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매일 버거만 먹은 아저씨가 있다고?
석 달이요? 그렇게나 오랫동안 뭘 할 계획인가요?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시선을 묶어 두고 간밤의 질문을 씹고 또 씹었다. 착륙 서너 시간 전이니 어제저녁이라 해야 하나, 시차 따지면 오후였을지도 모르고. 인천발 뉴욕행 에어프레미아 YP131편에서 만난 하늘소망교회 목사 내외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훨씬 전부터 스스로에게 던진 의문이기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던져졌고 어찌어찌 도착은 했는데, 20년 만의 겨울 방학이며 듣기 좋은 제목도 달았는데 정작 앞으로 80일간의 계획이 딱히 없었다. 그렇다고 뉴욕까지 와서 마냥 먹고 자고 하다 돌아가고 싶냐면 설마 그럴 리가. 그래, 방학 숙제를 주자. 가능하면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돌아가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으로.
그렇다면 먹을 것 만한 것이 없지. 선잠이 깨기 무섭게 몰려온 허기가 답했다. 자정 지나 겨우 호텔에 도착했던 터라 당장 먹을 것이라곤 목사 내외가 준 커피 믹스가 전부였다. 커피 가루라도 입에 털어 넣을까 하다 옆에 있는 사탕 하나 입에 물고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구글맵 검색창에 쓴 단어는 Hamburger. 맨해튼, 브루클린, 퀸즈 그리고 할렘까지 50여 개 가게들을 배경으로 펼쳐진 뉴욕 버거 투어의 시작이었다.
왜 버거였냐면 당연히 좋아해서다. ‘인생 뭐 있나, 버거 아니면 라멘이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라 삼 시 세끼, 석 달 내내 먹어도 물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빵과 고기, 채소가 모두 있으니 영양학적으로도 완전식품에 가깝지 않은가. 긴 여행을 버틸 에너지원으로 그만한 것이 없다는 게 그날의 결론이었다. 식당마다 다른 특색을 비교하기에도 좋고 대중화된 음식이니 가격 편차도 크지 않을 것이란 짐작도 있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그날까지도 잘 몰랐다. 뉴욕을 대표하는 음식이 피자와 베이글이라는 것을. 창 밖을 보니 꾸물꾸물 비도 오락가락했고 도착 직후의 안도감에 만사 귀찮았던 터라 꽤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 검색 결과와 트립 어드바이저 평점, 관련 기사들을 훑어봤다. 그 결과는 맨해튼 중심의 30여 곳의 버거집 리스트. 이것은 여행하는 동안 126개로 늘었다. 내가 참고한 뉴욕 베스트 버거에 관한 기사들을 덧붙이니 이제부터 이어질 동행에 참고하시기를.
https://www.theinfatuation.com/new-york/guides/best-burger-nyc
https://ny.eater.com/maps/best-burgers-nyc
https://www.timeout.com/newyork/restaurants/best-burgers-nyc
https://www.cozymeal.com/magazine/best-nyc-burger
첫 번째 방문한 식당은 월 스트리트에 잇는 7번가 버거(7th street burger). ‘뉴욕 베스트 버거 19’ 기사에 소개된 곳들 중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었다. 입석 테이블에서 빠르게 끼니를 해결하거나 포장해 가도록 마련된 작은 식당이었다. 그만큼 가격이 저렴한 것이 장점. 게다가 맨해튼 내에만 열 곳 넘는 점포가 있어 접근성이 좋다. 대망의 첫 번째 버거로 뭘 먹을지 고민하다 치즈버거보다 비싼 임파서블 버거(Impossible Burger)를 골랐다. 불가능할 정도로 맛있는 버거라니 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 임파서블이 식물성 단백질로 고기 패티를 만드는 기업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버거가 반쯤 사라진 후였다. 곧장 치즈버거를 추가해 푸짐하게 아침 식사를 했으니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을까.
