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표정으로 짐을 정리하고 있는 수련.
반면 가영은 평소의 침착함이 온데간데없다. 모니터를 뚫을 듯한 기세로 부들부들 떨며 날카로운 시선은 화면에 고정한 채 쉼 없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네가 짐을 왜 싸. 왜 도망가냔 말이야!.”
애꿎은 수련에게 빽 하니 소리를 질러버렸다.
수련은 그녀의 지금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닌지라 애써 웃어 보였다.
“헤에~ 교수님 저 정말 괜찮아요. 저 때문에 교수님까지 이상한 소리 들으면 저 정말 그땐 못 견뎌요. 미친년 소리 안 들으려고 교수님 밑에 숨어있었던 거뿐이에요. 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미친년이라는 걸 알아버렸으니, 이 자리에 미련도 없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누구나 찌르면 아픈 법이다. 게다가 이렇게 아는 얼굴 아는 손들이 찔러대면 그 상처는 가슴에 새겨진다.
학교 게시판에 익명의 글이 올라왔다. 김수련 학생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상담할 수 있느냐는 항의였다. 그저 지워버리거나 신고해 버리면 그만이었을 내용이지만 중요한 것은 상세한 진료 기록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부분이 임 교수를 폭발하게 했다.
누군지 글쓴이를 밝히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타인의 상담 기록을 공개하는 것도, 그것으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도, 법적인 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미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소문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가영이 드디어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굴러다니던 여러 가지 해답 중에 하나를 찾아 갈무리하고 후- 짧은 한숨을 내뱉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김수련. 너한텐 상담가 자질 따위 없어도 돼. 애초에 상담가가 꿈이었어? 아니잖아. 시간은 좀 아깝겠지만. 너 똑똑하잖아. 이제부터 상담이 아니라 연구를 해. 인간의 기억, 뇌, 좋아하는 거 뭐든지! 빙의 현상과 다중인격을 바라보는 심리적 관점 어때? 다른 뭐라도, 네가 잘하는 거, 네가 알고 싶은 거, 그걸 연구하고 증명해. 뭐든 최대한 도울게. 논문을 준비해.”
수련이 잠시 가영의 말을 곱씹어 들었다.
“교수님이 왜 이렇게까지 절 도와주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저 자르신 거는 맞죠?.”
가영은 잠시 수련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고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다시 수련을 바라봤을 때는 평소 가영의 얼굴로 돌아왔다.
“아이고…. F처럼 말해줄게. 난 나에게 난데없이 날아든 공을 피하고 싶지 않아. 어떤 공놀이든 피하기만 한다고 승부가 나는 경기가 있니? 맞받아 치든가 뺏어 던지든가 갖고 튀던가…. 피하기만 해서 끝나는 게임은 없단 말이야. 널 자르는 게 아니고 네가 상담받았던 건 인정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너도 인정해. 그런 너를 연구해. 그럼 되잖아. 그게 죄야? 그게 불법이야?.”
수련은 가영의 말을듣고 깊은 공감의 표정을 지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이 왜 교수님한테 날아들었다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수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럼, 저 막 나가서 나 미친년이다. 나에겐 수많은 자아가 있다 막 그러고 다녀도 돼요?.”
가영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우…. 이 미친…. 아무튼 무응답으로 응답하고 있어.”
가영이 그 말을 끝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 그래도 이렇게 저만 두고 가시면….”
수련은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속은 매우 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하호호 하던 선후배들이 자기를 피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눈물이 떨어질 거 같은 것을 겨우겨우 참아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은교와 통화 중에 울컥 눈물이 나왔다.
“이 미친, 어떤 년이고? 어떤 년인지 몰라도 내가 가서 머리채를 잡아 다 쥐뜯어뿔라. 울지마라 가스나야 니 또 멘탈나가면 우찌 될까봐 가슴이 철렁한데이. 니어데고?.”
