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모서리, 길고 얇은 기억의 잔해
열이 빼앗아간 숫자들, 온도가 훔쳐간 날짜들
나는 확신했었다— 이 종이에 시간을 가둘 수 있다고.
지갑에서 꺼낸 여행의 마지막 조각들을 서랍 깊숙이 매장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보관한 것이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었다는 걸)
질문들만 남긴 채 글씨는 증발했다
이제 이 백지 위로 모든 여행이 가능하다
파리의 에스프레소 값일 수도,
일본 골목의 과자 값일 수도,
푸켓 해변의 맥주 값일 수도,
서랍 속 공백이 선사한 무한한 가능성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 기억하려 애쓰는 건 아닐까)
나는 이것을 다시 넣어둔다, 기억과 망각 사이 어딘가에.
언젠가 다시 찾게 될 이 작은 미완성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