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여름은 끝났고 나는 겨울로 떠났어
인간이 느끼는 쾌락 수치라며 떠 도는 글을 본 적이 있는가. 쾌락의 강도를 숫자로 비교해 놓았는데 웃을 때가 15, 쾌변이 그 절반인 8, 첫키스가 고작 1이란다. 내 첫키스가 그 정도밖에 안 됐었나. 최고의 쾌락은 좋아하는 사람과 교제에 성공했을 때. 자그마치 쾌변의 열 배다. 이걸 만든 놈은 최근에 첫 고백에 성공한 하지만 첫키스는 아직인 사춘기 소년인가 보다. 첫키스를 하고 나서도 그 쾌락 수치를 바닥에 깔 수 있을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본론은 여행이 2등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합격 소식보다 한참 위, 무려 섹스와 동률인 55로.
작가님, 저희랑 여행하실래요?
생각만으로도 허벅지 척척해지는 8월, 이메일 속 짧은 문장에 가슴 철렁 내려앉았던 날이 떠오른다. 그래, 이보다 가슴 뛰는 말이 드물긴 하지. 게다가 여행지도 일정도 나보고 정하라니. 살면서 그렇게 달콤한 고백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이후로도 꽤 오래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졌겠지만 난 그날을 그 해 여름 마지막 날로 기억한다. 마음이 이미 가을에 닿아 있었으므로.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곡 배경에 깔아 두고 해당 항공사의 취항 노선들을 죽 훑어봤다. 도쿄와 방콕. 여긴 언제든 갈 수 있으니 패스. 유럽 노선은 프랑크푸르트가 있었다. 내가 소문난 유럽 러버긴 해도 석 달간의 배낭여행이 불과 몇 달 전이니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다음은 LA 그리고 뉴욕… 뉴욕? 순간 마음속 둑이 쾅하고 터지며 무언가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인스타그램의 사진들과 주말 영화들, 갤러리에 걸린 작품들이 하나같이 그 도시를 가리키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나도 그곳을 열망하고 있었으니까. 며칠 후 79박 80일의 일정이 적힌 E-티켓이 날아왔다. 출국까지 남은 날짜도 얼추 80일. 출국 전날 런던행 티켓을 사기도 했던 P에겐 전에 없던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다들 알다시피 기분으로 치면 이때가 절정이니까. 출국 전까지가 꿀잼이거든.
도착하자마자 뭐부터 할까? 거기서 꼭 가 봐야 하는 곳들은 어디지? 연말 이벤트는? 본토 음식은 어떤 것들이 있더라? 근데 80일 내내 있으면 질리려나? 그럴 리가, 뉴욕인데. 아아, 앞으로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계획은 나중에 짜지 뭐. 오늘은 이 기분 좀 즐겨도 되잖아.
그리고 두 달 지나 확실히 알았다. 나는 그것들을 즐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원고와 촬영, 강연 핑계를 대는 사이 여름과 가을이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났다. 탐스럽고 향긋했던 전채 요리는 숟가락질 한 번 받지 못하고 시들고 말라비틀어졌다. 결국 증발한 뒤 얼룩으로 남은 그의 다잉 메시지를 발견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고. ‘짐 싸, 내일 출국이야.’
하루만 더, 진짜 딱 하루만 더. 변함없는 입버릇이라지만 이번엔 여유가 길었던 만큼 자책도 아쉬움도 유난히 컸다. 오죽하면 뉴욕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잠이나 자고 싶단 생각을 했을까. 항공사에 전화해서 다른 날짜로 바꿔 달라고 읍소해 볼까도 했다. 혹자는 말한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미루는 벼락치기 습관이 완벽주의자들의 특징이라고. 큰 일 날 소리. 그 말 믿고 끝까지 미루는 나 같은 P들이 부지기수일 게다. 더군다나 우리도 내심 꿈꾼다고. 이번만큼은 여유롭고 빈틈없는 스스로의 모습을.
낮잠까지 한숨 자고 일어나니 남은 오후가 반토막. 이젠 미룰래야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그나마 다행은 짐 싸기엔 꽤 능숙하다는 것. 8900원짜리 배낭 하나 메고 다닌 석 달 유럽 여행 동안 체득한 것이다. 단벌 신사 적 생각하며 자꾸 부피, 무게 줄일 생각만 해서 문제지. 아래는 다분히 효율 중심의 내 80일 여행 준비물 리스트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넉넉하게 가져갈 생각이었다. 나름 멋도 부려 볼 요량이었고. 근데 깊게 박힌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더라.
