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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수희 Nov 26. 2024

11 내가 누구게?

네가 올래? 내가 갈까?

수련의 장황하고도 한편의 서사 같았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가영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의문점들이 있었다.

어느새 두 여자 사이의 소주병과 맥주병들이 테이블 위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내려와 줄을 지어 서있다.

“어쨌든 그 할망구는 뭐 굿해라 내림굿 받아라 그런 말씀은 없으셨고요. 대신 이걸 주신 거예요.”

수련은 바지 주머니에 서서 무언가 꺼내 가영에게 들이밀었다.

취기에 잠시 흐트러졌던 가영의 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그 비취옥의 영롱함은 깊은 에메랄드빛 안에 담긴 고요한 무언가가 마치 무한한 세월을 담고 있는 듯 들여다볼수록 그 끝이 없는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옥가락지가 아니라는 걸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걸 너한테 그냥 주셨다고? 계속 너는 가지고 있었고? 그때부터?.”

“아니 사실은 엄마랑 그 할망구는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또 공교롭게도 제 왼손 약지에 딱 들어맞는 거예요. 그치만 여고생이 옥반지라니. 그래도 그냥 플라시보 효과라고 할까? 무슨 일이 생기거나 마음이 불안하고 그럴 땐 가지고 다녀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 거의 가지고 다니죠. 제가 멘탈이 나가면 안된다고 하셨거든요. 그게 바로 제가 태어날 때부터 술을 좋아하게된 이유. 그러니까 삼천포로 많이 빠졌는데 아까 교수님께서 질문하신 대답이 되는 거예요.”

가영이 손사레를 치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아 이젠안돼. 해석불가. 알기쉽게.”

“쉽게? 어쨌든 정신만 꼭 붙들고 있으면 신도 귀신도 못 들어온댔나 못 이긴댔나? 아무튼 정신을 꼭 붙잡아라. 근데 정신을 어떻게 잡아요?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분 말씀 틀린 거 하나도 없는데? 정신을 강화하는 방법은 다양하지. 우리는 강화라는 단어를 쓰는 것뿐이고 그쪽은 좀 더 원초적인 단어를 쓰는 것뿐이야. 근데 네 정신은 누구보다 강해 나도 인정하는 바야.”

수련이 팔짱을 끼고 가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알아들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은 좀 거시기한데 자살하지 말라고….”
“뭐…?”
“그런 시도도 하지 말래요.”
“네가 왜?.”

“그 할망구가 이렇게 말했어요.
네가 왜 강한 줄 알아? 귀신도 사람도 하늘도 땅도 물도 불도 지옥도 무섭지 않아. 죽음도 두렵지 않아. 그런 년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무서울 게 없는 년을 누가 이겨? .”

실눈을 뜨고 구부정하게 하게 할머니 말투까지 쓰는 실감 나는 할머니 연기의 가영이 또 평소에 보이지 않던 폭소를 터뜨렸다.

“근데 제가 그렇게 강하다면 자살을 왜 하겠어요? 모순 아니에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 13층에서 밑을 내려다보면서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해 보면 무섭지 않겠어? 떨어져서 머리가 깨지고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생겼다면 그 상황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거지. 어떤 동기 가 있어야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솔직히 난 모르겠어. 상담가로서 자질 부족이지, 상담가의 기본인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과 이해. 난 안돼. 무조건 자살은 이해 안 돼. 그냥 이해 하는 척하는는거야.”

그런 가영을 보고 수련이 엄살을 부린다.

“나도 싫은데? 나도 무서운데? 그 할망구 사기꾼. 근데 제가 술을 좋아하는 거는 맞췄어요.  술 먹고 고주망태만 되지 말라길래 '술을 아예 안 마시면 되죠!' 그랬더니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거예요. 왜냐고 물으니까 저를 지켜주시는 조상신 중에 굉장히 높으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그렇게 술을 좋아하신대요. 그니까 적당히 조절을 잘해서 마시래요. 그래서 노력중이에요. 그리고 교수님이랑 마실땐 괜찮아요. 여자랑 마실땐 안 나와 걔가 헤헤.”

