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님(恁)의 종말, 겹쳐진 마음
‘어차피 지금 회사가 문제가 아니야, 이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해. 문제! 앗! 그 문제의 시반! 전 팀장 책상 위에 두고 왔다, 나올 때 뒤통수가 뚫릴 정도로 따가웠지만 마빡이 뚫리더라도 그건 챙겨야 해.’
돌아가려 몸을 돌리는 순간 쿵!
“악!”
어딘가 부딪혔는데 분명 벽은 아니고 이 은은한 우드향...! 헉! 전 팀장의 가슴팍!
반동으로 허리가 휘청했지만 그는 정말 벽처럼 미동도 없었다.
대리석처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슈트 위로 떨어졌다.
먼지 털어내듯 내 얼굴이 닿은 부분을 손가락 몇 개로 툭툭 털어내며 나를 향해 비릿하게 웃는다.
“김서희 씨 얼굴이 인쇄될 줄 알았는데, 진짜 공주병이에요? 무슨 자신감으로 쌩얼로 출근을 하지.”
“지금 저 놀리시려고 따라 나오셨어요? 원래는 저도 화장하거든요! 오늘은 아버지 병실에서 바로 출근하느라..”
순간 그의 짙은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아버님이 진짜 편찮으신 거예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뭐지? 또 이런 급격한 온도차이는? 이 사람 생각보다 허당일지도...’
“네, 것보다 저 팀장님 책상 위에 두고 온 게 있는데..”
“이거?.”
그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펼쳐 시반이 꽂힌 봉투를 내밀었다... 가 다시 뺏었다.
“팀장님, 장난치지 마세요. 그거 중요한 거예요.”
“봐달라고 한 게 이거였어요? 서희 씨 얼굴이나 청첩장이 아니라?.”
‘이런 미친.!’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참을 인(忍) 자를 새겨 꿀꺽꿀꺽 삼키며 그를 올려다봤다.
“내가 말이 지나쳤어요. 해서는 안 될 말, 하지 않아도 될 말, 나로선 생각하기도 싫은 말들이 그냥 쏟아져 나왔어요. 미안해요.”
‘뭐지? 요 며칠 내가 이상한걸 많이 봐 왔지만, 이 남자도 만만치 않게 이상하다. 아니, 이상해졌다.'
“어쨌든 아버지 일도 그렇고 개인신상 문제도 있고, 회사는 그만두겠습니다. 정식 사직서는 나중에 제출할게요. 지금은 좀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그거 좀 빨리 돌려주세요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회사를 때려치우면서까지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라..”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헷갈릴 정도의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한다.
“가요 데려다 줄게요. 급하다면서요. 오리배를 타고 갈 생각은 아니시죠?.”
나는 자연스레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걷고 또 걸어서 집에 도착하는 과정을 오리배에 대입시켰고, 15분 컷일 그의 스포츠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어느새 그가 열어주는 차에 자연스럽게 탑승하고 있었다.
나는 집주소를 불렀고, 그가 경로를 저장하는 동안 눈을 가늘게 접으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집에 뭐 숨겨놨어요? 급하게 처리할 일이 집에 있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요. 고데기에 코드를 안 뽑고 온 거 같거든요!,”
“고데기?.”
‘하아, 농담도 안 통하고, 직언도 안 통하고, 이거라고 믿어줄까?.’
나는 시반이 담긴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진실을 말했을 때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집에 도착하고 잠시 어색한 기류가 차 안을 잠식할 때쯤, 결국 나는 시반을 들이밀며 말했다.
“엊그제 보여준 시반이 이렇게 바뀌었어요.’
”시반이요? “
난 사슬과 죽을뻔했던 그 과정 빼고 모든 걸 설명했다.
이 자에게 시반에서 금빛 쇠사슬이 튀어나와 내 심장과 목을 움켜쥐어 그대로 숨이 멎어 죽었고 그렇게 먹물에 빠졌다가 괴이한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살아났다는 얘기를 한다면, 상담이 아니라 바로 정신병원으로 차를 몰 것이 분명하니까..
그는 정말 신기하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합리적 추론을 해보자면 이 현대의 시반이라는 것은 서희 씨의 필체가 맞고 게다가 얼마든지 똑같이 만들어 새로 쓰면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200년 전의 시반이라는 이건 정말 신기하네요, 어라? 서희 씨 이거 보여요? 뭐지?.”
이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 같던 남자의 손끝이 부들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의 눈길을 따라 현재의 시반을 바라보던 나는 차가 들썩일 만큼 튀어 올랐다.
“으악! 이게 뭐야?.”
