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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Oct 11. 2024

록펠러 트리 아래서

따라 부르지 않으면 크리스마스는 오지 않아

캐럴이 울려 퍼지고 눈이 내려

그저 그런 날이 아니야

 예쁜 선물들을 

네가 안아주지 않는다면  필요 없지만.

오늘밤은 네가 전부야  트리 아래선.

아무리 그래도,

밀지는 마세요.

미안합니다괜찮으세요저는 괜찮아요.


 인생은 실전이요 뉴욕은 진짜다. 6번가 어느 골목의 인파 속에 끼어 이 사람 저 사람과 어깨 부딪히면서, 사과와 경고의 말들 함께 나누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나 더 알고 싶은 게 있다면 이 줄의 목적지가 내가 가려는 곳이 맞느냐는 것. 뒤꿈치 한껏 들고 단서 좀 찾아보려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혼자 고개 빼꼼히 내밀고 있던 게 눈에 띄었겠지.


 다들 여기  있습니까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 가는 줄인가요?

맞아요아니 아마 그럴 거예요사실  모르겠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 사람들이 나무라기라도 하듯 입 모아 대답했다.


맞아요크리스마스트리를 보기 위한 사람들의 줄이에요. NYPD에게 확인했어요들어갈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맞다고요? 어휴다행이다.

 2023년 11월 29일 밤. 80일 전체를 통틀어 몇 안 되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이 도시의 크리스마스 시즌을 알리는 ‘록펠러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그것. 뭇사람들이 영화 <나 홀로 집에 2>의 배경으로 기억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불 밝히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말에 여행 첫날부터 동그라미 쳐 두고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을 땐 종일 밤만 기다렸다. 일찌감치 귀가해 밥까지 든든히 챙겨 먹고 나온 때가 다섯 시. ‘행사가 열 시라고 했으니 이때쯤 가면 내 자리 하나 없겠어, 해도 지기 전에 가는데.’ 이런 안이함이 이때까진 남아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거기 가는 사람들 이리 와 함께 노래 부르며 성탄 축하하자.’ 류의 장면이라도 펼쳐질까 기대했던 건지.

바로 이 곳이다

 뉴욕의 늦가을 해는 서울보다 짧아서 타임스퀘어 지나 6번가에 도착했을 땐 이미 거리에 밤이 내려앉아 있었고 록펠러 센터 주변으로는 때아닌 긴장감이 흘렀다. 몇 블록에 걸쳐 철제 펜스를 세우고 교통 통제를 하는가 하면 골목마다 수십 명의 NYPD들과 경찰 트럭이 서 있었기 때문. 험상궂게 생긴 경찰관들이 허리춤에 팔을 얹거나 허리띠를 잡고 삼삼오오 모여있는 모습 보고 쫄지 않을 사람 있을까. 게다가 주변으로 테러 뉴스에서나 보던 콘크리트 바리케이드까지 놓여 있으니. 석 달 살아보니 툭하면 하는 짓이었지만 당시엔 겁부터 났다.

 몇몇 행인들이 그들과 짧게 대화를 나누고 이내 돌아섰다. 보아하니 행사장 입장이 가능하냐는 질문과 안 된다는 답 같아서 나 역시 빠르게 포기하기로 했다. 다시 말했지만 NYPD를 뚫고 들어갈 아니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집에 가긴 뭔가 아쉬워서, 별다른 플랜 B도 없었던 터라 한 블록 너머 5번가에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록펠러 센터 맞은편에 있는 삭스 피프스 애비뉴(Saks fifth avenue) 백화점 앞에선 트리가 보일 것이란 생각에. 경비벽 없는 골목 찾아 몇 블록을 빙 둘러 5번가에 갔지만 그곳이라고 상황이 다를 리가. 인파도 경비도 아까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멀리서나마 크리스마스트리 보겠다며 모였던 게지. 이런 걸 눈치 게임에서 참패했다고 하던가.

