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영화를 마치며
영화 <하이라이즈(HIGH-RISE)>
감독 벤 웨틀리│출연 톰 히들스턴, 제레미 아이언스, 시에나 밀러, 루크 에반스 등 개봉 2016.03.18(영국) | 장르 SF, 액션, 스릴러 | 국가 영국 | 러닝타임 119분
소설 <하이라이즈(HIGH-RISE)>
저자 J.G. 발라드 | 출판 문학수첩 | 출간 2016.03.14 | 쪽수 336
소위 설국열차의 수직 판이라 말한다. 그 말이 맞다. <하이라이즈>보단 봉 감독의 <설국열차(2013)>가 더 일찍 개봉했고 한국에서 좀 더 대중적이다. 1975년, 영국의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치 신도시와 같은 입지에 위치한 주상복합 아파트는 그들만의 외딴 세상이다. 70년대 중반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현대적인 디자인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40층의 높이를 가진 아파트는 20세기에 보기 힘들었다. 조금만 가면 바로 런던과 더 많은 인프라를 가진 건물이 즐비한데, 그들이 사는 하이-라이즈엔 텅 빈 황무지밖에 없다. 애초부터 고립된 이곳에 놓인 5개의 아파트는 마치 오므린 손가락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영화 <하이라이즈(HIGH-RISE)>는 J.G 밸러드의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된 영화며 톰 히들스턴 주연으로 제레미 아이언스, 루크 에반스, 시에나 밀러가 출연한 영화다. 이는 2016년에 개봉했으며 당시 필자는 영화로 먼저 접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언제나 그렇듯 간단하다. 내 마음에 든 영화를 보았고 취향에 맞아 원작 소설도 눈이 갔다.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글을 써본다.
영화의 평은 대체로 좋지 않다. 영상미가 있다고 하나 관객에게 불친절해 이해 가지 않는다는 평이 주를 이뤘고, 인물들이 왜 이곳에 자신을 가두는지 심리를 이해할 수 없는데, 이는 원작 소설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영화가 단편적으로 전달한 일련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여러 명의 승무원과 복도 위에서 왜 춤을 추는지, 닥터 랭에게 팽본 박사가 비행 항공 수업 차원으로 왜 그를 건물 난간으로 몰고 가는지 등, 아리송한 궁금증이 풀린다.
영화가 취향이니 활자가 담긴 소설도 매력적이었고 영화과 소설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의 결말까지 읽고 나면, 오히려 영화가 원작을 잘 간추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는 소설을 위해 존재하는 영상 부록 같은 존재로, 혹은 119분 안에 꾹꾹 눌러 담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 J.G. 발라드의 작품 특성과 도서 <하이라이즈>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는 대중에게 난해할 수밖에 없다. 영화와 소설은 전반적인 흐름과 톤은 같으나 디테일은 다르다. 영화가 다루지 못한 호기심은 모두 책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다. 난해한 영화임에도 영상이 주는 아름다움에 혹했다면 소설을 권해본다.
그리고 앞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비유했지만, 실상은 다르다. 설국열차는 인간다움 삶으로, 고도화된 문명을 잊지 못해 앞으로 달려 나간다면, 가장 세련된 문명을 자랑하며 고층 아파트에서 왕국을 건설한 <하이라이즈>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나락을 향해 수직적으로 퇴락함을 지향한다. 그들은 사회가 암묵적으로 정해둔 윤리적인 도덕과 법규를 깨트리는 데 희열을 느끼며 아무런 규범 없는 무법지대에 대한 동경을 디폴트 값으로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한다, 일상을 존속한다는 의미를 스스로 포기했고, 포기한 그 삶을 즐긴다. 이것이 <설국열차>와 가장 큰 차이다.