본격적인 버거 탐방을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 도착 직후 호텔 천장 누수 사고와 여권 분실 사건으로 부분 붕괴됐던 멘탈 재건이 완료될 즈음이었다. 이 날의 식당은 맨해튼 동부, 3번가에 있는 JG 멜론(JG Melon). 추수감사절 휴무로 발걸음 돌렸던 아쉬움과 오기로 아예 오픈 시간에 맞춰 갔다. 훗날 찾아보니 그 해 미쉐린 가이드에 소개된 집이라고.
네온사인으로 표시되어 있고 아늑한 구석에 자리 잡은 1920년대 건물로 들어가 보세요. 시대를 초월한 분위기, 녹색과 흰색 체크무늬 식탁보, 쾌활한 직원이 매력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여러 세대에 걸친 술집의 매력은 확실히 버거이고 모두가 버거를 먹으러 오지만, 다른 요리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 미쉐린 가이드 소개 글 중.
낡은 문을 밀자마자 느껴지는 대단히 예스러운 공기. 쭉 뻗은 낡은 나무 바와 벽을 빽빽하게 채운 액자들은 보기 좋게 낡고 바랬다. 촘촘히 늘어 선 술병들이 알록달록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환영 인사와 함께 안내받은 입구 옆 작은 테이블은 창으로 스며든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치 진작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사실 이때 이미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이 집은 이것만으로도 와 볼 가치가 있다고. 그 설렘은 흰/녹 체크 식탁보 위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베이컨 치즈버거를 보는 순간 절정에 다다랐다.
제대로 녹아 패티를 코팅하듯 감싼 체다 치즈가 압권. 그 위용을 뽐내기 위해 빵 뚜껑은 열어 뒀고 안에 있어야 할 오이 피클과 생양파가 반찬처럼 곁들여져 있었다.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패티는 미디엄 웰 정도로 익혀 풍미도 육즙도 적당했다. 반면 베이컨은 바싹 익혀 바삭거리는 식감 그리고 짠맛의 짜릿함을 더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완벽한 균형. 내가 기대했던 전형적인 미국식 햄버거였다. 자연스레 JG 멜론이 버거와 식당을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이 집을 초반에 찾았으니 행운이라 할 만하다.
이후로 만 원 미만의 작은 동네 버거집부터 드라이 에이징 비프 패티를 쓴 스테이크 하우스까지 수많은 식당에 방문에 대표 버거들을 맛봤다. 본격적인 버거 투어 얘기 전에 몇 곳만 간단히 더 소개하려 한다.
유별난 햄버거 사랑으로 햄버거 교수라 불리는 작가 조지 모츠(George Motz)가 2023년 오픈한 신상 버거집이다. 가게 이름 역시 그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이라고. 여행 첫날 닥치는 대로 팔로우 한 뉴욕 관련 인스타그램 계정들이 일제히 이 집을 소개해서 리스트에 추가했고 소호에 방문하는 날 찾았다. 하필 그날이 정식 오픈하는 날이었더라. 세계 최고의 버거 셀럽이 직접 패티를 굽는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과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 없었다. 덕분에 나도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어느 방송사였는지 짧은 인터뷰도 했다. ‘나 이거 먹으러 서울에서 날아왔다고!’ 혹시 진짜 방송에 나갔을까.
대기줄이 길다기에 버거를 포장해서 바로 옆 공터에서 먹었다. 번과 패티, 치즈, 캐러멜 화 된 양파가 전부고 뉴욕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스매시 버거다. 패티를 납작하게 눌러 마이야르 반응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 미 동부 대표 버거로 꼽히는 쉐이크 쉑도 같은 방식으로 패티를 굽는다. 씹는 순간 육즙 터지는 맛은 없지만 바삭한 식감과 감칠맛 그리고 부드럽고 쫄깃한 포테이토 번의 조화가 마음에 들었다. 다녀보니 이 조합은 대체로 저렴한 버거집들에서 볼 수 있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선 퍽퍽한 호밀 번과 두툼한 패티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다행인지 내 입맛은 저렴이 쪽이었다.
