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와가는데 아직도 전혀 모르겠어?.”
은정은 룸미러로 수련의 눈치를 보며 묻는다.
수련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여기야 뭐 강남에서 다리만 건너오면 오다가다 많이 봤어. 맛집도 근처에 많고…. 근데 내가 왜 굳이 이 동네에 살게 됐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은교의 핀잔이 쏟아졌다.
“거 가시나야 내가 처음부터 그냥 우리집 근처 알아보라 캤는데 니 가 여그가 월세가 싸다고 느그 어무이 손 안벌린다 캐서 온 거 아니야.”
“그럼 나 여기 있을 땐 월세 살았어? 단칸방 이런데?.”
“단칸방은 아이고 암튼 좁아 터져 가지고 집들이 한다 캐가지고 바리바리 싸들고 가뜨만 둘데도 없고 거서 얼마 안살고 나왔어. 그래 니가 기억이 별로 없을끼야.”
수련은 역시 티비에서 자신이 살던 곳을 우연히 보고 또 잊힌 기억의 조각을 찾고 싶어 했다. 겨우 자기가 일 년 전 살던 곳인데 통째로 기억이 없어지다니.
답답할 만도 했으나 그녀들로서는 수련이 차라리 잊었으면 하는 기억이었다. 그래도 임 교수라는 여자가 수련에게 보이는 집착이 뭔가 찜찜하게 느껴졌던 이들은 수련에게 도움이 되고자 직접 기억을 찾아주기로 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참혹하고 잔인한 기억일 지라도..
차는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요란한 소음을 내며 어정쩡하게 골목 어귀에 서있다.
“주차할 데가 마땅치가 않아 유료주차장도 찾기 힘들고 차로 놀이터 앞까지 가보자.”
느릿느릿 차가 골목을 운전하기 시작할 때 수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억이 났어. 기억난다!.”
수련은 이제야 모든 게 기억이 났다는 듯 둘에게 떠들고 있지만 왠지 원교와 현정의 마주친 두 눈빛에는 아련한 동정심이 떠오른다.
수련은 놀이터 위에 집을 그리고 살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림을 그려가듯 더듬더듬 그 당시를 떠올리며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고 있다.
“이층집에 초록색 스테인리스 대문, 커다란 돌울타리.. 이름모를 나무가 삐죽 들어서 있고, 정원이 있었어! 그 정원은 주인집 거였고, 이층집도 주인집 거, 나는 그 옆에 달린 작은 원룸. 옆집도 있었어. 한 번도 얼굴은 못봤지.. 조용한 사람들인 줄 알았어. 그런데 갑자기 누가 이사 들어왔다니깐! 알고 보니 그전까진 아무도 안 살았던 거야. 그런 것도 다 기억해.”
수련의 흐릿하던 기억들이 점점 확신에 찬 듯 눈빛도 말투도 선명해졌다.
그러나 은정은 결심했다는 듯 은교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수련을 돌아보고 말했다.
“수련아 네가 살았던 곳은 거기 가 아니야 넌 평범한 다세대 주택에 혼자 살았어.”
수련이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계약한 날이 기억난다니까. 그냥 평범한 할머니였어. 이상한 건 너무 많은 계약서였어…. 그래.. 맞아..계약서를 쓰러 갔는데 너무 큰집에 할머니 혼자 계시고..”
이번엔 은교가 거들었다.
“수련아 니 그 얘기도 일 년 전에 똑같이 했다. 우리 다 들었어. 근데 우리 니 얘기 안믿은거 아이다. 니 미쳤다 생각 안 했다. 진짜래이.”
은교가 별스럽게 다정스러운 말투로 부들거리는 수련의 손을 잡고 달래준다.
“은교 말이 맞아. 넌 여기 이사온 기억이 통째로 없어졌지만, 그때 사실 우린 가끔 새벽에 네 전화를 받았어.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어. 웃으면서 귀신을 봤다고 하잖아.”
그 말끝에 수련이 얼굴을 바짝 들었다. 한꺼번에 많은 것이 쏟아져 들어온 표정이었다.
“기억나! 확실히 봤어. 얼굴이 지저분하고 새까만 여자. 몸이 퉁퉁 부은 벌거벗은 작은 여자아이.. 말도 걸었어. 나한테 자꾸...”
수련은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말에 고조도 잃어버리고 뇌까리기 시작했다.
“무섭진 않았거든. 무서운 건 없으니까. 근데 왜? 내가 잊은 게 또 있어? 내가 왜 있지도 않은 집에서 산 것처럼 기억하는 거야?.”
말하는 도중 놀이터에 다 왔다. 1년 만에 정말 아무도 찾지 않는 쓰레기장이 되어 버렸다. 곧 철거할 것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와…. 진짜네?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이래됐나?.”
“그 사건?.”
“수련아, 놀이터 보고 아무 기억 안 나?.”
“머리가 아파…. 언니 나 가고 싶어. 차라리 그냥 얘기해줘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머릿속에서 싸우는 거 같아.”
은정이 급하게 시동을 다시 켰고 차를 돌렸다.
“그래 그게 좋겠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이들은 수련이 알아야 할 최소한의 얘기를 전달했다.
