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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Nov 05. 2021

제목 : 매일이 기념일

어쩌면 이것이 행복의 비밀

 어떤 것들은 코앞에 있을 때보다 몇 걸음 떨어져 있을 때 더 크고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올해가 곧 끝나고 한 살 더 먹는다는 연말 공포도 그중 하나다. 막상 십이월이 되면 지난 건 지난 거라 순응하며 파티다, 모임이다 날짜 지나는 것도 잊지만 그보다 한 달이나 앞선 11월 초입에선 누구나 그야말로 등골 서늘해지는 경험을 한다. ‘아니, 뭐 했다고 벌써 11월이야?’ 고리타분한 말이 뇌도 거치지 않고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코로나 19 이후 먹은 나이는 무효로 하자는 누군가의 절규가 떠오른다.

 묵은해를 두 달 남긴 사람들의 조바심을 부추기는 것이 또 있다. 꼭 요맘때 시작하는 스타벅스 프리퀀시 이벤트. 첫 번째 스타벅스 플래너를 제작했던 친구의 무용담을 들은 게 족히 십 년은 됐으니 명실상부 전 국민 연례행사가 됐다. 계절의 스산함 커피로 달래다 보면 새해 플래너가 생긴다는, 시작은 아마 그런 취지였겠지만 어느새 하루라도 빨리 가져야 하는 아이템이 된 터라 이 시즌엔 하루에 커피 서너 잔 마시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에스프레소 십 수 잔을 미리 사서 냉장고에 얼려 놓았다는 얘기도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물론 내 책장에도 스타벅스 플래너들이 오름차순으로 나란히 정렬해 있다. 한 번도 2월을 넘긴 적이 없어서 그렇지.


 플래너의 계절에 맞춰 2022년에 쓸 수첩을 샀다. 늘 쓰는 몰스킨 포켓 사이즈지만 속지가 다이어리로 구성된 것은 처음이다. 이런저런 일에 치이는 날엔 고작 한 장, 아무 일 없이 가는 날엔 무려 한 장이 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간 줄도 없는 무지 수첩만 써 왔지만 사십 대 입성을 기념해 한 번 그들의 룰을 따라 보기로 했다. 수첩 옆면을 엄지 손가락으로 쓸어 속지를 훑어보았다. 월 달력 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곱 칸의 주간 동향 그리고 오른쪽에 줄 종이가 있는 위클리 구성. ‘주말은 이게 뭐야’ 맨 아래 한 칸을 토요일과 일요일로 나눈 옹졸함에 순간 발끈했다가 맨 뒤에 붙은 무선 지를 보고 가까스로 마음을 달랬다.

 첫 장으로 돌아와 수첩을 테이블 위에 펴 놓고 펜을 들었다. 새 수첩에 처음으로 잉크를 묻히는 건 여간 망설여지는 일이 아니다. 공휴일에 동그라미부터 그릴까, 잃어버렸을 때 연락받을 이름과 연락처를 적을까 아니면 2022라고 제목부터 써 볼까. 이러다 펜촉에 맺혀있던 잉크 덩어리가 뭉치는 바람에 첫 획부터 망칠 때도 있다. 그때의 상심이란 정말이지. 그 길로 새 다이어리를 사러 가고 싶다.


 1월 달력을 폈다. 1부터 31까지 한 바닥 가득한 숫자를 가만히 보다가 8일 토요일 칸에 첫 번째 글씨를 썼다. 부모님 결혼기념일.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년 1월 8일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기념해 내가 치킨을 쐈다. 왜 내가 더 신이 났는지, 하필 치킨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치킨 먹을 구실을 찾았던 거겠지. 그래도 부모님은 그런 큰아들을 꽤나 기특해하셨다.

 펜을 떼고 다시 달력을 보다 25일 화요일 칸에 적은 건 '하나의 경험이 _ 되다’. 두 번째 책이 나온 뒤 가졌던 강연회의 제목이다. 내 사진이 인쇄된 행사 포스터와 눈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에 몸 둘 바 몰라서 창 밖만 보며 준비한 말을 했었다. 그때 생각하니 손끝이 저려와서, 펜을 놓고 오른손을 공중에 몇 번 털었다. 12월 달력을 찾아 10일에 ‘어쩌면 할 지도’, 2일에 ‘인생이 쓸 때, 모스크바’ 두 권의 책 제목을 차례로 썼다. 돌이켜 보면 겨울에 좋은 일이 많이 생겼지,라고 잠시 감상에 빠졌다. 다시 1월로 돌아왔다. 벌써 육 년 전이다. 1월 5일에 홀로 차가운 겨울 도시로 여행을 떠났었다. 첫 번째 책의 이야기 그리고 언젠가 내 이야기를 책으로 엮겠다던 꿈이 시작된 날이랄까.

 내게 의미 있는 날들로 달력 열두 장을 한 칸씩 채웠다. 논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눈 꼭 감았다 뜨면 드라마처럼 ‘-2년 후-’ 자막이 뜨기를 바랐던 아침, 허공에 붕 떠 집을 향해 헤엄치게 만들었던 새벽의 첫 키스, 아르바이트비 털어 산 첫 DSLR 카메라 상자를 안고 본 지하철 창 너머 저녁놀. 크고 작은 추억들이 하나씩 떠올라 4월, 8월, 6월의 한 칸을 메웠다. 10월 5일은 어릴 적 즐겨 듣던 FM 라디오 91.9 메가헤르츠에서 내 목소리가 나왔던 ‘꿈꾸는 라디오의 날’이다. 그렇게 소중한 이들의 생일까지 한바탕 쓰고 나니 빈칸이 드물 정도로 365일이 그득하게 채워졌다. 문득 이만큼 나이를 먹었구나 가슴이 철렁했지만 곧이어 제법 근사한 일이란 생각도 든다. 곧 다가 올 마흔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것도 같다.


 한바탕 돌아보고 나니 등이 따끔거릴 만큼 분주했던 추억 여행. 목부터 축이려 진작에 얼음 다 녹은 미지근한 커피잔을 움켜쥐었다. 얼룩진 종이 홀더에 새겨진 문구가 새삼 맘에 와닿는다. 카페의 상호명이다.


Everyday Anniversary


 매일이 기념일. 시간 참 빠르다는 말처럼 흔하고 하루하루가 다 선물이라는 말만큼 고리타분하지만 곱씹을수록 꽤 괜찮은 말이다. 자꾸 되뇌면 정말로 삼백육십오 일이 모두 특별해지는 마법의 주문, 행복의 열쇠 같달까. 나만의 기념일로 가득 채운 2022년 플래너의 제목으로 제격이다 싶어 수첩 첫 장에 옮겨 적었다.


2022매일이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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