고급 버거의 기준이랄까. 최고의 버거로 꼽힌 그중에서도 달러($) 표시가 많이 붙은 고급 버거들에서 자주 보이는 단어가 있다. 드라이 에이지드 버거(Dry aged burger). 스테이크 하우스에서나 볼 법한 드라이 에이징 소고기로 패티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가격도 그만큼 비싸서 버거 하나가 50달러를 넘기도 한다. 때문에 이런 곳들은 크리스마스이브처럼 특별한 날 예약해 달력 표시까지 해 두고 방문했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 근처에 있는 미네타 태번(Minetta tavern)도 그중 하나. 이곳 분위기도 JG 멜론 못지않다. 샛노란 조명까지 더해진 게 흡사 영화 속 세트장 같아서 옷까지 차려입고 옛 미국 감성 느끼고 싶다면 여기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와 함께 샴페인 한 잔 건네는 낭만까지.
이곳의 버거는 두 종류. 미네타 버거는 일반 소고기 패티, 블랙 라벨 버거가 드라이 에이징 패티로 만들어진다. 가격은 38달러. 세금에 20% 팁까지 하면 50달러다. 분위기에 취해 맥주 한 잔과 직원 추천 홈 메이드 베이컨을 추가했다. 그저 버거에 작은 베이컨 조각 추가되는 줄 알았는데 긴 베이컨 두 줄이 접시째로 나왔다. 가격도 웬만한 버거 하나 값. 그녀를 흘겨보며 한 조각 썰어 입에 넣었는데 아니 이렇게 부드럽고 맛있을 수가. 드라이 에이징 한 패티의 풍미도 대단했다. 이 고기를 다져서 패티로 먹는 게 아깝다 생각 중인 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도 먹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으니. 번이며 양파, 토마토가 필요 없다 생각될 정도로 드라이 에이징 패티의 힘은 대단했다. 비쌀수록 맛있진 않았지만 맛있는 버거들 중엔 비싼 버거가 많았다. 당연한 얘기겠지.
좋은 식당은 그 도시의 축소판과 같죠.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한 끼는 여행 전부와 바꿔도 아깝지 않답니다.
바르셀로나 항구에 있는 식당에서였다. 음식 맛은 이제 기억나지 않아도 남자가 남긴 말은 지금까지도 입가에 맴돈다. 매일같이 맨해튼 아니면 브루클린의 어느 식당에서 버거를 씹는 동안에도 종종 그 문장을 떠올렸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여행지에서의 식사는 단순히 배를 채운다는 것 또는 식문화를 경험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도시와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랄까. 그저 최고의 버거집을 찾아다닐 뿐이었지만 그 사이 많은 것들을 알게 됐다. 바쁘고 성격 급한 사람들에 철저히 맞춰진 예약 문화와 세금/팁 지불 방법, 근처 지리까지 속속들이.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물론 가장 값진 것은 사람들과의 길고 짧은 대화들이다.
헤이 브로, 곤니치와. 아까부터 봤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어?
- 반가워, 나는 한국인이고 뉴욕 최고의 버거를 찾고 있어. 혹 책을 쓰게 되면 사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오우 미안해, 내 아시안 친구들이 다 일본인이라. 그 책 나도 볼 수 있는 거야?
- 글쎄, 언젠가 그렇게 된다면 내 첫 번째 뉴욕 친구로 당신 이야기를 적을게.
꼭 그렇게 되기를. 이 근처에 또 버거 죽이는 집이 있으니 가 봐. 에밀리라는 피자집이야.
80일간의 뉴욕 버거 투어를 여기에 다 소개하자니 방대하기도 하고 자칫 먹는 얘기만 하다 끝날 것 같다. 그래서 별도의 브런치북에서 하나씩 소개하고 또 비교하려고 한다. 뉴욕 최고의 버거를 찾는 긴 여정에 동참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