하이라이즈는 크게 하층부, 중층부, 상층부로 나뉜다
층별로 내는 관리비가 다르다. 고층일수록 더 많은 관리비를 지불하는 듯하고 이 때문에 그들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쩔 수 없다. 돈을 많이 지불하는 고객이 그만큼 권리를 갖는다. 허나 전반적으로 크게 신분 격차를 느낄만한 직군들은 아니다. 하층부에 사는 인원들도 방송국 PD, 동화 작가, 승무원 등 확실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보면 알겠지만 흔한 백수 한 명 보이지 않는다. 물론 블루칼라로 건물 내 편의 시설에 근무하는 직원도 속해있지만, 전반적으로 하층부라고 낮게 싸잡아 부를만한 이유는 전혀 없다. 중층부는 의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이 있고 상층부는 그들과 같은 전문직이나 사치를 부리며 벌이가 좀 더 좋고 세습되는 경우가 있는 집안이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하층부 또한 상층부가 사용하는 레스토랑, 마켓, 수영장, 마사지샵, 스쿼시, 헬스 등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보낼 수 있다. 하이라이즈 생활 입문서에도 적힌 공용 시설로 모두에게 제공된다. 출퇴근 외에 아파트 안에서 자급자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프라가 마련된 이곳에는 갖가지 문제가 조금씩 쌓이고 있다. 공급되는 전기량은 설계상으로 한계가 있고, 하다못해 쓰레기 배출구도 크기가 제한돼있다. 모든 구조는 위부터 기회가 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전기를 쓰는 상층부 때문에 하층부에서는 전기가 가끔 끊겨 정전이 발생하고, 공용 시설에도 영향을 준다. 각 개개인에겐 에어컨도 틀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하다못해 주차장 자리도 함부로 선점할 수 없다.
여긴 엄격한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에요.
샬롯 멜빌(시에나 밀러)이 로버트 랭(톰 히들스턴)에게
영화 <하이라이즈>에서 로버트 랭(톰 히들스턴)은 중층부에 입주한 사람으로 25층에 산다. 정신과 닥터로 번듯한 직장을 가진 그는 소설 <하이라이즈>에서도 이곳 생활의 포문을 연다. 언뜻 보면 그가 주는 직업적 색깔과 행동들은 세계관의 해설자로, 중립적이고 상층과 하층을 잇는 계단으로 중층부 입장을 대변하는 구심점이다. 닥터 랭도 은근 독특하다. 본인만 모른다. 영화 <하이라이즈>에서는 배우 톰 히들스턴이 연기한 닥터 랭은 완벽한 전달자로 그의 시점을 중점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우리는 그의 시선을 통해 새 입주민의 시각으로 하이라이즈 생활을 탐구할 수 있다.
마트에서 카트에 아프간하운드를 태우고 정체 모를 소리를 내는 워크맨을 들고 다니는 배우를 보는 재미도 있다. 그는 정신과의 닥터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이 아파트가 설계한 구조에 호기심을 느낀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면서 그는 상층과 하층을 오가며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런 모습이 남들에게도 보였는지, 입주자들 사이에서 랭은 희귀한 구경거리다.
사인해드려요?
리슬링 와인을 찾던 중인데요.
영화 <하이라이즈> 중 15층 마켓에서
제인 셰리던(시에나 길로리)이 로버트 랭(톰 히들스턴)에게
잔돈은 가져요.
잔돈도 없어요.
영화 <하이라이즈> 중
15층 마켓 캐셔 페이(스테이시 마틴)와 로버트 랭
중층부인 랭은 상층부라 하기엔 어딘가 모자라 그들에게 놀림을 당한다. 오케스트라와 중세 시대 콘셉트의 상층부 파티에 볼품없는 리슬링 와인을 들고 나타난 양복쟁이 닥터 랭은 그들과 완벽히 섞이기 어렵다. 그런데도 눈길이 간다. 상층부의 사람과 연이 어느 정도 닿는 위치인 랭은 하이라이즈의 설계자 앤서니 로열(제레미 아이언스)과 스쿼시 약속을 따낼 만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자네가 초대했나?