“집이긴 한데. 어떤 년인지는 어떻게 아냐? 놈일지도 모르잖아. 잡아챌 머리도 없는 대머리 아저씨일지도 모르는데.”
“아..그그..그거는 보니까는 상담심리학과는 여자가 많아. 여초야. 그라고 니처럼 예쁜 아가 없어서 그래서 그런기야. 시기심,질투심! 아무튼 빨리 대충 예쁘게 꾸미고 나온나.”
수련은 전화를 끊으면서 구시렁거렸다.
“대충 어떻게 빨리 예쁘게 꾸미라는 거야?.”
결국 이렇게 또 삼총사는 모였다. 울적한 수련을 달래주러 모인 것 치고는 꽤 요란하게 차리고 나온 이들을 보고 수련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뭐야? 곱창집에서 소주나 한잔할까 했더니 뭐 이렇게들 차려입고 나왔어? 나 빼고 어디들 갈려고 했던 거였어?.”
“아이다 아이다. 원래가 니도 끼여야 하는 자린데 마침 전화했더니 니가 울고불고 해가 안 나올 거 같길래 그냥 부른기제. ”
은교가 입을 쭉 내밀었다.
“그래~ 네가 요즘 만나는 사람 있는 거 같다고 원교가 안 놀아준다고 하더라. 맞아? 아니 우리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여전히 솔로일 널 위해서 특 에이스로 준비를 다 해놨는데?”
은정이 동생들에게는 잘 꺼내지 않던 비장의 애교를 짜내며 수련의 팔짱을 경찰이 범인 검거 하듯 야무지게 움켜쥐고 차에 태웠다.
“뭐야 또 수컷들 만나러 가는 거야?
나는 노메, 청바지 컨버스 잠바때기. 자기들끼리만 차려입고…. 어디 가는데?.”
“수련아~ 니는 안꾸며야 이쁜기라. 꾸미면 더 이상해. 대포집 아줌마 같애. 젓가락 두들겨야 할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 수수하고 이게 잘 어울려.”
은교가 수련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옷매무시를 다듬어줬다.
“언제는 쪽팔려서 같이 못 다니겠다더니….”
툴툴대면서도 이들을 따라 들어간 곳은 강남의 한 가라오케였다.
문이 열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 셋이 동시에 번쩍 일어났다.
수련이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휘익~하는 휘파람을 절로 내보낼 정도로 강남 최고의 미남들만 모여 있었다.
수련이 자리에 앉기 전에 은교에게 소곤댔다.
“뭐야? 오늘 내 생일도 아니고?? 선수들이야?.”
은교가 전기라도 감전된 듯 부르르 떨며 매운 손을 들어 수련의 엉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아이다 가시나야. 씨잘데기 없는 소리해가 차려놓은 밥상 또 엎기만 해봐. 쯧! 언니가 일본에서 알던 동생이고 그 친구들이라 카데. 우리한테는 한 살 오빠들이다. 다 잘나가는 집 안 아들이니까는 오늘 잡아 묵고 결혼까지 직행 하는기야.”
늘 쓸데없이 원대한 포부가 강직하기까지 한 은교.
수련은 자꾸만 잠잠한 핸드폰을 꺼내보다 술을 홀짝이기를 반복했다. 여러모로 속이 쓰린 날이었다. 쓰린 속에 더 쓰린 술을 내려보내 위벽을 갈아 위가 아픈지 마음이 아픈지 차라리 헷갈렸으면 했다.
평소답지 않게 남자의 목에 팔을 걸고 끼를 부리며 찰싹 달라붙어 있는 수련을 은교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수련이 노래를 한다. 제목은 <그남자그여자>
“모든 걸 다 준 데도 안 가져간~그 새끼~
내 전부를 거부했던 개새끼~
한때는 나를 정말 사랑했단 쌉새끼~
다 믿었었어! 쪼다 같이~
남자는 다 쓰레긴 가봐~.”
수련의 감정이 듬뿍 실린 초반 도입부의 다들 집중해서 듣고 있다가 엄청난 개사의 모두 뒤집어지게 놀랐다.
