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할 수밖에 없으니 좋아질 수밖에
자칭 타칭 명실상부 날씨 빌런. 주변에 알려진 내 모습 중 하나다. 어딜 가든 공교롭게 비가 내린다는 그런 우연 수준은 넘어서는 상관관계가 있다. 보름을 한 도시에 머물러도 해 한 번 제대로 못 보고 오기 일쑤요, 흐린 날도 보기 귀하다는 지중해 어느 해안 도시에선 내가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터미널 주변으로 먹구름이 퍼져 나가고 이내 안개비가 흩뿌려졌다. 이럴 때 혹 동행이나 팀이라도 있으면 잿빛 하늘과 나를 번갈아 흘겨보는 그들에게 멋쩍은 사과의 말을 건네곤 한다. 어떤 팀에선 내가 아쉬운 척할 뿐 실은 비구름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을지 모르니 언젠가 사막 한가운데 던져 봐야겠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또 어떤 작가에겐 이렇게 날씨 예보 자주 찾아보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말을 들었다. 예전 연인이 내 첫 번째 책을 촤라락 넘겨보며 탄식했던 것 역시 날씨 때문 아닐까. “이 화려한 풍경을 이렇게나 쓸쓸하게 찍을 수 있다니 이것도 오빠 능력이라면 능력이네.”
먼저 뉴욕에 다녀온 이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비도 눈도 자주 오고 바람도 세니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것이라고. 그때쯤 폭우로 수많은 도로와 지하철 역이 침수 됐다는 뉴스도 들려왔던 터라 웬만한 눈비는 맞고 다닌 나도 이번엔 준비에 나름 고심을 했다. 그래봐야 작은 접이식 우산, 약간의 발수 기능이 있는 패딩 점퍼가 다였지만.
실제로 날씨 불운아와 뉴욕의 시너지는 여행 초반엔 유효했다. 내가 도착한 날, 정확히 짚으면 뉴어크 리버티 공항에 착륙한 시간 언저리부터 구름이 끼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다음날 그러니까 본격적인 여행 첫날은 종일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이때를 위해 준비했지롱, 하고 꺼낸 우산은 세찬 강바람에 오분을 못 버티고 부러졌다. 젖은 머리칼 머리 위로 부여잡고 브루클린 브리지를 걷다 보니 헛웃음이 나오더라. 걱정하고 준비하면 뭐 해,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을.
가을에서 겨울로, 호텔에서 아파트로 그렇게 관광객에서 여행자로. 도시도 나도 조금씩 바뀌고 곧 거기 적응했지만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주말마다 찾아온 비소식이다. 기록을 뒤적여보니 11월 26일부터 12월 17일까지 한 달이었다. 안개비든 소나기든 일요일엔 비가 내렸고 그때마다 나는 브루클린 브리지에 있었다. 어느 날은 다리 위에서 반대편 풍경과 사람들을 봤고 또 어떤 날엔 다리 아래 공원과 자갈밭, 타임 아웃 마켓의 옥상 전망대에서 다리와 근처 풍경을 감상했다. 비 와서 안개 자욱해지면 여기가 꽤나 근사하겠다고, 그 유명한 덤보(DUMBO)를 처음 찾아갔던 새벽의 감상이 어쩌다 보니 주말의 루틴이 된 것이다. 어쩌면 비가 와서 간 게 아니라 내가 가서 비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만.
자욱한 안개로 덮인 브루클린 브릿지와 강 너머 맨해튼 스카이 라인. 도무지 질리지 않는 그 풍경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기에도 제격이었다. 예를 들면 다른 도시들의 비 오는 풍경과 그때의 감정들. 비에 번져 더 밝게 또 멀리 빛나던 부다페스트의 야경 앞에선 뭐가 그리 신이 났던지 춤을 추는 것처럼 종종걸음으로 다녔다. 머리칼을 다 적신 빗물이 땀처럼 목을 타고 어깨까지 흐르던 그 순간의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 오키나와에선 이름 모를 숲 속에 차를 세워 두고 천장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그 가지런한 소란이 악기를 조율하는 오케스트라의 불협화음과 닮아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모스크바에선 매일 지겹게도 눈을 맞았는데 어쩐지 한 번도 우산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추측건대 별일 없던 일상에 여행이든 눈이든 무언가 일어났다는 것이 마냥 좋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소리와 색채 그리고 습도. 수많은 여행들을 비의 기억들로 한 데 엮어 주르르 끌어올렸으니 어쩌면 이게 날씨 빌런의 진짜 스킬일 수도 있겠다.
내내 불운이라 했지만 사실 나는 비를 무척 좋아한다. 사랑한다 고백하는 몇 안 되는 대상일 정도로.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어도 언제부터였는지, 왜 그랬는지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중 시기며 이유가 확실한 게 몇이나 될까. 내가 오늘 무화과 향 향수를 뿌린 이유, 머리가 텅 빈 날에 얼 그레이 차를 주문하는 습관도 그 시작이 희미하긴 매한가지니까. 중요한 건 여전히 사랑한다는 그리고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됐다는 것이지.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아예 사랑하기로 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날씨 빌런의 힘은 여행 후반부로 가며 완전히 힘을 잃었다. 후에 듣기로 뉴욕의 지난겨울은 유난히 메마른 계절이었단다. 그렇게 잦다던 눈을 구경한 게 겨우내 고작 두어 번이었으니 확실히 그랬다. 게다가 제일 큰 눈이 내렸던 2024년 1월 16일엔 짧은 보스턴 여행 중이었다. 돌아오는 밤버스가 맨해튼에 진입했을 때 하얗게 덮인 풍경을 연신 창문 닦고 보면서 어찌나 발 동동 굴렀던지. 자정이 지난 시각, 집 근처 브루클린의 호이트 쉐르머혼(Hoyt-schermerhorn) 역을 나온 나는 한참 동안 실성한 사람마냥 실실 웃었다. 익숙한 풍경 위에 입혀진 낯선 채색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아무래도 난 무언가 일어나는 쪽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