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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수희 Nov 26. 2024

9 내가 누구게?

원주율을 외우는 귀신은 없지

한가득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 들고 집으로 들어온 수련과 은교가 막 술판을 벌이려고 할 때 이들은 예상치 못한 은정의 전화를 받게 된다.

뜨밤을 보내고 있어야 할 은정이 이 시간에? 둘의 황당하다는 표정. 그리고 곧 은정이 이들 집에 들이닥쳤다.


그녀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그 새끼 고자야? 어떻게 이렇게 섹시한 나를 두고 그 대단한 게 꼼짝을 안 할 수가 있어?.”


수련과 은교가 동시에 눈을 땡그랗게 뜨고 마주 봤다.


“맞나? 진짜가?.”


“헐..대박..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아님. 너무 섹시해서 오히려 쫄았나?.”


수련의 말끝에 은정이 성훈에게 차 안에서 윽박지르고 기죽였던 말들을 떠올렸다.


“아…. 내가 좀 와일드 하게 나가긴 했지, 그래도 그 대단한 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은정은 정말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심각하게 다시 한번 그 장면을 떠올린다.


“그리 대단하드나? 그기 그 상태에서도 알수가 있드나?.”


은교는 학구열에 불타오르는 학생처럼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그렇대도! 그러니까 내가 더 열 받고 아깝지.”


수련이 둘의 대화에 키득거리다 핸드폰을 자꾸 들여다본다.


오늘 수련은 핸드폰을 자주 봤다.


“이 새끼도 고잔가?.”


수련의 속마음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두 여자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누구누구? 뭔데뭔데? 니 뭐있제? 니 아까부터 요상한 노래 나 불러대고 하는거 보니까 뭐 있어 이가시나, 너 누구있지? 빨리 말안하나?.”


은교는 수련을 쿡쿡 찔러댔고 은정은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협박했다.


“너 말 안 하면 네 핸드폰 물에 빠뜨린다 아니지 요즘은 방수도 되지 13층에서 떨어뜨린다.”


수련은 은정의 말을 듣고 움찔했다. 절대적으로 그렇게 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사실. 나도 누구랑 잤는데….”


“뭐!!!!!!”

“왓더!!.”


두 여자는 자기들의 머리채를 잡고 오열 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수련아 너 맞아? 너 아니지? 지금 누구야?.”


“맞다맞다. 이 가스나 지금 누구 딴 년 기들어왔을수도 있어. 너 이씨 원주율 대라! 수련이같이 또라이만 기억하는 씨잘데기없는 원주율!!.”


“나야 수련이. 3.141592653589793238..”


“맞네 맞네 수련이 맞네 와.. 이거 실화야?

귀신은 원주율을 외울 필요가 없지. 아인슈타인 귀신이 들어온다면 모를까.”


“그래서 그러면 잤는데?. 아니 대체 누구랑?.”


“음…. 이력을 먼저 말해야 하나. 면상을 먼저 공개 해야 하나?.”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수련과는 달리 부들거리면서 달려드는 두 여자는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면상면상! 있나? 사진 있나?.”


은교는 생쥐처럼 찍찍대고 은정은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워 날카롭게 물어댔다.


“당연히 상판대기가 중요하지 빨리 핸드폰 열어! 둘이 사진도 찍었나 봐, 많이 갔네?.”


“아니 뭐. 같이 찍은 사진은 아니고 얘가 좀…. 검색하면 나오는 애라서….”


“뭐??? 니 연예인이랑 뒤집어져 뿐나?.”


은교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으나 은정은 코 평수만 넓히며 왠지 모르게 분한 감정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손짓으로 까딱거리며 수련의 핸드폰만을 원했다.


두 여자는 정말이지 수련의 폭탄 발언에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공식적으로 수련은 28년 동안 그 누구랑도 잠자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그의 영상과 사진들로 가득 찬 블로그를 보던 그녀들은 턱이 빠질 정도로 놀랐다.


“잤는데??? 이 모든 게 완벽하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남자랑 잤는데..???.”


은정은 이제 모든 걸 내려놓은 듯 관람 모드로 들어갔다.


“잤는데…. 걘 그 대단하다는 그놈보다 더 나빠. 우린 손도 안 잡고 정말 잠만 잤어.”


은교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 그럼 뭐하러 한 침대 기들어갔는데?.”


“내가 할말을 은교 가 다했네.”


“그건. 내가 부탁했어.”


