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말라가(Malaga)는 한국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유럽인들의 휴양도시 같은 곳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가는 비행기 중 말라가행 노선이 많았고 오랜만에 바다를 보고싶어서 가게 됐다. 말라게타 해변 어딘가에 죽치고 누워 있다가 히브랄파로 성에서 노을을 보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출발해 말라가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여정이 쉽지 않아서인지 잠을 또 깊게 자지 못했고 찌뿌둥한 느낌으로 잠에서 깼다. 가볍게 호스텔의 추천 목록에 있는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해변 근처 중심가쪽으로 걸었다. 야자수들이 나란히 서 있는 광장을 지나 명품샵들이 연속된 거리를 지나다보니 빨리 해변에 가고싶어졌다. 바다를 보는 것 자체는 그곳에서 얼마 멀지 않았는데, 가까운 줄 알았던 해변은 한참 더 걸어야했다. 해변으로 가는듯한 사람들을 따라가다보니 햇볕이 엄청 내리쬐고 선글라스없이는 눈 뜨기가 어려웠다. 10월인데 여름이 한창이었다. 28도가 이렇게 더울 줄이야. 끝없는 야자수 길과 그늘 없는 길들을 견디다 못해 지름길을 찾아 요리조리 횡단보도를 건넜다. 다왔을까 싶었을 즈음 특유의 동글동글하게 귀여운 폰트로 'malagueta' 라고 쓰여진 커다란 사인이 보였다.
사진을 찍다가 돌아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해변에 누워있기' 낭만을 실현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였다. 해변에서 놀기도 하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가 하다가는 통구이가 되며 더위를 먹고 얼굴에 선글라스 자국이 진하게 남을 것이 너무나 뻔했다. 해의 방향이 정통으로 바다쪽이라 설치되어있는 파라솔도 햇빛을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0분도 안되어 해변을 포기하고 다리가 아파 그늘 있는 벤치를 찾아서 앉았다.
돗자리 펼만한 공원도 주변에 없는 듯 했고 다리도 아프고 잠을 제대로 못잔 탓에 정신이 몽롱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일단 호스텔로 다시 이동해서 누웠다. 보통의 여행이라면 한창 즐기며 다닐 시간인데 호스텔 침대에 처박혀있다니. 이 피곤하고 나약한 몸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잠에서 깬 뒤에 문득 생각난 밋업 앱을 뒤지다가 'Free yoga class'를 발견했다. 무려 오늘 저녁이다. 요가를 하고나면 좀 낫지않을까 싶었다. 저녁에 히브랄파로 성에서 노을을 보려고 했었지만... 노을은 포기하기로 하자. 그럼 지금 성으로 가야하네..?
버스를 타고 히브랄파로 성으로 향하는 계단과 경사로 앞에 도착했을 때. 성은 높아보이고 여전히 끔찍하게 피곤해서 계단 앞에서 첫발을 떼기까지 잠깐 망설였다. 아...나자신.. 이거 진짜 맞니? 꼭 가야겠니?
그런데 성이 코앞에 있는데 내가 지금 무슨 다른 걸 하겠어. 단념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막상 걷다보니 오르막 오르는 것 자체는 대학생때부터 많이 해서인지 힘들진 않았다. 길고 완만하게 걸을만한 경사도였다. 문제는 내리쬐는 햇빛. 양산을 써도 해결이 안됐다. 10월에도 이런데 도대체 여름에 말라가를 오는 사람들은 어쩌시려고 오시나...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간간히 등장하는 그늘에는 사람들이 여지없이 서있었다.. 중간중간 패잔병같은 포즈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서 슬며시 웃으며 지나쳤다. 나도 가끔 몇 번씩 멈춰서서 손수건으로 얼굴 전체에 흥건한 땀을 닦으며... 절반 이상 올라가니 올라가는 중인데도 계속 전망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의 색감이 환상적이었다. 해변에 있을 땐 몰랐는데.
히브랄파로 성 자체는 볼거리가 많지 않았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어보니 기능적으론 우리나라에 있는 수원 화성이랑 비슷했는데 화성이 더 예쁘니까(?) 그냥 말라가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너무나 멋졌다. 말라가의 색깔은 살구색에 가까운 따뜻한 색. 왠지 뜨겁고 긴 여름이 있는 도시인게 색만 봐도 연상이 될 듯한 색.
신기하게도 이때부터 피곤과 찌뿌둥함이 싹 가셨다. 오르막 운동을 하며 혈액순환이 되어버린건가..! 뿌듯함도 차올랐다. 힘듦에 지지 않고 한번 더 내가 원하는 것으로 나아갈 때 오히려 고통이 사라지기도 하는구나 생각했다.
저녁무렵 요가클래스를 위해 후엘린 해변을 갔다. 말라게타 해변과 다르게 현지인 바이브가 느껴졌다. 러닝, 수영, 비치발리볼, 비치테니스... 모든 운동하려는 사람들이 다 모인 그곳의 한켠에 요가선생과 나란히 앉아있는 참석자들이 보였다. 좀 늦은 탓에 후루룩 돗자리를 펴고 눈인사를 주고받고 앉아서 설명을 들었다. 선글라스 때문에 깐깐해보이는 통통한 백인 아저씨가 하타요가를 설명하고 여섯 명의 소녀들이 경청하는 풍경이 살짝 웃겼다. 동작을 따라하다가 아프면 절대 더 하지 말라는 말에 '요가 잘 배우신 분 맞네..' 하고 수긍하며 요가 동작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완전 초심자 대상이라 가이드를 처음에 잘해주고 너무 무게잡지도 않고 훌륭했다.
흐름을 타면서 본격적으로 요가 할때쯤 되니 뭔가 감동스러웠다. 금방 닿을 거리에 있는 바다, 해가 점점 지며 살짝 분홍빛이 된 하늘, 위로는 높이 쭉쭉 뻗은 야자수. 이런 풍경 속에서 몸을 쭉쭉 펼치고 있다는게 신기했다. 뜨거운 도시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 낮에 그렇게 힘들었을까 싶었다.
명소
- 히브랄파로 성 : 전망..! 다시 가면 노을을 보고싶다. 오르막이 정 힘들다면 남산 버스처럼 30분에 한대꼴로 버스도 있다(이번엔 내리막에 이용함)
- 말라가 대성당: 성당 많이 다녀봐서 기대가 없었지만 여기는 높이에 압도되고 경건한 마음을 충전할 수 있다
- 아무 해변 : 일출/일몰 시간에 가기
맛집
- Casa Aranda: 찐한 핫초코에 찍어먹은 스페인 남부식 담백한 츄러스가 지금도 아른아른거린다
- Restaurante Divinno: 여행 전체에서 손에 꼽는 고급진 맛이었다
피할 곳들
- 엄청 더울 것 같은 5-9월에 도시 자체를 피하는 것으로...
이번에 못한 것
- 자전거 타고 다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