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은 하나만 오지 않더라고.
이게 말로만 듣던 뉴욕 최고의 버거들이란 말이지?
이 자태들 좀 봐. 열네 시간 날아온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아.
이 순간을 얼마나 얼마나 고대했다고.
여행지에선 지나치게 쉽게 행복해진다. 낡은 나무 바에 앉아 이열 횡대로 늘어 선 햄버거들을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니. 입꼬리 치켜 올라가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으니. 흥겨운 빅 밴드 음악에 어깨까지 들썩인다. 노란 혀 내밀고 군침을 흘리는 친구랑 놀까, 있는 대로 힘 준 구릿빛 삼두근을 자랑하는 녀석과 겨뤄 볼까. 아니 녹색 플리츠스커트를 입은 아가부터 꼬집어 볼까. 얘들이 한데 모여 있는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게 뭐 대수냐, 그 시간에 한 입이라도 더 먹자. 주황색 비프 소스가 흐르다 못해 바닥을 적신 버거를 두 손으로 움켜쥐는데 어라, 이상하다. 버거가 크림처럼 스르르 녹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옆에 있는 버거, 그 옆 버거도 마찬가지다. 입 한 번 못 대고 전부 사라졌다. 애꿎은 양손만 흠뻑 적시고.
축축한 감촉에 눈을 떴고 꿈이었단 걸 알았다. 냉장고인지 환풍기인지 낮은 기계 소음만 흐르는 호텔방에서 불도 못 끄고 엎어져 잠든 현실이 잠깐 처량했다가 이내 여기가 뉴욕 월 스트리트 어딘가라는 사실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까부터 왼손에 느껴지는 무언가 흐르는 느낌도 잠결 애무마냥 간질간질하니 기분 좋았다.
조금만 더 잘까. 그래 천천히 나가지 뭐.
근데 이상하다. 손이 왜 젖었지?
눈이 번쩍, 몸이 벌떡. 침대 옆 협탁을 보니 충전 중인 맥북과 아이폰, 애플 워치 위로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황급히 맥북부터 들어 침대 위로 던졌다. 다음으로 폰, 시계 마지막으로 충전기까지. 빈 테이블 떨어지는 물방울 따라 고개를 드니 천장 벽지가 1cm가량 찢어져 있었다. 그 틈으로 물방울이 점점 커지다가 결국 추락하는 것을 반복했다. 똑… 똑… 똑. 한동안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화면을 덮어 놓았으니 맥북 안으로 물이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아이폰과 애플 워치는 방수가 되니 걱정할 게 없지. 이불로 노트북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고 나서 덮개를 여니 반짝, 화면이 멀쩡하게 나온다. 출국 직전 다녀온 슈퍼 닌텐도 월드의 알록달록한 풍경. 현재 시각은 다섯 시 사십 분. ‘아우, 쫄았네.’ 그제야 미뤄 둔 푸념을 쏟아냈다. 꼭대기 층이라 좋아했더니 아니 비가 새는 게 말이 되나. 이따 나갈 때 한 마디 해야겠다. 방을 바꿔 달라고 하던지. 일단 한숨 잘까 아니면 오늘 가 볼 곳 좀 찾아볼까. 시간이 애매하네.
김 빠진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돌아왔더니 멀쩡해 보였던 노트북이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화면이 나오지 않았던 것. 음악이 나오는 걸 보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예로부터 기계는 껐다 켜면 다 되지.’ 다시 닌텐도 월드 사진이 보였지만 이번엔 키보드가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자긴 글러버린 상황을 받아들이고 의자에 걸려 있던 후드티를 입었다.
비가 샜다. - 미안하다, 바로 방을 바꿔 주겠다.
그것보단 노트북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 이런, 스토어에서 점검받고 우리에게 청구해라.
알겠다. - 다시 한번 사과한다. 방을 확인해 보겠다.
로비 직원과의 대화는 순조로웠고 어떤 면에선 전형적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제 갓 풀어놓은 짐들을 대강 뭉쳐서 트렁크에 쑤셔 넣는 동안 그리고 한 층 아래 있는 새 방 침대에 일단 드러눕고 나서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침 애플 스토어가 가장 많은 도시에 있다는 것이, 수리 보험을 들어 놓은 것도. 이후 호텔의 대처는 최악이었지만 그때까진 긍정 에너지로 가득했다. 둘러보니 방도 전보다 커 보였고 창 밖 월 스트리트 뷰도 나았다. 체크 아웃까지 닷새가 남았으니 오히려 좋은데? 가벼운 해프닝은 여행을 풍요롭게 하니까. 갓 구운 여행이란 이리도 달콤하다.