당연히 아니죠.
로열 씨가 초대하셨습니다.
또 무슨 사회 실험을 한다고 저러겠지.
이건 무슨 복장이에요?
얼치기 예술가?
영화 <하이라이즈> 중 상층부 파티에서 속하지 못하는 로버트 랭
로버트는 아파트 하층부에 셰어하우스로 같이 사는 승무원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있었고, 마사지 샵이나 헬스장, 마켓 등등 건물의 모든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관객인 우리에게 건물 시설을 보여주며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잘 해내고 있다. 어딘지 미쳐가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랭은 무언가 기시감을 느낀다. 혹은 각 계층 간 끄트머리에서 느껴지는 균열을 일찌감치 느꼈던 그는 더욱더 하이라이즈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고수한다. 아마 그것이 그의 방어 기제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방은 입주한 채 그대로 쌓여있는 박스와 마트에서 사 온 페인터 테스트 1 색상으로 뒤덮여가는 벽면과 자신을 일체 시킨다. 동시에 랭은 안정감을 느낀다.
샬롯 얘기가 맞네요,
당신이 이 건물 최고의 편의 시설이라더니.
영화 <하이라이즈> 중 헬렌 와일더(엘리자베스 모스)가 로버트 랭에게
도미노가 쓰러질 때 느낌이 이런 걸까
모더니스트 앤서니 로열(제레미 아이언스)는 '하이-라이즈'가 변화의 장으로 모두가 섞일 수 있는 그 이상의 공간을 꿈꾼다. 설계자이자 첫 입주민으로 아무도 없던 아파트에 사람들이 입주함에 따라 그가 꿈꾸는 공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란 벅찬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단순 설계를 넘어 하나의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설렘,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창조했다는 권위감, 가장 꼭대기 층인 펜트하우스에서 입주민을 내려다보는 자만심. 무엇보다 실제 성도 소유하고 있는 제레미 아이언스가 맡은 앤서니 로열 역은 실제 그 역할과 걸맞은 싱크로율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크롬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그는 노쇠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다. 그의 부인인 앤은 고생은 모르고 자라온 지방 대지주의 딸로 지독하게 앤서니와 맞지 않다. 그런데도 둘이 이렇게 붙어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 자처한 신분 때문이다. 남의 시중을 받는 게 당연한 앤에겐 누구보다 권위적인 상징이 필요하다.
하이 라이즈 생활은 어때요?
열광과 나르시시즘과 정전의 연속이에요.
딱 교수님 전공에 맞는 곳이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영화 <하이라이즈> 중 학교에서 로버트 랭과 진의 대화
펜트하우스에 사는 로열 부부와 상당히 대조되는 부부가 있다. 2층에 거주하며 방송국 다큐멘터리 PD와 동화 작가인 와일더 부부다. 아이가 없는 로열과 다르게 와일더 가족은 아이들이 있어 언제나 복작거린다. 이름답게 거친 성정을 가진 와일더는 로열이 구축한 이 세계의 부조리를 세상에 알리고자 다큐멘터리 제작을 진행한다. 상층부의 전력 낭비로 왜 자신들이 피해를 봐야 하는지, 그들의 애완견이 저지른 배변 실수를 왜 우리가 견뎌야 하는지, 공용 시설인 수영장을 마음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건지, 단지 아이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왜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하는 건지, 리처드 와일더(루크 에반스)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리처드는 거친 성정과 아파트 내 여러 여성과 외도만 아니라면 이 건물 내에서 제일 정상인이라 말할 수 있다. 아니 저런 점들을 다 포함해서도 제일 정상적인 사고로 현실을 바라볼 줄 안다. 반대로 아내 헬렌 와일더(엘리자베스 모스)는 불만을 제기할 생각은 없이 그저 순응한다. 부부 생활의 신뢰가 깨진 그녀는 일단 그럴 기운이 없다.
