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엔 있을까? 내가 잃은 것
덜컹덜컹 말고 끼익끼익. 아니 쌔애애액에 가까우려나. 탈선이 아닐까 싶은 불안정한 소음이 노이즈 캔슬링을 뚫고 귓가를 때렸다. 뒤이어 땅 전체가 내려앉을 듯 요동친다. 눈앞으론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썰린 맨해튼, 덤보 야경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꼭 영사기 화면처럼. 2024년 2월 2일. 맨해튼 브리지에 내려앉은 금요일 밤은 유난히 깊고 진하다.
분주한 하루였다. 서울로 보낼 원고를 마치느라 새벽잠을 잤고 점심 즈음 웨스트 빌리지의 세인트 조지 커피에서 스콘에 카페 라테를 마셨다. 오후는 그린위치부터 노호, 소호의 골목들을 파고들며 가게, 사람 구경 하는 데 썼다. 에임 레온 도르의 티셔츠는 오늘도 만지작 거리다가만 왔지만 피쉬스 에디에 쌓여 있는 접시와 컵, 에코백, 엽서들 중에서 선물 거리를 점찍어 뒀으니 수확이 없진 않았다. 저녁엔 뉴욕에서 활동 중인 작가 B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지난주 카네기 홀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눈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녹색으로 채워진 작업실에서 우리는 너와 나 또 이 현실이 과연 실재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각자의 의견을 나눴다. 삼십 분 뒤 건물 밖으로 나온 둘은 이렇게 인사했다. "또 만나요, 지구 어딘가에서."
어떤 종류의 여운이었는지 그대로 집에 가기 영 아쉬워 들린 곳은 스트랜드 서점.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서점이자 중고 책방이다. 이곳의 묘미는 수많은 책들이 색깔별로 늘어 선 디스플레이도, 어째 책보다 더 많아 보이는 굿즈들도 아니다. 지하실의 책냄새를 맡아야 한다. 오래된 선풍기가 고개 까딱이며 퍼뜨리는 쿰쿰한 향으로 폐를 채우면 마음이 편안한 건 물론이요, 한 두 권쯤 읽은 듯한 포만감까지 생긴다.
책방을 나와 보워리, 차이나타운 지나 맨해튼 브리지까지. 한 시간쯤 걸었나. 맨해튼으로 숙소를 옮기기 전 마지막 밤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다리 초입에 있는, 기특한 녀석들이 펜스를 끊어 만든 틈 앞을 찾았다. 동그란 창 너머로 차이나 타운, 월 스트리트의 상반된 야경이 사이좋게 겹쳐 있다. 두 달 전만 해도 저 멀리 솟은 빌딩 숲의 끝에 정신이 팔렸지만 이젠 발아래 보이는 가로등 주변 풍경들을 감상한다. 수레를 끌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남자, 빠르게 월 스트리트 쪽으로 빨려 드는 자전거, 춤을 추는지 휘청이는지 알 수 없는 그림자. 이렇게 도시와 나의 적절한 거리를 찾는 과정이 여행일까. 뭐 그건 사람과의 관계, 사랑도 마찬가지겠네. 일단 서울의 일상과는 최대한 멀어지는 게 상책인 건가.
“기회가 된다면 뉴욕. 뉴욕에서 한 번 연말을 보내 보고 싶어요.”
흘려듣던 팟 캐스트 방송에서 반가운 이름이 나오니 귀가 쫑긋 섰다. 새해를 맞아 각자의 올해 목표, 버킷 리스트를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것. 일주일을 비우기 힘든 프리랜서 방송인이라 엄두를 못 냈지만 언젠가 뉴욕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꿈을 꾼다고. ‘나 홀로 집에 2’의 케빈이 묵은 호텔과 엔딩 장면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뮤지컬, 뉴욕 피자 등. ‘그래, 맞지. 맞아. 그거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못 참고 폰을 꺼냈다. “저 지금 뉴욕에서 듣고 있어요!”라고 댓글이나 달아볼까 싶어서. 하지만 곧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런다고 뭐 달라지나, 하는 생각에.