“그때 니 이사오고 얼마 안되가 새벽에 이상한 소리 씨부려 대니까 걱정되가 찾아가봤어. 근데 니 가 집에 없는기야. 동네가 좁아가 금방 찾았어. 놀이터에 디비져 있더라고. 새벽에 전화가 오면 여지 없이 놀이터에 있더라고. 누워있을 때도 있고 앉아있을 때도 있고.. 우리는 다 이해했다. 우리한테는 티를 안냈어도 충격이 컸겠다.. 싶었지. 아버지가 갑자기 그리 돌아가셨으니..니가 또 울매나 아부지를 따랐노..니가 집 나온것도 다 이해한다.”
수련의 아버지는 경찰이었다. 복무 중 범인에게 살해당해 돌아가신 지 2년이 다 되어 간다. 범인은 아직 잡지 못하였다.
“다음엔 내가 얘기할게. 어느날 새벽엔 조금 달랐어. 네가 울고 있었어. 심상치 않았어. 바로 놀이터로 갔더니…. 네가 피범벅이 되어있었어.”
수련이 잠시 멈칫하더니 얼어있던 자기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애써 기억하려고 하지 마. 좋은 기억도 아니야. 네가 다친 것도 아니고. 너는 그저 한 명의 여자아이를 구했어. 거기까지만 알자 응?.”
수련은 눈이 쓸려나가도록 세게 눈물을 닦아내고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천천히 눈을 굴리다 섬뜩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설마 누구를 죽였어?.”
은정이 단호하게 말하며 핸들을 움켜쥐었다.
“아니 김수련 넌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은교의 꼭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수련이 뭔가 기억을 해내려고 눈을 질끈 거리면 머릿속이 고장난 티비처럼 치지직 거리며 장면 장면만 떠오를 뿐이었다.
“내가 벌을 안 받은 거 보니, 정당방위 뭐 그런 거였어?.”
“응 맞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었지. 그리고 넌 한동안 그 집에 관해서 얘기했고 놀이터에서 왜 네가 자주 발견됐는지 우리가 같이 확인했었어. 동네 사람들도 만나고 네가 말한 그때의 날짜 기사들도 국립도서관까지 가서 다 찾아봤어. 근데 놀랍게도 네가 말한 그대로였어. 놀이터가 생기기 전에 이층집이 있었데..”
수련의 머릿속에 아련하게 새겨지는 또다른 기억들이 다시 수련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집에 대한 건 다 기억이 나. 거기 일본 사람들이 살았어. 아주 예전에 이층집을 짓고 마을에 가장 가까운 우물을 독차지하려고 굳이 담장을 치고 살았지. 그리고 한국 사람이 들어와서 산 거 같아. 괴팍한 노인네들 며느리를 매일매일 괴롭혔어. 결국 여자는 미쳐서 7살 난 딸을 우물에 던지고 자기도 떨어져 죽었어. 그 우물을 막고 거기다 원룸을 두 개를 지었어. 거기서 얘기가 끝났으면 좋았겠다….”
말을 마쳐가는 수련의 커다란 눈이 인형처럼 흔들림도 없이 허공을 바라보다 그대로 얼음이 돼버렸다.
‘이제야 알았어. 그 모든 기억은 내 것이 아니었어….’
이 순간 수련의 머릿속은 휘몰아치는 파도를 만난 듯 정신없이 철썩이고 있다.
“뭔데? 또 뭐가 있나? 그때도 거까지만 말했는데 뭐가 또 기억났나? 무습다. 우리도 니 가
외상후스트레스 뭐 그런 건 줄 알고 아니라고 증명 해줄라꼬 동네사람 잡아다가 죄 물어봤는데 니가 말한거랑 똑같이 말하는기야. 그래가 우리는 니가 귀신에 쓰였나 얼마나 걱정이 됐는데.. 느그 어무이 는 말할 것도 없고….”
은교의 말을 은정이 현명하게 잘라버렸다.
“어머니 얘기는 하지 말자. 수련이 마음만 더 복잡해지겠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수련은 심장을 조여오는 고통을 꾹꾹 눌러 담고. 지훈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제 단 하루도 그 사람 없이 못 살겠네….”
“뭐라노 이가시나야 우리가 있잖아. 걱정마라 니 어디로 튀뿌러도 내가 밧줄로 단디 묶어놓을라니까 걱정마래이.”
수련은 옅게 웃으며 은교의 어깨를 꼭 잡고
고마움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내가 피투성이일 정도였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누가 누굴 걱정해? 그딴 새낄 왜 걱정해?.”
“그래 니가 뭐한다꼬 그딴 새끼를 걱정하고 자빠졌노? 돌았나?.”
“기억이 안나. 피 냄새가…. 비린내는 기억할줄알았는데.”
<‘그래.. 기억 안나겠지.. 김수련..’>
이를 갈고 있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수련을 향한 저주가 가득하다….
00 교도소
얼굴과 목에 커다란 흉터가 있고 눈동자가 희끄무레한 비쩍 마른 한 재소자가 허연 얼굴로 정신없이 다리를 떨며 넋이 나간 표정으로 수갑이 채워진 손을 들어 손톱을 물어뜯고 지훈의 앞에 앉아 있다.