“걔? 누구?.”

“저한테 여러 가지 자아가 있잖아요. 그중에 하나는 정말 미친년이에요. 술만 마시면 이성한테 그렇게 들이대. 끼를 미친 듯이 부리고 막 구렁이처럼 앵기고 남자만 보면 환장을 해요. 그래서 남자 있으면 술 잘 안 마셔요.”

가영은 갑자기 술맛이 뚝 떨어졌다.
소주를 마시려다 내려놨다.

“왜요 교수님?.”

“하아.. 무슨 자아? 그냥 술 마시면 그러는 사람들 많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수련에게 조언을 해주고 가영은 딴생각하고 있다. 수련에게 이성으로써 자신이 다가가지 못한다는 걸 통감하고 씁쓸함이 몰려왔다.

잠시 가영이 혼자만의 생각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 곱창집의 티브이의 뉴스에 눈이 꽂혀버렸다.

가영이 잠시 입을 다물지 못하고 티브이를 보는걸 수련이 목격하고 고개를 돌려 함께 뉴스를 봤다.

-며칠째 실종된 여아가 드디어 오늘 발견됐습니다. 안타깝게도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뉴스 앵커의 말보다 둘의 눈이 번쩍 뜨인 이유는 아이의 시신을 발견한 곳에 떨어져 있는 새빨간 구두.

-특이할만한 점은 아이가 입고 갔던 옷은 찾을수 없었고 모두 처음 보는 옷과 신발 레이스 양말이었다고 합니다. 아이가 사라진 날 아이를 목격한..-

수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몸뚱이만 일으켜 까딱댔다.

숨을 고르게 쉬지 못하고 헉헉 대기 시작했다.

가영이 급하게 계산을 하고 수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맞아요 저거. 저거 똑같아. 그때 그럼. 혹시..
내가? 교수님 혹시 제 안의 뭐가 나가서 저아이를..,”

가영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수련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네가 왜? 어린아이를…. 너는 아니야! 너는..”

가영은 1년 전 수련이 여자아이를 구하려다 오히려 범인에게 당했던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머뭇거렸다.

“몰라요. 모를 일이에요. 누가 나왔을지 모를 일이에요. 미국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저는 누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한 남자를 죽이려고 했었어요. 그 남자에 대한 증오심 집착. 다 느낄 수 있었어요. 그건 누구예요? 그 사람은 내 안의 누가 그렇게 죽일 만큼 미웠던 거죠? 헉헉.허허허허..”

수련이 과호흡 증상을 보인다. 가영은 급한데로 택시를 잡아 수련의 집으로 수련을 데리고 간다.

차 안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수련의 핸드폰이 아까부터 계속 진동을 울리고 있었다.
 가영은 신경이 쓰여 수련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발신인을 봤다.

“지훈이라는 친군데? 계속 전화하는 거 같은데 받아볼래?.”

수련의 부들거리던 눈꺼풀이 드디어 반짝 떠졌다. 대답도 없이 핸드폰을 낚아채듯 가져가 받았다.

“어. 어.. 어..”

그렇게 수련은 짧은 대답만 이어 하고 곧 전화를 끊었다.

가영은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는 읽을수 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수련의 집앞에는 이미 지훈이 기다리고 서있었다. 수련이 지훈을 보자마자 안기듯 뛰어가는 모습을 가영이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수련아, 나 뭐 챙겨갈 게 좀 있어서. 먼저 좀 올라가 있을래? 괜찮지?.”

지훈이 아이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덜덜 떨고 있는 수련을 안심시킨다.

“어어…. 교수님 오늘 죄송했어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가 볼게요.”

수련이 꾸벅 가영에게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가영은 지훈에게 뚜벅뚜벅 걸어간다.

지훈이 먼저 가영에게 가볍게 목례한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수님.”