What’s in my trunk
라이카 카메라
가장 먼저 챙기는 것도, 깊이 고민하는 것도 촬영 장비다. 요즘엔 폰 하나로 다 된대도 내 여행은 주목적이 촬영이니까. 하물며 스트릿 포토그래피의 발상지 뉴욕이라면. 28mm 단렌즈라 종종 더 넓게, 더 가까이 찍을 수 없음이 아쉬워도 유럽과 뉴욕 도합 반년을 겪어 보니 이만한 여행용 카메라가 없다.
삼각대
고작 몇몇 순간을 위해서 종일 1kg 넘는 쇳덩이를 들고 다닐 가치가 있을까. 고민 끝에 여차하면 버리자며 챙긴 것이 좋은 결정이었다. 카메라와 삼각대에 촬영 맡겨 두고 노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알려 줬으니. 아쉽게도 뉴욕에서 다리가 부러져 소임을 다했다.
새 아이폰과 목줄
긴 여행에선 고장 대비 용으로 작고 가벼운 카메라를 하나 더 챙긴다. 일 년 전엔 리코 GR2, 이번엔 새 아이폰을 샀다. 2년째 스마트폰 촬영 강좌를 진행하는 강사로서 이번에 제대로 찍어 보겠다는 나름의 의지도 담았다. 게다가 카드 분실 이후론 애플 페이가 생명줄이었으니 출국장 면세점에서 스트랩 달린 케이스를 산 나 칭찬해.
맥북 에어 그리고 SSD
촬영 데이터 관리하기 위한 랩탑은 개중 가벼운 맥북 에어. 호텔에서 침수당한 그 맥북이다. 수만 장의 사진들은 포터블 SSD에 보관했다. 외장 하드 숨 넘어가는 끼기긱 소리에 마음 졸여 본 사람은 비싸도 SSD 사는 내 마음 이해할 것이다. 심지어 4 테라가 부족해서 베스트 바이에서 하나 더 샀다. 심지어 한국보다 싸더라.
USB C 충전기
USB C는 축복이다. 포트 세 개짜리 충전기 하나, 케이블 몇 개면 맥북, 아이폰, 에어팟, 애플워치, 보조배터리까지 모두 충전할 수 있으니. 사실 아이폰도 이 C타입을 핑계로 바꿨다. USB 충전 안 되는 라이카 Q2가 유일한 오점.
멋없는 슬링백
기내 반입, 삼각대 휴대용으로 챙긴 슬링백. 무게가 가볍고 주머니가 많은 거기에 방수 여부까지 확인하고 샀다. 모양은 썩 맘에 안 들지만 여행지에서 잘 보일 사람도 없는 내겐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뉴발란스 운동화
길게는 하루의 절반을 걸을 정도로 무식하게 여행하니 신발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90일간 1600 모델을 신고 뉴발란스 신봉자가 됐고 이번엔 최신 모델 990 V6를 골랐다. 80일간 맨해튼과 브루클린 곳곳을 다닐 수 있게 해 준 든든한 서포터. 러닝화 기술이 들어갔다는 설명답게 확실히 푹신하고 발의 피로도 덜했다.
옷가지는 2-5-3
짐이 많다 싶으면 옷부터 줄인다. 그래서 유럽에선 외투 하나로 겨울을 났다. 종종 비도 맞았으니 냄새가 났을 수도.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트렁크가 넉넉하기도 했고. 외투는 오리털 점퍼와 아끼는 트위드 코트. 상의는 후디와 스웨터 각 두 벌, 하의는 청바지에 카고 팬츠. 그리고 트레이닝복 상하의까지. 나름 레스토랑 방문부터 밤샘 촬영까지 두루 고려한 선택이었다. 옷 많아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여유로워지더라.
비니와 머플러
뉴욕 겨울이 서울보다 매섭단 말에 두툼한 울 비니와 머플러를 새로 샀다. 회색으로 색깔을 맞추려다가 입원한 환자처럼 보인다기에 남색/회색 투 톤으로. 걱정만큼 춥진 않았어도 종종 요긴했다.
팬티 넷, 양말 다섯
팬티는 세 개 묶음, 양말은 네 개 묶음을 사서 그대로 트렁크에 넣었다. 손빨래가 게 그리 힘들지 않고 혹 모자라면 거기서 사면 되니까. 고백하자면 나중엔 며칠씩 입고 신었다. 뭐 어때, 혼잔데. 겨울인데. 귀국 날짜 다가오면 하나씩 버리는데 그때 묘하게 기분 좋더라.