아파트 난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는데, 어떤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경찰차 한 대도 나타나지 않는다. 자체적인 시스템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해도 어떻게 요즘 시대에 이럴 수가 있어? 리처드는 억눌려있던 감정을 다큐멘터리에 쏟는다. 그는 하층부부터 상층부까지 아파트를 '등반'한다. 자신을 배척하는 중층부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는 펜트하우스까지 도착한다. 로열과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는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로열과 마주한다. 생존을 위해 온몸에 피 칠갑을 두른 그와 달리 로열은 상대적으로 하얀 재킷 위에 애완견 셰퍼드의 피를 둘렀을 뿐이다.
한때 다 같이 모여 음악을 연주했으나. 지금은 죽어가고 있는 악기인것이다. 사방이 고요했다. 주민들은 각자의 집 바리케이드 뒤에 숨어, 그나마 남아 있는 분별력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다가올 밤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제 폭력은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무작위적이고 냉혹한 공격으로 양식화되었다. 정형화된 틀 안에 무자비함과 공격성이 내재되어있다는 점에서, 이 고층 아파트 건물에서의 삶은 바깥세상과 닮아가고 있었다.
소설 <하이라이즈> 중 280쪽
로열이 만든 세계는 실패했으나 그에게 새로운 시사점을 안겨주었기에 성공적이다. 사회가 정해놓은 법과 암묵적인 선과 비교하면 인생 최악의 실패작이나 다름없으나 오히려 사회의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 헝클어진 정신머리가 규칙인 하이라이즈가 내면 깊숙하게 숨어있는 본성을 일깨웠다. 로열은 5동의 아파트 주민들을 데리고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켰고 이를 현대 사회와 평행선을 가진 채 공존시켰다. 로열은 망해가는 건물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자신이 이 세계의 창조자라는 것을 잊고 싶지 않았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증거들에 따르면, 이런 고층 아파트에서는 제대로 된 사회구조가 형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입주자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비용 효율성이 높고 개인적인 면에서 수익성이 높은 수직형 거주지는 계속 형성되고 있었다.
소설 <하이라이즈> 중 98쪽
창조자의 이념이 건물에 박혔는지, 먼로(영화 하이라이즈 중, 랭의 학생 중 하나)는 바로 로열의 집 아래층에 거주하며 랭이 중층부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안 그래도 건방졌던 태도가 더욱더 거만해졌다.
하지만 여기 사는 몇몇 사람들은 최상류층일세,
자기들 칸에 맞게 몸을 구겨 넣어서 빠져나올 공간도 못 만든다네.
당신이 만든 칸이죠.
알아, 변화를 위한 장으로 구상한 건물인데,
뭔가 중요한 요소를 빠뜨린 기분이야.
영화 <하이라이즈> 중 스쿼시를 치는 앤서니 로열과 로버트 랭의 대화
단체로 생각이란 걸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해를 위해 영화를 중점으로 위의 글을 썼지만(그렇다고 소설과 크게 다른 부분은 없다) '파티'는 영화나 소설도 마찬가지로 하루하루가 파티의 연속이다. 열악한 상황에도 파티는 계속된다. 입주자들은 계속 무리를 지어 다니며 단체의 결속력을 과시하듯 어떻게든 쥐어짜 내 파티를 연다. 파티로 낭비되는 전력과 자원은 예전부터 입주민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있었다. 상층부의 파티로 마켓은 정전이 발생하거나 랭은 엘리베이터에 갇히기도 한다.