“그러게, 그사이에 정말 완전 어른이 다 됐구나. 아니지…. 어른이지. 많이 변했다. 못 알아볼 뻔했어.”

“그동안 수련이 곁에서 챙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가영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말은 이제는 너한테 맡겨라?.”

지훈이 세차게 손사래 친다.

“아뇨아뇨, 그런 뜻 아닙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에서…. 작년 그 사건도 결국 막지도 못한 제가 뭐라고…. 모두 앞에 나설 면도 안 섰어요. 지금부터는 그래도 할 수 있는 거 해야 하는 거 다 해보려고요….”

“흥. 그래, 해봐. 굿을 하든 부적을 쓰든 해봐. 근데 수련이는 아픈 거야. 나는 네 방식을 절대 이해할 수도, 권하고 싶지도 않지만 뭐. 지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믿고 간다.”

가영의 말은 묘하게 차갑고 뒤틀렸다. 무속에 대한 불신과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지훈을 향한 강한 질투심. 스스로 알고 있다.

집으로 들어온 지훈은 소파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떨고 있는 수련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수련에게 건넨다.

“마셔.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신 거야? 술 냄새랑 고기 냄새 때문에 내가 다 배가 부르고 취한 거 같아.”

지훈이 코를 막고 손짓으로 냄새를 날려 보낸다.

어떤 포인트에서 수련이 정신이 들었는지 갑자기 원래의 수련으로 돌아왔다.

“야! 너는 쫌 그 말 좀. 그래? 너는 냄새로 취하고 냄새로 배불러? 그럼, 앞으로 나랑 꼭 붙어 다니면서 내가 먹는 거 냄새만 맡고 살아봐 그러고도 네가 숨이 붙어있으면 너의 그 고약한 직설화법을 받아들여 줄게.”

지훈이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으로 수련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았다. 커다란 덩치에 가려진 수련은 순간 움찔했지만, 기세에 눌리고 싶지 않아서 쪼아보고만 있다.

“그럼, 이제 나 너랑 같이 사는 거야?
네가 올래? 내가 올까?.”

순간 수련은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조각 같은 얼굴에 반짝이고 깊은 두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수련의 얼굴 언저리를 헤매고 있다.

그 밑으로 자연스레 걸린 미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숨이 막혀 왔다.

‘김수련 너 맞아? 김수련! 너 지금 술 마셨어!  쫄보야 나오지 마라! 끼 부리면 뒤진다. 제발.. 오늘 위험하다..아니 저 도깨비가 위험하다!.’

정신을 차리려는지 수련이 괘씸하다는 듯 지훈의 넓은 이마에 박치기를 쾅! 했다.

“아!아야! 왜 그래? 난 귀신한테 밖에 폭력 안 써 너도 이러지 마.”

“너 자꾸 그런 도깨비 같은 상판대기로 순진무구한 표정 지을 거야? 그런 순진한 얼굴로 말은 또 왜 그렇게 거침없이 발라당 까졌지?.”

과하게 씩씩대는 수련과 반대로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어보이는 지훈.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는 도깨비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들처럼 잘생겼고. 말도 세련되고 박력 있게 잘한다. 그런 뜻이구나. 넌 참 좋은 아이야.”
 
말을 마친 지훈이 일어나 거실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수련은 또 자지러지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훈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하며 부들거린다.

“저..저저...저 !! 저건 바보야 천재야? 아우 분통터져!.”

집에 돌아온 가영은 지희와 지희의 짐이 있던 빈자리를 들여다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수련과의 짧은 황금 같은 시간 후에 밀려드는 외롭고 괴로운 현실. 그러나 가영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다시 수련이 꿈을 꾸고 자기에게 주었던 메모를 찾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시뻘건 뱀이 꼿꼿이 서있었다??
뱀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기도 하지.
게다가 토할 거 같이 역겨운 비린내라….’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수련이는 어쩌면 나처럼….”

가영이 괴로운 기억을 꺼내어 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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