강에 가까우니 바람이 급격히 매서워졌다. 짧은 바람이 쓰고 있던 모자챙을 휙 들어 올릴 정도로. 반쯤 벗겨진 모자를 고쳐 쓰는데 머리칼 넘기던 엄지 손가락이 오른쪽 귀에 걸려 있던 에어팟을 밀어내 버렸다.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럴 땐 시간이 확실히 느리게 흐른다. 귓가에서 재잘대던 사람들이 일제히 말을 멈췄고 귓바퀴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해졌다. 대략 1.8미터를 자유 낙하 한 에어팟은 땅바닥에 두어 번 튕긴 뒤 곧장 난간을 향해 데굴데굴 굴렀다. 이 과정은 평소의 1/4 정도 속도로 재생됐다. 문제는 그걸 주워야 하는 나 역시 그만큼 느려지는 것. 난간 앞에서 멈추겠지, 하는 기대로 손을 뻗는데 이 녀석이 바람을 탔는지 속도가 줄지 않았고 결국 난간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난간 폭이 한 뼘이나 될까. 쪼그려 앉아 손을 뻗은 채로 몇 초간 멈춰 생각했다. ‘그렇다고 설마 다리 아래로 떨어졌겠어?’
검지와 엄지로 난간 아래를 뒤적이는 동안에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간의 경험에 비춰 볼 때 가장 나쁜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으니까. 걱정했던 것보다는 나을 때가 많았으니까. 마침 매끄러운 것이 손에 잡혔다. 꺼내 보니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빛이 났다. ‘그럼 그렇지’ 하고 입김을 불려는데 다시 보니 크기도 모양도 에어팟의 그것이 아니었다. 언뜻 누군가의 이빨 같기도 해서 소스라치며 발 앞으로 던져 버렸다.
에어팟의 동선을 따라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머리 넣을 틈이 없었다. 대신 폰을 들이 밀어 동영상을 찍었다. 바로 아래는 좁은 골목길이, 그 뒤로 낡은 건물이 보였다. 주택가인지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고 가로등도 밝았다. 왼쪽 귀에 걸린 에어팟에서 연결, 해제 알림음이 반복되는 것을 보니 다행히 강물에 빠진 것은 아닌 듯했다. 그게 과연 다행인가 싶다만.
찾으러 갈까, 단념하고 브루클린 집으로 갈래? 시간은 늦었고 집까지는 한 시간이 더 걸린다구. 오늘은 이미 충분히 걸었어. 빨리 가서 피넛 버터 월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을 뿐이야. 짐도 싸 둬야 해. 작년 유럽 여행부터 내내 걸고 다녔으니 이제 기분 좋게 보내 줄 때도 됐지. 냉정히 생각해 보자고. 일직선으로 떨어졌다면 저 골목 어딘가 있겠지만 다리 난간이나 가로등에 부딪혔다면? 다시 보니 나무도 한 그루 있네. 그래 다 피했다고 쳐. 무사하긴 할까? 높이가 50미터는 돼 보이는데. 있으면 찾을 수는 있고? 이 밤에 그 작은 걸?
고민하는 사이 지하철 소음, 진동이 몇 번 흘러갔다. 머리는 내내 브루클린을 가리켰지만 걸음은 이미 왔던 길을 되밟고 있었다. 일단은 한 번 가 보기나 하자고. 없더라도 혹 산산조각 나 있더라도 그래야 후회가 없을테니. 한 쪽 남은 에어팟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곡이, 오른쪽 귀로는 자동차와 강바람 그 외 수많은 도시 소음들이 경쟁하듯 울리며 걸음을 재촉한다. 1월 1일 타임스퀘어에 다녀 온 이후 한동안 종일 반복했던 이 도시의 노래.
It’s up to you. New York, New York. (그건 네게 달렸어. 뉴욕, 뉴욕.)
구글 맵에 찍어 둔 사고 지점까지는 40분을 걸어야 한단다. 이미 후회 중인 좌뇌를 달래고 싶었는지 “그간 있었던 일들이나 곱씹어 볼까.”라고 혼잣말을 했다. 이내 온갖 장면들이 좁은 기억의 관을 비집고 나와 밤하늘에 쏟아진다. 그래, 여기 온 날에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일단 가 보는 거지 뭐, 라고. 그러고 보니 그때도 뭘 잃어버렸었다. 두 달 하고도 열흘 전, 이젠 까마득한 여행 둘째 날. 배경은 소호였지 아마.
"큰일 났다, 여권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