특히 앤서니의 흥미를 끄는 부분은 주민들이 건물을 지나치게 함부로 대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승강기와 에어컨 설비를 마구 다루고 전력 공급 시스템을 혹사시켰다. 본인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시설들을 이처럼 거칠게 다룬다는 것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체계가 뒤죽박죽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앤서니가 고대하는 새로운 사회, 심리적 질서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소설 <하이라이즈> 중 147쪽
건물은 현대적으로 쌓아 올렸으면서 파티의 콘셉트는 중세 시대의 가면무도회나 다름없다. 상층부는 자신만이 누릴 수 있다는 특권 의식에 휩싸여 공용 시설의 사용도 제한을 둔다. 당연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고 관리비를 제때 내지 못하는 하층부라 관리실에서도 상층부의 조건을 모른 척할 수 없다. '정전'이란 소재는 책의 모든 심리를 담을 수 없는 영화에서 인물들의 스위치를 담당한다. 마치 정전이 된 순간부터 억눌러왔던 부조리를 내뿜어내는 거친 와일더는 이름처럼 모든 행동과 언행이 거침없다.
암묵적으로 지켜온 선을 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정도가 날이 갈수록 과감해진다. 각 집단은 서로의 파티에 맞붙어 자신들이 만드는 파티로 대결한다. 술과 마약, 섹스에 취해 모두 자신들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정전이 심해질수록 자신이 누군지 잊어가기 시작한다. 건물이 기능을 잃어가며 입주자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하기 시작한다. 서서히 출근을 포기한 사람도 생겨난다. 건물에 갇힌 사람들의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분노를 쏟아낸다.
혹시 방송국까지 태워줄 수 있어요?
아뇨, 미안해요. 어디 주차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
재밌네요, 나도 그런데.
영화 <하이라이즈> 중 와일더와 랭의 대화
상층부 인원의 자살로 위태롭게 잡고 있던 균형은 깨져버렸고 40층 아파트의 모든 입주자는 각자의 바리케이드를 찾아 떠난다. 썩어버린 마트 안의 식재료, 끝나지 않는 정전과 절수, 막혀버린 쓰레기 배출구와 복도 밖으로 쌓이는 무수한 쓰레기봉투들, 직업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 머리 가죽을 침착하게 벗기는 랭도 마찬가지다. 바깥 생활을 극도로 꺼리기 시작하며 감당 못할 감정 기복으로 점점 본인을 잃어간다.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기 시작했으며 분별력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각자 방어 기제를 유지한다.
이성을 잃어버린 하이라이즈의 생활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 장면에 여러 사건이 일어났고 한순간 지나쳐 바로 알아보기 어렵다. 도대체 공공연한 노출을 하고 위생과 청결을 포기한 생활을 하는지. 1975년 영국의 런던이란 배경이 무색하게 왜 이들은 수렵과 채집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것인지, 닥터 랭은 왜 페인트 통에 집착하는지, 사람이 죽어 나가는 데도 경찰이 수사하지도 않는지, 분명 아파트에 고립돼 현실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있을 텐데, 어째서 그들을 찾지 않는지, 정상적인 시각으로 절대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이 발생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간대에서 인물들은 개개인별로 서사를 만들고 소설은 활자로 각 집단의 사건들을 나열했으며, 영화는 모든 서사를 한 번에 터뜨린다. 원초적인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그들은 무리를 일구고 자신만의 부족을 형성해 건물을 들쑤시고 영향력을 과시한다. 힘없는 여자와 아이들은 그들을 피해 안락한 보금자리를 향해 도망쳤고 힘을 합쳐 서로를 보살핀다.
우리 모두가 기분 좋게 원시주의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고귀한 미개인이라기보다는 악의로 가득한 후기 프로이드적 자아들로 변해가고 있어요. 자식의 응석을 지나치게 받아주면서 용변 교육을 시키고, 헌신적으로 모유 수유를 해주고, 애정을 퍼붓는 부모에게 분노하는 자아들 말입니다. 이들은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대응했던 자들보다 훨씬 더 위험해요. 자기네가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점에 분노하고 있거든요. 비뚤어진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게 억울한 거죠.
