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오로지 알함브라 궁전을 보기 위해 그라나다를 다음 목적지로 정했다. 궁전 예매가 쉽지않아서 여행하려던 날짜를 넘겨 겨우 예매하느라 그라나다에는 무려 4박을 하게 됐다. 별 거 없어도 쉬어가는 차원에서 천천히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그라나다는 스페인에서 가장 좋았던 곳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라나다에서 맞은 첫 아침, 생각보다 아는 게 없어 성당과 수도원 외에는 어디를 가야할지 막연했다. 아침을 먹으며 조금 검색해보니 투어라이브 앱에 그라나다 시내투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었다. 미리 만들어진 오디오랑 영상자료의 안내를 받으면서 혼자서 시내 곳곳을 투어를 다니는 가이드다. 오래 있을 곳이니 곳곳을 잘 알아두고싶어서 결제하고 투어를 시작했다.
오디오 가이드는 친절하고 전혀 모르던 역사 이야기도 들려줘서 재밌었는데, 초반엔 커뮤니케이션 오류가 생겼다. 그라나다 대성당에 가서 '정면을 보시면 세 개의 아치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아치가 안보여서 '아치가 어...디...????' 하면서 성당 외관을 따라 찾다가 결국 한 바퀴를 다 돌고나서야 처음에 내가 서있던 그곳에 아치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함.. 너무 가까워서 잘 안보였던 것이었다.
잠을 잘 못자서 투어 시작부터 피곤했다. 그라나다 대성당, 이슬람 학교라는 마드라사, 알카세리아 시장까지는 호기심으로 피곤을 억누르며 걸었다. 그러나 시장을 벗어날 즈음 머리가 아파오고 가이드 설명이 잘 귀에 안들어올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다시 호스텔로 가서 누웠다. (겨우 한시간쯤 지났는데..끔찍한 체력..!) 실제 사람 가이드를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낮잠 좀 자고 올테니 다시 이어서 해주세요-' 가 가능한 오디오가이드 ㅋㅋ
낮잠에서 깬 뒤 이불 속에서 듣는 이사벨 여왕에 대한 이야기가 재밌었다. 콜럼버스에게 투자한 왕인 것만 알고있었는데, 그녀로 인해 바뀐 역사나 비밀 결혼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어느정도 충전된 기분으로 다시 밖으로 나섰다.
숯극장,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동상, 누에바 광장 등 소소한 포인트들을 찍고 조금 더 걸어가야하는 떼떼리아 거리로 이동했다. 경사로를 따라 100미터쯤 남았을 때 떼떼리아 거리 설명을 재생했다. '떼떼리아'는 스페인어로 찻집이라는 뜻인데, 리틀 모로코 같을 정도로 모로코식 찻집과 상점들이 많아서 독특한 분위기라고 했다. 가이드님이 처음 스페인에 와서 산 곳이 그라나다이고 여기서 외롭고 힘들던 때에 떼떼리아 거리의 전통 찻집에서 친구를 만들었다고 했다. (가이드님 저도 너무 힘들어요..) '여러분도 이곳 전통 찻집에서 친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하며 설명이 끝이 났다. 눈앞에 떼떼리아 거리가 펼쳐졌다. 정말 이국적이고 다른 나라 거리 같았다. 찻집, 식당, 이런저런 기념품가게, 아랍식 서예를 그려주는 사람 등등 신기하게 구경했다.
다음 코스는 니콜라스 전망대인데 일몰시간까지 많이 남았다. 찻집에 앉아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찻집들을 스캔했다. 가이드님 말대로 친구를 만들기에는 너무나 관광객들만 바글바글해보였다. 어떤 찻집의 창가에 분위기있게 혼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는 동양인 여자가 있었다. '저 자리 너무 좋아보인다- 저 자리는 안되겠지만 일단 저 집으로 갈까' 해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단념하고 나갔다. 그런데 그 창가에 앉은 여자가 나에게 손짓을 했다. 엥? 하며 다시봐도 계속 손짓을 했다. 여기 오라는 것 같았다. 다시 들어가봤다.
"오세요. 내가 여기 계속 앉아있었는데 뷰가 좋아요." 하면서 자기가 앉아있던 곳에 나를 앉히고 맞은 편 의자로 바꿔앉았다. 얼떨결에 좋아보이던 그 자리에 앉아 짤막하게 서로 소개를 했다. 홍콩에서 온 제인이라고 했고 서른 중반의 언니였다.
"내가 마시고 있던 티 (메뉴판을 가리키며) 요건데 맛있어. 몇년 전에 모로코를 여행했는데, 거기서 먹은거랑 비슷해. 디저트도 요거 달달하구 같이 먹으니 좋아."
더워서 그닥 차를 주문하고 싶진 않았다. 근데 뭐랄까 똑같은 걸 안시키면 계속 설득할 기세였다. 그래서 똑같은 차를 주문하고 디저트는 안시켰다. 그런데 또 이 디저트가 달달해서 차랑 너무 어울린다며 먹어봐야한다고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왠지 어릴 때 안먹겠다는데 기어이 과일을 쥐어주시던 할머니가 생각나서 속으로 빵 터졌다. 이 언니 뭘까... 근데 상황이 너무 재밌고 나에게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려는게 보여서 순순히 따라봤다.
제인은 몇년 전 여행했던 모로코가 너무 좋았어서 오늘 옷도 모로코 스타일로 사서 입었다며 자랑하는데 잘 어울리고 아름다웠다. 약간 태닝되고 나보다 훨씬 마른 홍콩사람이어서 가능한 스타일링인 것 같았다. 서로 자기 소개도 하고, 일 이야기도 하고, 여행 이야기도 했다. (일 이야기는 어느 순간부터 거의 못알아듣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행 초반이고 그라나다도 오늘이 처음이라고 하니 엄청 챙겨주려고 했다. 유럽에서는 짐 훔쳐가는 것도 조심해야한다며 썰도 풀어주고, 내가 전망대를 6시쯤 가려고 한다고 하니 중간중간 시간도 체크해주고 충전기도 빌려줬다... '언니..저 사실 여행 많이 해봤어요' 같은 말은 고이 접어두고 있는대로 챙김을 받았다. 그래야 만족하실 것 같았다.ㅋㅋ 마지막에 계산하려고 하니 "우리 또 어디서 볼 일 있지 않겠니?" 하며 자기가 사겠다고 얼른 전망대 가라고 밀어냈다. 감사한 만남이었다. 진짜 가이드님이 말한대로 떼떼리아 거리 전통찻집에서 친구를 만들게 된게 신기했다.
(길어져서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