수련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에 정답에서 점점 멀어지고 헤매는 그녀들.


“부탁? 같이 자달라고 부탁했다고? 뭐 애원? 사정? 매달림? 그런 거? Oh My~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부탁까지 할 정도로 그렇게…. 아!

수련아….”


은정이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젠 동정의 눈빛으로 안타깝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쁜 놈. 그래도 부르면 언제든지 와.”


수련의 툭하고 던진 한마디를 스파이크로 내리꽂아 버리는 은교.


“뭐? 그건 또 뭐지? 사기꾼 아니야? 이상하고 수상해. 니는 경계심이 없어! 문제야 문제. 니 그 나이 쳐묵고 뭐 얼빠야? 쯧! ”


은교는 알쏭달쏭한 눈빛으로 수련을 쪼아댔지만 수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참으로 수상한 대화가 애매하게 마무리됐다.


같은 시간.

컴퓨터 모니터에 온통 어린 여자아이들 사진을 띄워놓고 혼자 위로를 하고있는 남자의 뒷모습. 마우스를 움직이는 오른 손목을 살아 움직이는 듯 한 마리의 뱀이 휘감고 있다.

머리색은 탈색을 심하게 한 듯 노랗다 못해 하얗다.


다음날 아침-


은교와 은정이 난장판을 만들고 간 집을 청소 하는 수련.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지만 역시나 지훈에게 연락 한번이 없었다.


“나쁜 놈…. 게시판 테러보다 네가 더 속상해. 사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지. 근데 왜 나쁜놈 같지?. 술을 진탕 퍼마시고 누가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지켜달라고 또 전화를 해볼까?”


한참을 이리저리 고민하던 수련은 무언가 결심한 듯 집 안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 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청소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한편 가영은 지희가 짐을 싸는 동안 집에 있기가 괴로웠다.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영의 표정이 봄 눈 녹듯 사르르 녹아들었다.


“대한민국 서울시 안에 있으면 삼십 분 안으로 달곱창 으로 튀어와.”


달곱창-


가영이 곱창집 문을 열자 의외로 수련이 먼저 와서 가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난스레 손을 흔들며 가영을 반긴다.


“교수님~!!!!!.”


냅킨을 쪽지 접듯 접어 수저와 젓가락을 얹어 놓고 물티슈까지 나란히 이미 세팅을 다 맞춰놨다. 그것들을 다 둘러 보고 가영이 눈을 껌뻑이며 묻는다.


“너 설마 음식까지 시켜 놨냐?.”


“네! 모듬으로 시켜놨어요. 소주랑 맥주만 시원하게 마시려고 안 시켰어요.헤~.”


가영은 언제나 이 앞뒤도 없는 한결같고 순수한 수련의 미소 뒤에 어쩔 수 없이 따라 웃게 되는 자신을 깨닫는다. 그러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또 묻는다.


“너 이 앞에서 나 기다리고 있었냐?.”


“음…. 반의반쯤 틀린 거 같아요. 나머지는 맞고.”


“너 내담자한테도 그런 식으로 얘기할 거야? 매사에 그렇게 장난식이면 상담 장면 때도 그 버릇이 나오는 거야.”


“아.. 상관없는데.”


“아…. 너 상담 안하지.”


가영은 상당히 머쓱해졌다. 게시판의 글을 쓴 것이 지희라는걸 처음부터 알았다. 수련의 상담은 단 한 번뿐. 가영에게서 시작되고 끝났다. 그 기록을 갖고 있는것도 가영 뿐이었다.


그랬기에 미안함을 넘어선 죄책감도 있었다.

그랬기에 지희에게 그토록 잔인할수 있었다.


“헤헤 일요일은 아무도 연락할 사람이 없거든요 은교랑 은정언니의 철칙이 일요일은 간도 쉬어야 한다며 일요일은 무조건 잠수예요.

그런 건 또 척척 잘 맞아. 셋이 친하면 한 사람은 쫌 외로운 거 같긴 해요. 맞죠? 어쨌든 대인관계가 매우 협소한 저로선 일요일에도 곱창이 땡기는 이런 날엔 혼자서도 가끔 와요. 그럴 때 교수님이랑 자주 왔으니까, 교수님은 뭐 하시나 생각은 했었죠. 그러니까 3분의 2 정도는 맞추셨다. 요얘기?.”


“넌 전형적인 F야! 너의 대사는 한 편의 영화 같아. 아주 난해한.”