소설 <하이라이즈> 중 208쪽
적응과 생존
건물이 만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끝까지 파헤치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바로 리처드 와일더(루크 에반스)다. 우리의 화자이자, 안내원인 로버트 랭(톰 히들스턴) 닥터는 생존을 위해 순응하고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용했으며, 이내 폭력적이고 어딘가 이상한 행동도(약물을 숨기는, 페인트로 뒤덮인 생활) 보인다. 이곳저곳 소식을 옮겨 담던 샬롯 멜빌(시에나 밀러)은 결국 가식적인 인물이었고 방어적이고 숨기 바쁘다. 앤서니 로열(제레미 아이언스)은 숨기고 있던 권위 의식을 맘껏 드러낸다.
폭력과 의심이 건물 전체에 팽배해지기 전까지, 주연 인물 중 제일 문제가 있어 보이던 사람인 리처드 와일더(루크 에반스)는 혼돈 속에서 심사가 제일 얌전한 사람이었다. 뒤틀린 질서가 가득한 40층 타워에서 그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 증거로 아파트 '등반'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 타입이 아닌 이유를 알았어.
영화 <하이라이즈> 중 리처드 와일더가 샬롯 멜빌에게
폐허 속에서도 목표를 잃지 않았던 그는 여전히 거칠고 해서는 안 될 행동도 '등반'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서슴없이 행한다. 다혈질인 그는 평소 하고 싶은 대로 표출하며 살았던 덕분인가, 이미 아내에게 괴물과 다름없던 사람이라 아파트와 맞서 싸우는데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꿰뚫는다. 그는 로버트 랭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진단한다. 랭의 진단은 다음과 같다. 이 건물에서 제일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고.
약탈자들이 성욕 해소를 위해 여자들을 이용하고 있으니, 이 두 여자를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엘리너 그리고 앨리스와의 관계에 있어서 성적 충동에 몸을 내맡기지 않는 분별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무엇이든 가능한 이 건물에서도 정도를 넘는 괴상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소설 <하이라이즈> 중 295-296쪽
정말 위험한 건 당신 같은 자족형이야.
하이라이즈 생활에 심리적 중압감도 없고
능숙할 정도로 무관심하고 번영하고 있지.
중성 대기 속 진보된 종처럼.
영화 <하이라이즈>중 리처드 와일더가 로버트 랭에게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미래도 희망도 없는 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소통을 하는 이들이 있다. 상층부 인원 중 뉴스 앵커인 코스그로브(피터 페딘난도)는 애처롭게 브라운관 밖 사람들에게 외친다. 거기서 뭐 하냐고? 난 일하고 있는데 다들 뭐 하는 거야? 하지만 그의 외침도 정전 속으로 사라진다. 그 또한 전형적인 상층부 인물로 그가 저지른 악행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으며, 하층부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 사료를 먹으며 모두 망가지고 사라진다. 토비(영화 중 샬롯 멜빌의 아들)는 주로 들고 다니는 만화경으로 건물 생활을 엿본다. 영화과 소설이 말하는 미래는 같다. 쓰레기와 시체로 가득 찬 수영장은 오수로 변해 온갖 악취를 내뿜는 장소가 됐으며 소위 소각장의 역할을 한다. 공룡이 멸종하고 인류가 등장하는 것처럼, 하이라이즈는 서서히 사라지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예전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이 안에서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거대한 건물에서는 엄격한 계층 구조가 형성되어야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다. (중략) 이런 이유로 앤서니는 이 건물 내에 새로운 사회질서가 출현하고 있다는 점에 매혹되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신에게 어떤 적대적인 행위가 가해지든, 새로운 사회질서를 탄생시키는 산파로서 이곳에 끝까지 머물고 싶었다.
소설 <하이라이즈> 중 134쪽
중층부 사람들은 여자들이 세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 그들의 터를 잡고 시작했으며, 건물은 새로운 사회를 받아들인다. 우리의 안내자 랭은 그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며 사회의 수행원을 자처한다. 그는 새로운 세계와 가족이 만족스럽다. 현실 속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 그들은 철저히 건물 안의 생활을 고수했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시작했던 하이라이즈가 여성 중심의 모계사회로 회귀했다는 점, 굉장히 폐쇄적이고 단절적인 생활 속에서 현대판 디스토피아를 구축한 결과로 경고한다.