가장 놀란 건 역시 옆에 있던 은교 였다.
“뭐야? 저거 우리 몰래 연애 하고 우리 몰래 차인 거야?.”
은정과 은교가 서로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더니 수련이 노래를 하는 사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웨이터에게 빈방 하나를 빌려 그 안에서 극도로 은밀하고 비장한 대화를 나눈다.
“언니 정말 이 방법밖에 없어?.”
“네가 더 잘 알잖아. 미국에서 네가 시험도 해봤다며. 이제 와서 마음 약해지지 마. 우리가 복수 할 상대는 쟤가 아니야.”
“그래 그러니까 더 다른 방법이 없을까?,”
“있지. 포기하는 거. 잊는 거…. 할 수 있어? 그럴 수 있어?. 저건 저렇게 다 잊고 잘사는데 우리는 잊었어? 잊은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어? 앞으로도 그럴 수 있냐고.?”
윽박지르듯 쑤시는 은정의 말에 은교는 무겁게 고개를 흔든다.
“언니 말이 맞아. 잊으면 안 되지. 잊을 수 없지. 저 괴물을 반드시 우리가 없애버려야 해 부수고 으깨야지. 모두를 위해서.”
은교의 흐릿했던 눈에 살기가 돌았다.
한편 집으로 돌아온 가영. 자신을 반기는 지희를 가볍게 밀쳐내며 서재로 들어가 앉았다.
곧장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이미 정리된 대사들을 한 번 더 입안에서 굴린다.
졸졸 따라 들어온 지희가 사랑스럽게 어깨를 매만지다 가영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순간 가영의 미간이 단숨에 찌푸려졌다.
“이 어중간한 단발 우리 그냥 잘라버릴까?.”
지희는 왠지 신이 났다. 가영은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는 지희의 손을 뿌리치며 낮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남자를 만나지 그래?.”
지희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토라진 입술을 앙 다물고 가영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가영은 떠올렸다 수련의 밝고 투명한 목소리.
“교수님 저 중학교때 칼머리랑 비슷해요. 졸라 멋있어. 센 언니 같애 멋져멋져!!”
누구를 치켜세우려고 빈말하는 법이 없는 그 아이가 유독 가영의 턱선을 따라 내려오는 보브컷을 좋아했다. 그 후로 가영은 단 한 번도 스타일을 바꾼 적이 없었다.
결국 준비했던 최선의 배려가 담긴 이별을 전하는 가영.
“결국 떠날 사람은 떠나게 돼 있어. 남을 사람은 남게 되어있고. 그게 누구든 결국은 언젠가 모두가 떠나간다는 것도 이미 정해진 일이야. 내가 먼저 떠나든 지희네가 먼저 떠나든.”
지희의 입술이 바들거렸다.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 이었다. 눈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마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가녀린 손으로 가영의 떨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속삭인다.
“내 사랑 이상한 말 하지 마. 머리가 어중간하게 자라서…. 나도 자기 이 헤어스타일이 제일 좋아.”
가영의 눈빛은 벌써 차갑게 식어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낮게 대꾸한다.
“그 손 치워. 내 손이 다시 네 손에 닿는 게 싫어. 그러니까 네가 치워 네가 싼 똥 내가 치우고 왔으니까 그 더러운 손 내 얼굴에서 당장 치워!.”
지희의 얼굴에서 분노의 감정과 후회의 감정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허! 결국 그거였어? 고작 그년 하나 때문에 날 이렇게 한순간에 차버리는 거야?.”
무심한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드디어 마주한 가영의 눈은 무자비 하리 만큼 단정했다.
“아닌데? 너 때문인데? 사랑밖에 몰랐고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사랑스럽던 너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어. 네 눈에 추잡하고 더러운 욕심이 이글거려 끔찍해. 거울 좀 봐 지희야 네가 얼마나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가영은 이토록 가혹한 말을 한 톤도 올리거나 내리지 않고 그저 말했다. 깍지를 낀 두 손을 풀지도 않았으며 눈썹을 들썩이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고갯짓으로 맞은편의 거울을 가리켰을 뿐이다.