“교수님은 전형적인 T라서 저와의 대화가 싫으세요?.”


“아니 좋아! 난해한 걸 파헤치고 해석하고 싶어. 학구열이 워낙에 높은 걸 어쩌니? 곱창만 땡기는거야? 술은 안 시켜?.”


“이미 말아놨는데요. 아까 제가 얘기할 때..”


가영은 어느새 자신의 앞에 벌써 김이 빠져버린 소맥을 보고 뭐에 홀렸나 싶은 생각에 풉!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창자 좋아하는 수련이 생각나서 이 근처 지나다 전화 해본 거야. 오늘 너 좋아하는 창자 실컷 먹고 술도 실컷 마시고 실컷 떠들어. 너 좋아하는 거 다 해.”


‘난 네가 좋아하는 거만 보고 있어도 이렇게나 행복하다 주책없이….’


가영의 전하지 못하는 속마음.


“저는 일단 이 빈속에 술이 들어가는 기분이 너무 좋아요. 털어 넣기 전에 잠시의 그 스릴감은 뭐랄까? 술이 워터 슬라이딩을 타기 직전에 딱 그 정도의 짜릿함. 그리고 들이부으면 꼬불꼬불 위장을 알코올이 신나게 활주하는 느낌이 싸~ 하면서 교수님은 그런 거 못 느껴요? 일단 그렇게 한번 소독을 해주고 인제 곱창으로 기름칠을 해주는 거죠. 아유 나는 곱창이니 막창이니 창자는 다 좋아.”


아이처럼 신나 하는 수련을 빤히 들여다보고 가영이 신기한 듯 묻는다.



“너는 술이 왜 좋니? 언제부터 그렇게 좋았어?.”


“아마도 태어나기 전부터? 크크크.”


“그 대사는 재미없다.”


“진짜예요. 전 세상에 귀신은 절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거 아시죠? 무당 같은 거 절대 안 믿고! 근데 술안주 삼아 제가 재밌는 얘기 하나 들려 드릴까요? 때는 바야흐로 제가 교수님을 처음 뵀을 그때쯤인데….”


가영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가장 괴로운 건 어쩌면 가영 본인일 것이다.


“얘기해줘. 나 네 얘기 듣는 거 좋아하잖아. 네 난해한 영화 같은 스토리를 해석하며 술과 안주도 있어. 완벽하고 황금 같은 시간이다.”


가영의 진심이었다. 수련의 앞에 앉은 이 시간이 인생의 모든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된 듯

어떤 괴로움이나 방황도 떠다니지 않았다


수련은 그런 가영의 마음은 조금도 모르고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제가 고3 때였잖아요. 집안에서 갑자기 굿을 하게 됐고 저는 뜬금없이 그 굿판을 엎었죠? 그 후로 잠시나마 해리성 인격장애를 겪었고 교수님을 만났죠.? 그날은 정말…. 저도 교수님한테 몹쓸 짓을 했어요….”


입을 삐죽대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련의 표정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가영의 얼굴은 마치 돌진하는 차와 맞닥뜨리기 직전처럼 새하얗게 질렸고 석고상처럼 굳어갔다.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수련이 는 기억하고 있어. 어디까지 기억하는 걸까? 모든 걸 기억한다면 어떻게 내 앞에서 저렇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 그건 아니야. 수련이는 그런 애가 아니야. 절대 그런 걸 감출 수 있는 애가 아니야.’


생각을 정리한 가영은 빨리 그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얘긴 패스하고.”


“네 그럼 자 생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다음 날의 사건 사고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


소주를 한 잔 가득 따라 털어 넣더니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전해가는 수련.


“억지로 끌려갔어요. 엄마도 미쳐가고 있는 건 아닌지. 나한테 정신병이 전염이 된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이상한 무당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다른 무당을 또 찾아간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교수님도 있는데….

마당이 있는 주택이었는데 저희는 집에 발도 못 들여 보고 문전박대를 당했어요.

그뿐이 아니고 어떤 아주머니가 바가지 한가득 소금을 퍼와 뿌리시는데 어찌나 세게 뿌려대시는지 얼굴과 온몸이 따끔거리고 아파서 도망가고 싶었어요….”


수련은 아직도 그 고통이 떠오르는 듯 양팔을 서둘러 쓸어내렸다. 또 소주를 한 잔 가득 따라 부어 털어 마시고 이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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