 행인들을 위해 열어 놓은 좁은 통로에선 재미있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라도 하는 듯 사람들은 하나같이 느릿느릿 걸으며 멀리 보이는 나무를 감상했다. 더러는 뭔가 떨어뜨린 척 두리번거리면서, 어지러운 듯 펜스에 기댄 채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럴 땐 여지없이 NYPD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돈 스톱, 킵 고잉.’ 나도 천천히 걸으며 곁눈질로 록펠러 센터 쪽을 기웃거렸다. 아직 불을 켜지 않은 탓에 그냥 베어다 놓은 것과 다름없었지만 과연 곧고 거대했다. 나중에 찾아본 기사에 따르면 이번 트리에 쓰인 나무의 높이는 25m에 무게가 12톤이라고. 두르는 전구의 수는 물론이고 나무의 기증자부터 운반 일자와 방법 등 그야말로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더라. 하지만 그날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고 멀리서나마 인사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겨울 내내 뉴욕에 있을 테니 아주 그냥 트리라면 학을 뗄 정도로 봐 주마.” 그리고 뭐 뉴욕에 크리스마스트리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다시 6번가로 돌아오는 몇 분 동안에도 크고 작은 트리, 조명 장식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중 베스트는 6번가 폭스 뉴스 건물 앞에 세워진 트리와 호두까기인형. 이 정도면 대형 트리지, 오늘은 이걸로 됐다 하고 돌아서는데 골목 어귀에 잔뜩 몰려있는 인파가 눈에 띄었다. 뭐 대애단한 빌보드 스타라도 왔나 봐? 가만있어 봐, 여기선 게다가 오늘이라면 진짜 그럴 수도 있겠는데?? 홀린 듯 다가갈 때까진, 까치발로 구경하는 동안에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뒤로 옆으로 밀리고 치여 꿀렁꿀렁 인파 속으로 묻혀 버렸다. 모래밭에 서서히 잠기는 것처럼 말이지. 그것이 이렇게 줄을 서게 된 연유다.

 오른쪽 벽에서 왼쪽 벽 그리고 다시 왼쪽 벽으로 구불구불 겹쳐진 줄이 멀리서 보면 그런대로 질서 있게 보였겠지만 속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중간중간 떠들고 노래하는 사람들 때문에 두, 세 갈래로 늘어나거나 옆구리 터진 김밥처럼 뒷줄과 엉키기 일쑤였고 이때를 노리고 구경하는 척, 물어보는 척하며 누군가 끼어들곤 했다. 나중엔 이런 게 뉴욕의 질서다 하게 됐다만. 뭐 나 역시 기웃기웃 대다 얼떨결에 파고들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무엇보다 여기 선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가 확실치 않았다. 가끔 한, 두 발짝씩 앞으로 가긴 하는데 이게 앞줄이 입장을 한 것인지 맘 급한 사람들이 바짝 밀착해서인지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간 탓인지 알 도리가 있나. 하지만 대체로 존버는 승리하고 언제나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로 기록되는 법. 아장아장 한 시간쯤 지나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콘크리트 바리케이드와 경찰차, 경찰들이 몇 겹으로 막아 놓은 입구. 국경 수비도 그만큼 삼엄할까 싶다. 한쪽엔 입장 불가 사유가 적힌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다른 것들은 가물가물하지만 하나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백팩 금지” 실제로 내 앞 남자는 메고 있던 백팩을 들고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인 뒤 결국 돌아서야 했다. 여기 오기 전 집에 들러 가방을 두고 나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뒤따라 선 나는 곧바로 양팔을 활짝 벌려 내가 가진 것 없는 사람이란 걸 어필했고 매섭게 노려보던 경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뒤쪽으로 까딱했다. 그들 사이로 들어갈 때의 그 기분이란. 입국 수속 통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앞장선 그의 뒷모습이 어찌나 늠름해 보이던지

 경관의 인솔 하에 마침내 행사장에 입성했다. 마지막 코너를 도니 색색의 조명, 이런저런 소음으로 현장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일행들이 대뜸 뛰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겠지. 이에 질세라 나도 달리며 생각했다. ‘아니 텅텅 비었구먼 왜 이렇게 안 들여보내 주는 거야.’ 록펠러 센터 정면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웨스트 48 스트리트 방면, 트리와는 한 블록 정도 거리였다. 공연장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기대만큼 좋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아무렴 어때, 트리가 보이는 걸.