그 경고는 영화와 소설이 말하는 결과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경고를 던진다. 단지 영화는 굉장히 상징적이며 소설은 상징을 디테일하게 묘사해 더욱 현대적인 공포감을 심어준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다음, 시간이 충분하다면 영화를 몇 번 더 감상할 것을 추천한다. 무릇 모든 영화가 그러하지만 정신 나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모두가 원하는 상류층의 삶에 도달하고 싶은 인간들이 뒤집어쓴 가면이 벗겨질 때, 마주한 본성은 과연 당신이 차세대 패러다임에 합류에 대한 여부를 결정해 줄 것이다.
그건 뭐야?
만화경이요.
그걸로 뭐가 보여?
미래요.
영화 <하이라이즈> 중 토비 멜빌과 로버트 랭의 대화
참고로 abba의 sos를 이런 식으로 소화해내다니, 공식 음원으로 나오지 않아서 아쉽다.
Posrtishead 가 부른 sos는 하이라이즈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더 극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원작과 각색한 영화를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취향인 듯
영화는 내세운 주연만 보아도 '결'이 느껴진다. 톰 히들스턴과 제레미 아이언스가 가진 각진 신사적인 분위기로 그러니까 셔츠가 잘 어울리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뽑아낸 영상미는 소설의 서사와 맞물려 잘 어울린 상징성으로 간추렸다. 반쯤 넋이 나가 입은 듯 만 듯 한 상태로 정신없이 춤을 추는 사람들과 고층에서 떨어지는 사람과 대비되는 파티 속 인물들, 기능을 잃어가는 건물 속에서 스탠스를 잃지 않는 중층부 사람들까지, 죽어나가는 사람들과 쌓인 쓰레기봉투 더미, 씻지 않는 사람들의 위생 상태가 의도대로 표현됐어도 불결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여러 번 감상해 익숙해져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적당한 기괴함과 불쾌감 그리고 배우와 인물이 끌어내는 현대적인 감각과 미장센으로 균형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순수하게 영화의 재미를 느끼러 온 사람을 놓쳤다. 한 가지의 소재의 서사로 담기 어려운데 세 가지 집단의 심리 서사를 119분에 모두 담기란 어려웠을 테다.
책은 많은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방대한 서사가 쌓여있고, 영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하여 각색했다. 그러다 보니 책의 설정과 다르게 덜어낸 부분도 있고 새롭게 창조하거나 다르게 대입한 경우도 있다. 책을 보고 영화를 보았다면, 아! 이렇게 잘 간추렸다니!라고 느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J.G 밸러드의 문체도 취향이었고 (공보경 옮김으로 나랑 문체가 맞는다, 찾아봐야겠다) 자극적인 상황을 정제된 언어로 일축시키는 문체의 힘이 인물의 심리를 객관적으로 독자에게 전달력을 돋보이게 한다. 문체의 힘은 이뿐만이 아니다. 소설이 다루는 소재는 주로 퇴락과 원초적인 본능이 기인한 심리적 문제를 묘사함으로 굉장히 강렬하다. 실질적인 죽음과 조금 거리가 멀어진 현대 사회에서 목격하는 원시적인 죽음은 신선하게 나의 뇌를 강타했다.
왠지 이해 가지 않는 이 영화에 눈길이 간다면, 소설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나는 J.G. 밸러드(영국의 소설가, 1930-2009)의 첫 소설로 <하이라이즈(HIGH-RISE)>를 읽게 됐고, 그의 대표작으로는 <태양의 제국>,<크래시>등으로 지구 종말 시리즈로는 <물에 잠긴 세계>,<불타버린 세계>,<크리스털 세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