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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밤과 잔잔한 아침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쉽지 않은 셀프 스탑오버

by 구은서

한국을 떠날 때 내 여행 계획은 이랬다. 3주정도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그 이후의 여정은 미래의 내가 결정하기. 여행을 한달 반 남겨놓고 항공권 티켓을 예매했던 탓에 편도 티켓이 스페인 직항은 77만원 이상. 백수로서는 좀 비싸게 느껴졌다. 아니 10월말 비수기인데 가격 실화인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일단 유럽 아무데나 싸게 도착한 다음에 저가항공을 탈까 싶었다. 그런 김에 새로운 도시 구경도 해보고. 검색해보니 티웨이항공에서 인천-> 자그레브를 편도 28만원에 운행하고 있었다. 나중에 크로아티아도 가고싶었는데 잘됐다. 이것이다.. 그래서 인천 -> 자그레브 -> 말라가 일정을 계획하게 됐다.



여기에 나는 현재 대구에 살고있으므로 대구->인천이 추가되었다. 인천공항에 일찍 가서 공항 내 숙소에서 하루 잘까 하다가 그러면 더 시차적응이 힘들것 같아서 인천공항에서 대기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여정이 대략 이렇게 시작하게 됐다.

- 밤 출발 공항버스 4시간 타기

- 인천공항에서 대기 7시간

- 오전출발 비행기 13시간 타기

- 자그레브에 오후 5시 20분에 도착



계획을 짤 땐 간과했다.. 이것만으로 굉장히 피곤해질거란 사실을. 그나마 중간중간 내 출국일을 기억해주고 연락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마음만큼은 뭉클하고 따뜻해졌다. 나한테나 특별한 여행인데, 응원해주고 기억해주는 이런 마음이라니..


비행기는 저가항공치고 편안했지만 다운받아간 넷플릭스 영화와 시리즈들이 모두 재미가 없어서 짜게 식은 채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한두시간씩 쪽잠을 겨우 나눠서 잔 상태로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숙소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있자니 하늘이 완전히 깜깜해졌다. 단풍이 주홍빛으로 물든 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었고 쌀쌀한 공기가 느껴졌다. 십년 전 영국의 공원에서 본 나무들이 생각나며 가을 타는 사람 무드를 즐겼다.


버스에서 차창에 툭 툭 빗자국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내가 내릴 즈음에는 우산을 꼭 써야할만큼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엔 맑음이었는데.. 캐리어를 끌고 우산을 쓰며 걷기 시작했다. 가볍다며 챙긴 우산은 너무 가벼워서 살짝 부는 바람에도 쉽게 훨훨 날아갈듯이 날렸다. 캐리어가 하얀색인 탓에 더러워지지 말라고 새로 산 캐리어 덮개를 씌워놨는데 덮개가 커서 중간중간 바퀴에 끼었다. 횡단보도가 있을거라 생각한 길에는 지하도밖에 없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재차 물어보고 캐리어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캐리어는 못 들것도 없는 15키로지만 나는 막 골절환자에서 벗어난 상태라 조심스러웠다. 오후 일곱시도 안된 시간이었지만 깜깜한 밤에 숙소를 찾아 걷다보니 왠지 무서웠다. 유럽에 그렇게 많다는 경범죄자와의 조우를 여행 시작부터..? 떠오르는 상상을 애써 누르며 혼자 여행이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숙소에 도착했는데, 직원이나 호스트가 상주하고있는 곳이 아니었다. B&B라길래 그간의 경험으로(아마도 10년전) 당연히 숙소주인이 나와 맞이해줄 줄 알았다. 초인종을 눌러도 답이 없어서 부킹닷컴 메시지를 찾아보니 방까지 들어가는 방법을 메시지로 안내하고 있었다. 영어 텍스트를 느리게 읽어가며 방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배가 고파서 일단 힙색만 메고 스투르클리 라는 크로아티아 전통음식을 먹으러 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라자냐와 비슷한 음식이라고 했다. 리뷰를 보며 고민하다가 블루베리 스투르클리를 시켰다. 한 입 떠먹어보았다. 구워진 블루베리가 첫 시작을 열지만 먹어본 적 없는 이상한 치즈와 불어터진 떡의 식감과 합쳐져 느끼함 이라고 말하기엔 그보다 더한 거부감에 사로잡혔다. 의문이 가득해졌다. 왜 이런걸 만들지? 블루베리맛을 추천한 블로그 주인분은 대체 어떤 미각을 가지신거지? 하필 블루베리와 치즈가 섞이니 비주얼도 안좋아서 비위 약하면 한입먹고 버릴거같았다. 대체 왜 이런맛이 나나 싶어서 재료 하나하나씩 괜찮은 부분을 조금씩 뜯어먹고 탄산음료로 배를 채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지나가며 보이는 광장의 풍경을 영혼없이 카메라에 담으며 조금 암담해진 마음을 겨우 붙잡으며 돌아왔다.


SE-9353e100-c54c-4978-beec-3960eb0dade2.jpg?type=w773 ^^...
IMG_0459.JPG?type=w773 반옐라치치 광장



다음날 아침 조금 심드렁한 기분으로 조식을 먹으러 방 문을 열었다. 창밖에서 햇살이 비춰지고 먼저 나와 조식을 먹고있는 사람들은 평화로워보였다... 오 어제랑 너무 다른걸. 작은 공간이지만 정갈하게 펼쳐져있는 햄과 치즈, 빵... 뭐부터 먹을지 고민하고 있으니 부엌에 있는 직원이 계란 요리를 해줄지 물어보았다. 예상치못하게 밝고 환한 분위기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아무 글자도 읽을 수 없었지만 대충 밀크스프레드인 듯한 무언가를 빵에 발라먹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봐도 전날 밤에 내가 무섭다고 생각한 도시는 빛과 함께 사라지고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듯했다. 햇살에 비친 주황색 지붕들, 유럽에 왔음을 느끼게 해주는 건물의 외관, 불그스름한 나무들. 10분을 걸어 공원에 가니 이야기하며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과 뛰어노는 큰 강아지들이 있었다. 대구에서 겨우 여름 티를 벗은 계절에 살다가 자그레브에서는 완연히 익은 가을을 느꼈다. 단풍이 살짝 들어있는 나무, 노랗게 풍성한 은행나무. 벤치에 앉았는데 나무에서 은행잎이 우수수수 떨어져서 내 머리에도 은행잎이 톡 앉았다. 이런 풍경을 먼저 봤다면 밤 거리가 그렇게 두렵지 않았을텐데 싶었다.


IMG_0475.JPG?type=w773


다시 말라가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반나절 남은 시간동안 북마크해둔 곳곳의 성당과 시장, 카페, 빵집을 부지런히 다니며 관광객모드로 즐겼다. 관광객이 많지도 않았고 구시가지는 충분히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크기여서 평화로움을 즐겼다. 자그레브는 엄청난 감탄을 자아내는 명소가 있거나 길이 빼어나게 예쁘진 않았다. 애초에 그곳은 내가 진짜 가려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나에게는 강렬한 밤과 낮의 대비로 기억될 것 같다.


IMG_0534.JPG?type=w773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나무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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