는 뜻이었다.
너는 남들보다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그 무렵 나는 신앙을 시작했다. 목사님과 독대하는 일이 잦았다. 목사님은 신앙적으로나, 삶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사적인 대화나 지식에 대한 대화도 자주 나눴다. 목사님은 내게 좋은 평가나 칭찬도 많이 해주셨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우월감에 도취해 있다고 충고하셨다.
반발심이 조금 생겼다. 부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부끄러웠다. 나는 그저 똑똑하고 싶었고, 겸손해지고 싶었다. 그 모든 걸 부정하는 말이었다. 나는 똑똑한 게 아니라 잘난 줄 착각한 것이었고, 겸손한 게 아니라 교만했다.
열등감이 느껴졌다. 지식의 부족과 겸손의 부재는 내가 열등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했다. 한동안 부끄러워서 어딘가 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더 열등한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또래들과 거의 어울리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일부러 고향 친구들과 멀어졌다. 별로 또래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사교에 능숙했지만, 내적으로 낯가림도 심했다. 그래서인지 교회 청소년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다르므로 섞이는 게 힘들었다. 다른 것이 열등한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상태를 인정하면서까지 섞이고 싶지는 않았다. 잘 섞이려면 내가 양보하고 내줘야 할 게 많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사람에게 지쳤었고, 낯가림 같은 정서적 이유로 많이 예민했다. 그래서 부족한 것에 관대하지 않았고, 스스로 잘하려고만 했다. 남들과 차이점을 평행선에서 구분 짓지 않고 수직으로 구분 짓게 됐다. 아마 그게 나의 우월의식과 교만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다르다는 것을 평등하게 바라봐주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변명일지 모르지만 쉬운 방법은 위아래를 구분 짓는 것이었다.
‘쟤는 달라.’
‘어떻게 다른데?’
‘우리는 보통 A를 하잖아? 쟤는 C를 하더라.’
와
‘쟤는 달라. 우리는 보통 A잖아? 쟤는 A+야.’
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남들과 다른 C를 하는 것보다 남들보다 나은 A+이길 바랐다. 그게 살기 쉬웠고, 비틀어진 열등감 또한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A+라는 것도 우스운 설정이었다. 나는 정말 A+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열등감 덩어리였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도 한글을 거의 읽지 못했다. 친구들의 이름표마저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저학년에서 몇 번 나머지 공부를 한 적이 있다. 다른 과목과 다르게 수학은 수업시간에 바로 이해하고 따라가기 힘들었다.
집에서는 억지로 공부시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엄마는 늘 백지로 버려지게 될 학습지를 매년 사줬다. 하지만 내가 스트레스받을 만큼 학습을 강요하거나 나무란 적은 없었다. 백지로 버리는 학습지를 보면서도 크게 혼내신 적이 없었다. 꾸준히 학습지를 또 사주셨다. 오히려 노력하지 않는 내 모습을 아쉬워했다. 그렇게 빡빡한 학습 환경도 아니었고 나도 학습에 노력하지도 않았다.
학창시절, 여느 학교처럼 내가 다니는 학교도 어머니 치맛바람이 존재했다. 치마를 펄럭이고 다니던 어머니들은 무리 지어 학생들을 평가하고 나뉘었다. 거의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뒷담이었다. 그중 고대 나온 한 엄마는 자신의 딸이 최고이길 바랐다. 열심히 공부하게 했고, 좋은 평가를 받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자신이 딸이 최고의 성적을 받아오지 못하자 조급해졌나 보다. 누가 좋은 성적을 받았는지 알기 위해 학교에 찾아왔다.
어디서 들었는지 나에게 찾아와 어느 학원에 다니느냐고 물었다.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그녀는 그날 자존심이 상해서 돌아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외모도 튀었고 매일 놀고 다니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당신의 딸처럼 모범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공부도 못하고 놀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아이여야 했다. 그런데 나는 모든 성적이 세 자릿수였다(올백…….).
고대 나온 엄마의 표정이 아직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아래인 줄 알았던 존재가 위에 있어서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그때 내가 남다르게 튀는 존재인 것은 아래가 되고, 내가 똑똑하면 위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가능하다면 우월한 게 낫다는 것은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다. 나는 타고난 엘리트도 아니고 공부하는 법도 몰랐다. 그냥 수업시간에 이해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고, 빠른 이해가 안 되면 성적이 나빴다. 물론 그때는 스케이트보드를 가지려고 백 점을 받아야 했고 더는 동기부여가 없자 나는 학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사실 초등학교 때라 다들 무리하지 않아도 성적이 나왔다.).
어른과 얽히지 않으면 내가 열등감을 느낄 부분은 별로 없었다. 친한 친구들은 마른 외모에 소위 요즘 말로 얼짱각(얼짱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섹시한 몸이었고, 목소리도 좋았고, 아이들과 대화하면 나는 추리력도 좋고, 상식도 많이 알았다. 이해심이나 리더십도 제법 있고, 성격도 털털해서 친구들이 잘 따랐다. 친구들 사이에서 뛰어난 면이 있는 건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우월의 대상이 되었다.
학급에서 자폐증인 친구들을 세 번 만났는데, 그 친구들과 가장 오래 짝꿍을 해야 했다. 한 번은 규칙과 다르게 나만 연속으로 짝을 못 바꾸자 담임교사에게 따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아이보다 내가 자폐증인 친구를 더 잘 보살피고, 정신적으로 잘 감당하는 거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불만이라고 하니 다음번에는 바꿔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그 친구를 맡긴 이유가 있으니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약속대로 기간을 채우고 짝이 바뀌었다. 수치스러운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나도 어린아이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과 짝을 원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그때도 알았다. 하지만 담임의 바람대로 성숙한 인간이지 못한 것에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마치 나 따위가 자폐아와 짝을 해주는 꼴이었다. 그런 상황을 만든 내가 얼마나 겸손하지 못한지 슈퍼에고(초자아: 양심. 금지·비난·억제의 체계. ‘자아이상’으로 알려짐.)가 찔리면서 처절하게 수치스러웠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울고 싶다. 펑펑 울고 싶다. 담임선생님 말 앞에서 울고 싶다. 열등의식을 느끼게 한 고대 나온 아줌마 때문에 울고 싶다. 충고하신 목사님 앞에서 울고 싶다. 무지하다고 꼬집던 침선생님의 냉정함에 울고 싶다. 나는 무지해도, 교만하더라도, 공부를 못해도, 인성이 못돼도, 멘탈이 약해도 칭찬받고 싶다. 그거 말고도 장점이 많으니 부족해도 칭찬받고 싶다. 부족해도 괜찮다고! 슈퍼에고가 크니까 그만 죄책감을 느끼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