지희는 가영의 말끝에 무심코 맞은편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봤다. 분노에 이글거리는 자기 얼굴을 보고 결국 참지 못했다.
“이아야야야야야!!!.”
지희는 손에 잡히는 데로 거울을 향해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온갖 물건을 다 부수고 집어 던졌다. 힘에 부칠 때까지 모든 걸 다 망가뜨렸다.
그러다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아 여전히 얼음처럼 굳어있는 가영을 씩씩대며 쏘아본다.
그녀가 모든 걸 다 쏘아 붓도록 내버려둔 가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나는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았을지도 몰라 아니면 둘 다 아니었을지도. 나도 수련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에 빠진 건 아니야. 오히려 두려웠지 내가 가장 증오하고 무서워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내 앞에 데리고 왔거든.”
지희가 눈을 크게 뜨며 발악하다 울먹이기 시작한다.
“그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야? 그 얘기를 나더러 믿으라고? 어떻게 심리학 교수라는 사람이 이래? 그딴 얘기들이 어떻게 헤어질 이유가 돼? 어떻게 내가 아닌 걔여야 할 이유가 되냐고….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이별을 말해?.흑흑...”
“믿든 안 믿던 사실이야. 그러니까 난 그 애 어디가 좋았던 게 아니야. 어디에 반하게 아니라고. 이쯤에선 내가 언제부터 뭣 때문에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게 궁금해야 하지않니?.”
드디어 의자를 돌려 지희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당연하게도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지희는 머뭇거렸지만 대답하려 했다.
“그..그건.나.나처럼..”
“아니!아니지. 어떤 동물이 쌍을 이루고 살아도 똑같이 생긴 건 없어. 아무리 죽고 못 사는 사이여도 그 사랑의 무게는 절대 똑같을 수 없다고. 네가 뭘 알아? 나는 그냥 김수련이라는 존재가 남자든 여자든 사랑 했을 거야. 하필 김수련이 여자였기 때문에 내 시작이 그렇게 된 거뿐이야.”
창백해지던 지희의 얼굴이 다시 용암처럼 이글거리더니 마지막 가영의 말을 듣고 날뛰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미쳤어!!! 거짓말!!! 내가 받을 상처는 생각안해? 당신한테는 정말 그 여자밖에 없어? 나랑 있던 시간은? 난 사랑한 적 없어 정말?!!.”
지희가 주먹을 쥐고 있는 힘껏 가영을 때리고 있다. 가영은 묵묵히 참아주고 있다.
지희가 갈라진 목소리로 이제는 울먹이며 빌기 시작한다.
“나 벌주려고 그러는 거지? 내가 잘못했어…. 내가 이렇게 울면서 빌잖아. 잘못했어. 질투에 눈이 멀었어. 한 번만 넘어가 주라.”
지희의 사랑은 처절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확실히 네가 수련이를 닮아서 이 집에 들였던 거 같아. 어떻게 이 집에서 내 컴퓨터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단순하고 바보 같은 것도 닮았네. 미안하다.”
“미안해하지 마! 그러지 마! 제발….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수 있어.. 억억.. 당신 사람이야? 감정 있어? 헉헉..한 번은 실수 할수 있잖아.. 나를 그렇게 몰라? 당신만 바라보는 나를 그렇게 몰라줘?.”
목석처럼 굳어서 지희의 처절한 몸부림을 외면하는 가영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알아. 알아서 그래. 천지희 너라는 여자를 너무 잘 알아서. 그 미움의 대상이 나여야 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는 수련이를 더 엉망으로 만들 거라는 걸 알아. 너는 나를 미워해야 해. 이게 끝이 아니더라도 나를 공격해.’
가영도 지희와 지내온 시간이 스쳐 지나가며 쏟아지려는 눈물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