호텔을 나선 건 열 시가 지나고도 한참 뒤. 결국 침대에 누운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귀국까지 79일이나 남았으니 초반엔 시간으로나마 사치 좀 부려 보고 싶기도 했다. 호텔 문 밀어 만든 틈으로 햇살이 쏟아져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비 오락가락했던 어제 이어 뉴욕에서 처음 맞는 해. 역시나 여행지에서 나는 너무 쉽게 행복해진다. 대나무 숲처럼 곧은 빌딩들 빽빽하게 늘어선 은빛 숲을 지나 난잡하고 또 정겨운 차이나 타운까지. 수리할 맥북이 든 가방이 걸리적거리긴 해도 깨끗한 공기, 늦가을 바람 덕에 걷는 내내 기분이 상쾌했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버거집 버거 바이 데이에서 아침을 먹었다. 석 달간의 미션 셋 중 하나인 뉴욕 버거 투어의 두 번째 식당. The Infatuation의 <뉴욕 베스트 버거 19> 기사를 보고 방문한 집인데 솔직히 내 입에는 맞지 않았다. 패티를 눌러 바싹 구워서 맛과 향을 극대화하는 스매쉬 버거라는 점과 들어간 재료들의 신선함이 좋았지만 서울의 뭇 수제 버거보다 나은 점을 찾지 못했달까. 이후 방문한 50여 곳의 버거집들과 비교해도 중하위권에 속하니 문 밖 차이나 타운 풍경 탓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문자 P는 배를 채우고 나서야 그날 계획을 세운다. 빨대를 입에 물고 구글맵 화면에 띄엄띄엄 찍어 둔 핀을 보다가 10분 거리인 소호를 다음 행선지로 정했다. 그 유명한 뉴욕 소호의 거리와 상점들을 구경하고 또 유명한 센트럴 파크로 넘어가 뉴욕 가을 분위기 만끽하면 오늘 일정 끝. 그 사이에 유명하디 유명한 뉴욕 5번가 애플 스토어에 수리 예약도 해 뒀다. 그런대로 늦잠을 잔 데다 아침까지 든든히 먹으니 소호까지 가는 발걸음이 통통 튀는 것처럼 가벼웠다. 거기에 중국에서 다시 뉴욕으로, 10분이 채 안 되는 사이 바뀌는 거리와 골목의 그러데이션 역시 일품이었다. 햇살 받아 샛노랗게 빛나는 은행나무를 찍은 사진은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다.
소호는 기대했던 것처럼 으리으리하지도 심지어 깨끗하지도 않았지만 가을 오후의 빛이 그 모든 것을 풍요롭게 보이도록 했다. 알록달록한 색, 바글바글한 인파, 골목 여기저기서 나는 맛있는 냄새. 그것들에 취해 한 시간 가까이 주변 골목들을 일일이 탐방했다. 이것이 뉴욕 미션 중 두 번째다. 윌리엄 클라인의 <NEW YORK> 사진집의 배경이 됐던 그 도시에서 원 없이 거리 사진을 찍는 것, 이를 위해 맨해튼의 크고 작은 골목들을 남김없이 들쑤셔보는 것. 소호의 마법은 무심한 듯 근사한 데 있다.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로 익히 들었던 발타자르(Balthazar)가 좁은 골목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고 한 블록 옆엔 요즘 가장 핫한 패션 브랜드 에임 레온 도르(Aimé Leon Dore) 매장이, 온라인으로만 구경했던 편집숍들이 즐비하다. 또 몇 발짝 거리에 디저트집 에일린스 스페셜 치즈케이크(Eileen's special Cheesecake)가 있다. 작고 허름한 이 집이 뉴욕 3대 치즈 케이크로 손꼽힌다기에 플레인과 초콜릿 무스 두 개를 샀다. 바로 앞 공터에 걸터앉아 플레인 치즈케이크부터 한 입 베어 무니 씹을 것도 없이 사르르 녹아 어금니 너머 안쪽까지 스며든다. ‘이야, 이게 뉴욕 치즈케이크구나.’
담에 또 오지 뭐. 내일? 다음 주?
이 여유 뭐야, 아주 그냥 근사해.
시계를 보니 수리 예약 시간이 다 됐다. 머지않은 브로드웨이 대로변에 있는 프린스 스트리트 역 지하로 갔다. 애플 페이로 개찰구를 통과하고 혼자 신이 난 내가 돌아보면 부끄럽다. ‘이런 나 벌써 뉴요커 같잖아? 애플 페이로 지하철도 타고, 길에서 치즈케이크도 먹고.’ 역시 단 음식은 멘탈과 피로에 고루 좋다고 할 수밖에.
센트럴 파크 행 R 지하철은 7분 후에 온단다. 혹 소매치기가 맥북을 훔쳐가진 않았겠지, 하며 손으로 등을 더듬어 봤다. 그럴 리가 있나. 당연하게도 잘 있다. 근데 어딘가 개운치가 않다. 뭐지, 다른 사람 가방 만지는 것 같은 이질감은.
그때 알았다. 보조 주머니에 있던 여권이 사라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