세면도구와 향수
이쪽은 잘 모르기도 하고 관심도 없어서 면세점에서 키엘 폼 클렌저와 수분크림을 샀다. 거기에 가지고 있던 칫솔 하나. 도착해서 보니 치약을 안 챙겼더라. 그리고 미국 치약 비싼데 좋지도 않더라. 향수는 메모의 프렌치 레더, 다니엘 트루스의 밤쉘을 썼다. 최소한 악취는 풍기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향기의 힘이 참으로 대단한 게 요즘도 그 향수 뿌리면 어김없이 헬스 키친의 골목길이 떠오른다.
미니 우산
눈비가 많이 온단 말에, 가서 사면 비싸다고 해서 코트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녀석으로 샀다. 진짜로 여행 첫날부터 비가 오는 게 아닌가. 나는 스스로가 대견했지만 녀석은 브루클린 브리지의 비바람을 못 버티고 오분만에 부러졌다. 너 카본이라더니 거짓말했구나?
영양제와 핫팩
삼십 대와 사십 대의 여행은 다르다. 때때로 도움을 받으며 버텨내야 한다. 부피 줄이겠다고 지퍼백에 알약 옮겨 담았다가 비행 내내 마약상으로 오해받진 않을까 걱정했었다. 무튼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잘 놀다 왔으니 영양제 덕 톡톡히 봤다고 믿으련다. 핫팩도 그렇고.
그리고 보딩 패스
인천 공항-뉴어크 리버티 공항을 오가는 에어프레미아의 왕복 티켓. 그간 뉴욕행을 꿈꾸면서도 나중에, 언젠가는 따위의 말로 미룬 이유가 티켓 비싸단 말들이었는데 에어프레미아의 가격표 보고 그간 알아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었던 나를 원망했다. 늘 가격 오름차순에 밀려 구경도 못했던 직항 편, 거기에 귀국 땐 프리미엄 이코노미 클래스를 탔다. 비즈니스 클래스보다 저렴한 가격에 넓은 좌석, 우선 탑승, 와인이 포함된 기내식, 어메니티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항공편, 서비스에 대한 얘기는 미뤄두고 결론부터 말하면 다시 이코노미 클래스로 돌아가기 힘들 것 같다. 엄마 말이 맞다. 돈이 이렇게나 좋다. 악착같이 벌어야 한다.
이 비행기가 실은 하늘 위가 아니라 지하에 있는 게 아닐까. 순간 이동 포털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들킬까 봐 창문도 못 열게 하잖아.
아예 이 모든 게 시뮬레이션 그러니까 게임 같은 거라면? 스테이지가 뉴욕으로 바뀌는 동안 내 눈을 가리기 위해 여기 가뒀을 수도 있겠는데.
밤 열 시에 이륙한 비행기가 앞으로 몇 시간을 더 날아 밤 열 시에 착륙할 예정이다. 비행시간이 딱 두 도시의 시차만큼이니 신기할 것도, 놀랄 일도 아니건만 무료했던 나는 그 공교로움에 이런저런 망상들 매달아 한참을 굴리고 놀았다. 승무원 몰래 창문 빼꼼히 열고 나서는 한껏 달궈진 쇳덩이마냥 보라색으로 빛나는 태양을 넋 놓고 바라봤다. 한없이 무심한 표정, 몹시도 평온한 마음으로. 다들 출국 전의 설렘을 말하지만 나는 이때를 가장 좋아한다. 낮과 밤의 경계, 지면으로부터 나까지의 거리, 허기와 포만감의 구분도 모호한 일상과 여행 사이의 섬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생각 하는 시간.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지만 않았어도 더 오래 즐겼을 텐데.
한 자리 건너 그러니까 옆옆 복도 측 좌석에 앉은 나이 지긋한 부인이 본인의 폰을 내밀고 있었다. 창 밖 풍경을 대신 좀 찍어 줄 수 있겠냐면서. 소녀 같은 표정을 보니 좀 전의 서운함이 눈 녹듯 가시고 덩달아 신이 나기까지 해서 얼마나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지 모른다. 단기 연수 길이라는 목사 내외와는 이후로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이것도 인연이니 귀국하면 천안에 있는 하늘소망교회에 꼭 방문하겠다는 약속까지.
석 달이요? 여행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나 오랫동안 뭘 할 계획인가요?
그냥 이것저것 해 보려고요, 하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어버버 하는 나를 기내식이 살렸다. 파스타 씹으며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봐도 답이 나올 리 만무다. 근데도 뭐라도 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제 여행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다. 다시 말하지만 여행하는 동안 나는 너무 쉽게 행복해지니까. 그러고 보니 여행의 쾌락이란 거, 듣던 대로 대단하네?
*에어프레미아로부터 왕복항공권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