“그렇게까지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왜 그랬지.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성인 여자한테는 관심이 없는데….”
묘하게 기분 나쁜 반성도 아닌 빈정대는 말투였다. 지훈을 마주한 이 남자는 지훈을 갖고 놀려고 하고 있다.
“왜? 억울해? 너 그날 그 성인 여자한테 안 뒤진 게 다행인 줄 알아.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재소자. 유경렬.
지훈이 더는 봐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서늘하게 물었다.
“왜 벌써 다 잊었어?.”
지훈은 여유 있게 다리를 꼬고 경렬의 잊을 수 없는 끔찍했던 그날 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섬뜩한 그 여자의 얼굴을 하고 그때처럼 날이 바짝 선 칼을 든 것처럼 손가락을 세워 경렬의 상처를 향해 휙휙 엑스 자를 긋고 마지막으로 그가 들었던 소름 끼치는 한마디를 던졌다.
“가지마!.”
그리고 그때 그 여자처럼 입이 찢어지도록 씨익 웃었다..
경렬의 얼굴에 순식간에 공포가 서렸다.
그날 밤의 피비린내가 전신을 감쌌다.
“네가 그걸 어떻게….”
경렬은 자기 목과 턱에 상처를 긁기 시작했다.
지훈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긁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다 내 잘못도 아니야 그년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그년은 숫처녀도 아닌 년이 무슨 반항이 그렇게 심하던지 그러니 내가 칼을 꺼냈지, 어찌 보면 내가 정당방위야 그년 날뛰는 통에 내가 뒈질 뻔했다니까.”
정신없이 자기 목을 긁어대며 뻔뻔한 말을 뱉어대는 경렬을 보며 지훈의 표정이 한순간에 큰 파도를 만났다. 덜덜거리는 손을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붉은 타이를 다시 꽉 묶었다.
미간의 온 감정이 집중 되어있는 듯 크게 내 천 자를 긋고 시뻘게진 눈을 부릅떴다.
지훈은 마치 벌어지려는 자신의 입을 막으려는 듯 긴 손가락으로 자기 턱을 움켜잡았다. 필사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누르려는 제스처였다.
“널 살리라고 보낸 그녀다. 자신을 범한 악인도 구명하고자 한 그녀의 뜻으로 여기까지 왔건만, 지금 난 한낱 인간의 몸인지라 그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다. 너는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거다.”
“무슨 개소리야? 사지육신 멀쩡하고 아픈 데도 없어 날 괴롭히는 사람도 하나도 없다고 내가 얼마나 또라인지 다 알고 있거든.”
“네가 더 잘 알겠지. 인간이 잠을 안 자고 얼마나 버티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미 너는 한계에 다다른 거 같은데. 벌써 볼 거 못 볼 거 다 보지 않았어? 네가 인간으로 죽어 삼도천을 건널 수 있게 해달라 간곡히 부탁하여 널 괴롭히는 악귀만 걷어 가려 했건만…. 악귀에게 잡힌 인간의 혼은 삼도천을 못 건너지.”
남자의 희끄무레한 길쭉한 눈이 드디어 왼쪽 오른쪽 어깨로 찢어졌다.
“그..그럼.. 너도 이게 보이는 거야?.”
당연히 보인다는 듯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보며 입은 비틀고 눈은 찡긋거리며 누군가에게 지시라도 하는 듯했다. 그리고 경렬을 죽일 듯 쏘아보았다.
“그 더러운 주둥이와 반성을 모르는 추악한 악귀보다 더한 너를 어찌하여 구제해달라고 하는지…. 지가 지장보살이야 뭐야? 난 못해!”
지훈은 공포에 떨고 있는 경렬을 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미 한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로 옥살이하고 나온 소아성애자였던 이 쳐 죽일 남자는 출소 후 바로 또 여자아이를 한 명 납치 감금하였고 죽이기 바로 직전 수련에게 발견되었다. 놀이터 근처 작은 반지하였다.
‘절대 성인 여자에게 는 발기도 되지 않는다’
‘여자를 강간한 것은 무죄다.’
라고 항변했지만, DNA는 슬프게도 수련의 성폭행을 증명하고도 충분했다.
DNA가 나오자 남자는 성인 여자가 7살 여자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도망치는 자신을 붙잡고 칼로 난도질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진술이고 심신미약을 핑계 삼으려는 주장일뿐이라는 판결을 받고 중형을 선고받았었다.
그놈은 가지 말라고 남자를 붙잡았던 귀신과 남자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아이의 원귀가 양쪽 어깨에 붙어 잠이 들만 하면 깨우고 잠이 들만 하면 깨워서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떠들었다.
사람은 보통 72시간 이상 잠을 못 자면 환각 환청 환시가 보이기도 한다.
그저 그놈의 수면 부족과 죄책감이 불러일으킨 망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훈은 그저 기름이 붙은 집에 불씨 하나 던지고 온 것뿐일지도. 그러나 경렬의 비명이 한동안 교도소 안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그러나 그것은 지훈의 말처럼 그날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멈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