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절정이었고 나는 센트럴파크에 있었지
무릎 위로 톡. 갑작스런 진동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휘 둘러보고 나서야 여기가 어딘지 기억날 만큼 달콤한 낮잠이었다. 시차 때문에, 이런저런 사건들에 사흘밤을 뒤척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와중에도 양 허벅다리 사이에 있는 왼손은 반 쪽 남은 베이글 샌드위치를 야물게 쥐고 있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악착같이 먹고 무사히 돌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라도 되나 싶어서. 그 곁에 얌전히 내려앉은, 짐작건대 방금 나를 두드려 깨운 잘 익은 낙엽을 보다가 문득 어느 나무였을지 궁금했다. 고개를 드는데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정신이 아득했다. 햇살과 나뭇가지 사이사이, 새 지저귀는 소리며 머리칼 헝클이는 바람까지 온통 누렇고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이지 온통 가을이었다.
샌드위치 넣은 가방을 둘러메고 센트럴파크를 걸었다. 입구에 있는 연못 표면에는 주변 풍경이 비쳤는데 물결이 잔잔해서인지 아니면 빛이 좋았던지 꼭 유리나 거울 깔아 둔 것처럼 매끈하고 선명했다. 특히 저 멀리 보이는 가스토우 다리(Gapstow Bridge) 위아래로 단풍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볼만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 내리막길이 있어 연못으로 가려는데 오른쪽에 꽤나 위험해 보이는 바위 언덕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서 있는 것 보아하니 전망대겠구나 싶어 샛길을 오르는데 한 사내가 대뜸 내 앞을 막아섰다. 대낮이지만 건장한 흑인 남성 두 명을 맞닥뜨렸다고 생각해 보라. 위축이 될 수밖에. 게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긴 팔을 처 드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순간 움찔했다. 겉으로 티가 안 났을 뿐. 아닌가, 눈치챘을까.
헤이 브로, 내 질문에 답 좀 해 줄 수 있어?
저 녀석 색깔이 검은색으로 보여, 갈색으로 보여?
그의 손가락 따라 나무 위를 봤다. 청설모 한 마리가 그와 신경전 하듯 빤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량하게 쪼그려 앉아 있던 다른 사내도 실은 그 녀석을 보고 있던 것이었다. 어디 보자, 몸통은 검은색인데 등줄기 따라 꼬리까지 갈색 털이 넓은 줄로 난. 하아, 지금 생각해도 이렇게 답할 수밖에. “반반?”
응원하는 농구팀의 마지막 버저비터가 빗나가기라도 한 양 둘은 큰 몸짓으로 절규했다. 내가 바위 위에 올라온 뒤에도 여전히 실랑이 중인 둘을 보며 조금 미안해졌다. 어느 쪽이든 답을 해 줄 걸. 그게 아니면 재밌게라도. 에이, 쫄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텐데.
하얗게 단장하고 준비 중인 스케이트장 Wollman Rink 주변으론 무슨 재밌는 일이 있는지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동그랗게 모여 떠드는 무리, 심각한 표정으로 초상화 그리는 화가들, 돗자리 위에 한 상 벌여 놓은 가족, 아예 드러누워 낮잠 자는 사람, 산책 나온 강아지까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난간에 기대 봤다. 탁 트인 시야로 가을숲과 빌딩숲이 겹쳐 보이는 경치가 제법 그럴싸했다. 귀엽게 이름 붙인 양의 초원(Sheep Meadow)에선 한동안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무에 둘러싸인 넓은 공터 위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놀고 또 쉬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게 즐거웠다. 떨어지는 빛은 어쩜 그리 좋던지. 하마터면 또 잠들 뻔했다.
봄, 여름 그리고 겨울도. 계절의 절정이라면 대체로 중간쯤이잖아.
근데 가을만은 익을 대로 익어서 당장이라도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끝무렵이 정점인 것 같아.
볕의 온기와 바람의 한기 사이. 입은 베이글 샌드위치를 씹고 있었지만 눈은 가을에 머물렀고 머리는 가을만을 생각했다. 단연 가장 좋아하는 계절, 많이도 사랑했고 이별하기도 했던 시기. 그러고 보니 가을을 해외에서 보낸 건 처음인 것 같다. 눈앞 풍경과 맞춰 볼 어느 도시의 가을이란 것이 잡히지 않았던 걸 보면. 언젠가 지인들에게 선물할 달력을 준비하면서 9,10,11월에 넣을 사진이 없어 아쉬웠던 기억만 떠오를 뿐이었으니까. 많이들 그런 말 하지 않던가. 가수는 노래 제목처럼, 작가는 책 제목처럼 된다고. 십 년 전 겨울 도시 모스크바에서 여행을 시작한 이후 공교롭게 겨울 위주로 떠나게 됐다. 당장 생각나는 것도 빗물인지 콧물인지 연신 닦으며 걸었던 파리의 어두운 골목이다. 이걸 징크스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오랫동안 비어있던 자리가 바라 마지않던 뉴욕에서 그것도 이렇게 농익은 가을의 조각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이 마치 그간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인 것만 같았다.
센트럴파크가 크다 크다 말만 들었지 그렇게 클 줄이야. 공원 중앙에 있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Jacqueline Kennedy Onassis Reservoir)에서 노을을 봤으니 오후동안 반의 반쯤 돌았나 보다. 이후로도 종종 센트럴파크에 그것도 이런저런 루트로 가 봤지만 결국 전부 둘러보는 건 실패했다. 무엇보다 그런 가을날은 하루뿐이었다. 그 많던 낙엽들도 며칠 후에 갔을 땐 이미 다 떨어지고 없었다. 그렇다고 센트럴파크가 별로였냐면 아니, 늘 좋았다. 조금씩 색 빠져 창백해지고 아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때도 많았지만 종종 일부러 찾아와 걷거나 벤치에 앉아 있곤 했다. 횡단보도 너머 맨해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요를 음미하고 있노라면 늘 생각 나는 일화가 있었다. 공원 조성을 논의할 당시 그 규모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 공원이 없다면 이만한 크기의 정신 병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던 이야기. 아스팔트 숲에서 큰 불만 없이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실제로 그곳에서 만난 그리고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맨해튼에서 만난 사람들보다 느긋하고 친절했으며 표정 역시 온화했다. 자신들이 머리 위로 낙엽 던지는 장면을 내 카메라로 찍어 달라던 두 여인은 사진 받을 이메일 주소를 묻자 괜찮다고 했다. 그저 이 행복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었다며, 그게 누군가의 추억이 되면 더 좋을 것 같아 부탁했다고 말했다.
추수감사절 정오쯤 시작해 다섯 시 조금 넘어 끝난 짧은 계절. 그래도 그 하루가 8월부터 이미 마음은 겨울에 가 있던 내겐 여행의 출발점에서 챙길 수 있는 것들 중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알록달록 포장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오늘도 넘겨 봤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볼 추억. 언젠가 다시 센트럴파크에 간다면 그날도 분명 가을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