 하지만 환희는 광고 영상처럼 짧고 그 뒤엔 또다시 지난한 기다림이 있다. 행사장에 자리를 잡은 게 일곱 시, 트리 점등 행사가 열 시였으니 정확히 세 시간을 서 있었다. 게다가 이날 포함 내가 겪은 뉴욕의 행사들은 철저하게 TV 쇼 중심이라 삼십 분에 한 번 현장 연결할 때 빼면 도무지 재미있는 일이 없다. 노래 한 곡 틀어주지 않는 먹먹한 기다림이 나는 굉장히 실망스러웠다만 함께 기다린 뉴요커들은 이런 푸대접이 익숙한지 직접 노래 부르고 춤을 췄다. 물론 나도 안 듣는 척하면서 살짝살짝 어깨 들썩였고.

 잠시 후 가수 켈리 클락슨의 노래 Underneath the tree가 행사장 가득 그것도 무려 라이브로 흘렀을 땐 괜히 가슴이 울컥했다. 그 옛날 대학생 시절부터 들었던 노래의 주인공이 지척이라면 지척에 있다니.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나도 그때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튕기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후로도 익숙한 캐럴들이 흐르고 사람들이 다 같이 따라 부르며 분위기가 점점 고조됐다. 펠리스 나비다(Feliz Navidad)와 그 유명한 달린 러브의 크리스마스(Christmas (Baby Please Come Home))까지. 이런 게 캐럴의 힘 아닐까. 세계 어디서나 같은 노래가 불리고 할머니와 손자가 손 맞잡고 흥얼거릴 수 있는 것. 미소조차 인색한 아저씨도 길 한복판에서 춤추게 만드는 것도.


다섯하나.

라이트 !


 열 시 정각. 6번가에서의 한 시간보다 짧은 세 시간이 지나고 록펠러 크리스마스트리가 환하게 불을 밝혔다. 1933년 이래 91번째 그리고 내 첫 번째 트리. 나무 전체를 두른 5만 개의 전구 그리고 꼭대기에 달린 커다란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의 빛이 얼마나 강렬했냐면 잠시 주변이 암전 됐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잠깐이지만 사람들의 환호마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들어 올린 폰 화면의 빛마저도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보였다. 

 그 현장, 순간에 완전히 매료된 나를 깨운 것은 뉴요커들의 시린 듯한 쿨함. 몇 시간이나 서서 기다린 게 아깝지도 않은지 일, 이 분 환호 후에 태반이 미련 없이 홱 돌아 서 제 갈길을 가는 게 아닌가. 조금 전까지 사람들을 막고 서 있던 철제 펜스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럴 땐 뇌보다 발이 먼저 움직인다.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걸으니 어느새 트리 아래. 조금 전까지 저 뒤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광경이 코앞에 있다. 나는 한참 동안 머물며 트리를 감상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트리가 철수할 때까지도 나는 뉴욕에 있겠지만 오늘의 감동은 어쩌면 내 평생 다시없을 테니까.

 뉴욕에서 연말을 보낸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록펠러 크리스마스트리를 이야기했다. 그 트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큰 바람인지. 그시절 <나 홀로 집에 2>를 결국 끝까지 보지 못했던 그래서 이날에 대한 동경도 없었던 내겐 어쩐지 과분한 밤이었지만 한편으론 잘됐단 생각을 했다. 케빈 대신 내가 오롯이 이 광장, 트리 아래에서 주인공으로 기억됐으니까.

분명 다른 크리스마스와는 달라.

당신이 캐럴을 불러도 눈은 오지 않지만

나를  안아줄 이도 없지만

도시가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내가 지금 트리 아래 있는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까 들었던 켈리 클락슨의 노래를 가사 바꿔 흥얼거렸다. 앞으로 며칠은 이러겠지. 나는 너무 쉽게 사랑에 빠져 버리니까. 이제 시작 된 거다. 뉴욕과 나의 크리스마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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