집행이라는 글자 외엔 공백이었던 내 시반, 그 8월의 끝자락 칸에 어느새 낯익고 불길한 글자가 잉크가 번지듯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선명하게 새겨진 글자 하나 맨 위의 유(酉) 자가 흔들리듯 춤추듯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금 몇 시죠?"
"여섯 시 다 돼가요."
"정말 닭의 시간(酉時)에 또 무언가 바뀌는 건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에 있던 시반을 받아 새로 새겨진 글을 읽었다.
“임…… 아니, 님종(恁終)?”
나직한 내 읊조림에 전 팀장이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임종이요? 아버지를 살려놓으니 이제 또 누가 죽는다는 겁니까?”
“죽긴 죽나 봐요. 이번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데요.”
그의 미간이 단번에 좁아졌다.
“왜 벌써부터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하죠? 어제 선본 남자가 단단히 맘에 들었나 봅니다.”
이 남자 뭐지? 감정 없는 AI 냉혈한인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기복이라고 불러도 되겠어. 감정기복이..
“공주병에 이어서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겠네요. 사실 선본다는 거 거짓말이었어요. 상식적으로 말이 돼요?.”
그의 몸이 순식간에 내 쪽으로 쏟아졌다.
“그렇죠? 말이 안 되죠? 그러니까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니까, 내가 이러는 것도.”
그가 마른 입술을 훑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 그건 또 무슨..”
“아니 아니에요 그것보다, 임이 아니라 님…… 종?”
“여기 쓰여 있는 글자는 임종할 때 쓰는 임할 임(臨) 자가 아니에요. 마음(心) 머리(田)의 변형체를 얹어둔 글자, 이건 제가 한자를 외우는 방식이에요. 마음과 머리에 가득한 사람, 사랑하는 님 외에 뭐라고 읽겠어요? 그러니 이 글자는 님 임(恁) 자죠. 그러니까 이건 임종이 아니라 ‘님의 종말’이에요.”
나는 시반의 글자 밑에 찍힌 작은 점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두음 법칙. 원래 ‘ㄴ’이나 ‘ㄹ’로 시작하는 한자들이 단어 첫머리에 오면 소리가 변하잖아요. 전 어릴 때부터 그게 싫어서, 제 글씨에는 꼭 원래 소리로 읽으라는 표시로 밑에 점을 찍어뒀거든요. 이건 제가 님 이라고 읽으라고 친절하게 표시해 둔 거예요. 내 님의 종말이라...”
“서희 씨는 이걸 쓴 기억이 없다면서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긴 한 거예요?.”
무언가 확답을 받으려는듯한 그의 마지막 물음에 힘이 실렸다.
"있으면 제가 이 중차대한 사건을 팀장님이랑 여기서 의논하고 있겠어요?."
갸우뚱하는 그의 표정은 설명할 순 없지만 묘하게 기분 나쁘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부륵부륵, 부륵부륵-
“아 제 전화요, 잠시만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최태형작가님-
“이를 어쩐다, 회사 때려치웠다고 어떻게 말하죠?.”
곤란한 표정으로 팀장을 바라보는데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조용히 혼잣말하더니 점층적으로 화를 내며 물었다.
“최태형작가님... 님... 님??? 김서희 씨 핸드폰에 제 이름은 뭘로 저장했습니까?.”
“네?! 그게 왜.. 궁금... 아니 갑자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전 팀장으로 끝나는 자기 이름에 발작할 것이 분명하니까.
내가 변명거리를 찾아 눈알을 굴리는 동안 잠시 조용했던 핸드폰이 또 부륵부륵 울리기 시작했다.
“아 또 최작가님인가 보네.. 어라?.”
내게 전화를 걸고 있는 그의 싸늘한 눈빛과 핸드폰 액정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세 글자. -전 팀장-
“나는 그냥 전 팀장? 최태형만 님입니까? 당신한테 그놈의 '님' 소리를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 남자 '왜' 이렇게 '진'지할까?
“아이 팀장님 그런 말이 어딨 어요?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그때, 우리의 대화를 비웃듯 손에 쥔 핸드폰이 다시 한번 세게 진동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고 동시에 나는 헉! 하고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참지 못했다.
핸드폰에서 시작된 미세한 떨림은 살갗을 타고 파고들어, 손목을 옥죄고 있던 사슬에 닿는 순간 기괴한 공명음을 냈다.
설컹!-
그와 나는 이 기묘한 타이밍에 떠오른 휴대폰 저장 이름 하나에 꽂혀 잠시 멍하니 서로를 바라봤다.
[ 님 ]
화면에 뜬 외글자,
크르렁,카랑 쇠사슬은 짐승처럼 숨 쉬며 다시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