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고통으로만 남지 않도록
어제 내 투병기를 각색해서 만든 뮤지컬 ‘인터미션’의 리딩이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개인적인 이야기로 뮤지컬을 쓸 줄 상상도 못 했는데... 피할 수 없는 불행을 겪고 난 뒤, 고통이 고통으로만 남지 않도록, 그리고 어둠 속에 있는 누군가에겐 희망이 되길 바라며 대본과 가사를 썼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분들의 도움과 지원을 너무 많이 받았다. 자주 했던 말이 “우와, 저 정말 사랑받고 있었네요” 였을 정도로, 일하면서 잠시 마주친 분들도 기꺼이 이 프로젝트에 함께 해주셨고, 브런치를 읽으면서 기도하고 계셨다고 말해주셔서 마음이 찡했다.
대본을 쓰며, 아팠을 때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고, 연습할 때도 늘 눈물을 흘렸다. 특히 중환자실 장면과 2차 항암 중 썼던 유언장 장면은 매번 나를 울게 했다. 이 일들을 겁 많은 내가 겪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지금 다시 예방접종 중인데, 주사 맞는 게 무서워서 벌벌 떠는 내가 저 무서운 일들을 다 겪었다니... 정말 나 혼자 힘으로는 절대 못했을 기적 같은 일이다.
브런치를 읽어주시는 분들도 초대해서 꼭 얼굴 뵙고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장소가 협소해서 하루도 안되어서 매진이 되어 그 기회를 마련하지 못한 게 아쉽다. 그래서 이곳에 뮤지컬 ‘인터미션’의 가사를 조금 나누어보려고 한다. 이렇게라도 함께 하고 싶어서 :)
Scene 2. 중환자실
마치 아프기 전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를 불러줘.
내가 날 잊지 않도록
나를 불러줘
사라지지 않도록
내 이름 불러줘
다시 내가 되게
https://brunch.co.kr/@astoria/8
원인 모를 소장출혈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반복하던 때에 그곳에서 나는 이름 대신 ‘7번 베드’ ‘환자분’으로 불렸다. 그때 유일하게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신 간호사분이 계셨고, 그 순간 나는 다시 원래의 내가 된 기분이었다.
생의 끝자락에 알게 된 진실
무엇도 가져갈 수 없어
떠날 때 유일하게 가져갈 수 있는 건
단 하나, 단 하나
Memory with love
https://brunch.co.kr/@astoria/42
중환자실에서 ‘아! 이렇게 내가 죽는구나’ 느꼈을 때,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추억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일이 곧 내 자신이란 생각을 하며 일을 1순위로 두고 살았는데, 죽음을 가까이서 느꼈던 그 순간, 만약 나에게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꼭 시간과 돈을 추억과 바꾸겠다고 다짐했었다.
Scene 3. 병실
하고 싶은 것들이
아직 너무 많은데
죽기인 어린데
난 그저 살고 싶은데
그게 욕심일까
쓰고 싶은 얘기가
아직 너무 많은데
죽기인 어린데
너무 어린데
https://brunch.co.kr/@astoria/20
갑자기 ‘축구’라는 말 외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때, 뇌가 잘못된 줄 알고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내가 제정신일 때 저작권 같은 법적인 거를 해결해야겠단 생각이 들어 유언장을 작성했다.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증인(인터미션의 작곡가)을 불러 유언장을 읽는데 기가 막혔다. 몇 달 전만 해도 반짝이던 삶을 살던 내가 하루아침에 암환자가 되어 유언장을 읽고 있는 이 현실이 정말이지 기가 막히고 서럽고 억울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너무 불쌍했다. 내가 너무 아까웠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여행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쓰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 이 꿈 많은 내가 대체 왜 이딴 걸 읽고 있어야 하는지... 내가 너무 불쌍하고 아까워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왜 악한 자들을 잘 살고
어리고 착한 영혼들은
고통 속에서
꽃 피기도 전에 사라져야 할까
말해줘 그 이유를
이건 랜덤게임
규칙 따위는 없고
오직 상실과
오직 이별만 존재해
https://brunch.co.kr/@astoria/32
젊은 혈액암 단톡방에서 내가 유독 좋아하던 분이 계셨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을 이토록 응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계속되는 항암 불응에도 희망을 절대 잃지 않고, 밥도 너무 잘 드시고, 긍정적이었던 분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데 어쩜 그렇게 어른스럽던지. 그런 그녀가 떠났을 때,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약인데 왜 누구는 듣고, 누구는 불응하는지... 밥 잘 먹고 긍정적이면 이겨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녀는 왜 떠났는지... 오징어 게임은 규칙이라도 있지, 이건 규칙도 없는 랜덤게임 같았다. 그저 ‘운이 나빴다’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막힌 게임에 이렇게도 예쁜 청춘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 서글펐다. 이분을 떠나보내고 그 이후에도 투병을 하며 알게 된 젊은 암환우분들 몇을 떠나보냈다.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정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어 슬프다.
Scene 6. 병실
잠시 쉬어도 돼
언젠간 또다시 펜을 들고
새롭게 써내려 갈
2막이 있으니
조명이 꺼지고 홀로
무대에 있어도
끝이 아냐
이건 인터미션
인터미션
이 가사는 나에게, 그리고 어둠 속에 있는 분들께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병실 복도를 걷다 보면 이 많은 병실 안, 많은 침대 위에서 참 많은 이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싸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작은 배로 거친 밤바다를 항해하듯 작은 침대 위에서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무시무시한 항암을 견뎌내며 어두운 바다를 건너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고 싶었다.
10월에만 내가 아는 환우 세분이 조혈모세포이식을 앞두고 있다. 인생 마지막이 될 항암을 잘 이겨내고, 이식이 잘 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끝이라고 생각이 될 때, 이것이 바닥이라고 생각이 될 때 기억해 주시면 좋겠다. 당신의 뮤지컬은 끝난 게 아니라고. 이건 아주 잠깐의 인터미션일 뿐이라고. 이제 곧 2막이 시작될 테니 그 작은 배 위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부디 잘 견뎌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