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핑계로 '나'를 완성한
내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불쑥 튀어나오는 영화가 있다. 사실 대중적이진 않아 말하기 쑥스럽긴 하다만, 그 영화는 바로 <러스트앤본(RustandBone)>이다. 마리옹 코티야르(Marion Cotillard, 1975)와 마티아스 쇼에나에츠(Matthias Schoenaerts, 1977)가 출연한 영화로,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2012년에 개봉했다.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요소를 빼다 박아넣었다. 나른하고 햇빛이 강렬한 이국의 분위기, 생활감이 느껴지는 의상, 화장기 없는 얼굴로 출연하는 배우, 잡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여주는 잔혹한 카메라, 그리고 인물의 불안한 감정 따라 흔들리는 앵글, 동물적인 감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생명감, 마지막으로 마리옹 코티야르가 헤엄치는 청량한 바다가 두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한낮에 보아도 좋고, 해가 저물랑 말랑하는 애매한 저녁도 좋고, 혹은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새벽도 좋다. 나는 영화가 자랑하는 날이 서고 정제된 감성이 좋다. 하지만 이런 찬양에도 나는 감독 작품 중에서 두번째로 본 영화다. 이런 모순이 있으니 진정한 팬이라 칭하지는 않겠다만, 취향은 취향이다.
<러스트앤본(RustandBone)> 이후로 두 번째로 접한 <파리, 13구(Paris, 13th District)>는 포스터에 끌려 보게 됐는데, 영화 시작에 뜨는 자크 오디아르(Jacques Audiard, 1952)란 이름이 어딘가 익숙해 감독이 같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다. 덤으로 취향도 검증 받았다. 나는 취향이 정말 올곧은 소나무구나.
화려함 속에 가려진 외로운 도시, 파리 13구.
낭만을 잃었다 생각한 그 곳에서 불현듯 사랑을 만났다.
사랑을 원하는 에밀리
사랑이 두려운 노라
사랑이 값비싼 앰버
스위트 사랑을 몰랐던 카미유
흔들리고 불안했던 그 사랑이, 우리는 전부라 생각했다.
여전히 사랑을 믿는 도시
<파리, 13구>
영화 <파리, 13구> 시놉시스
<파리, 13구>는 2022년 5월 12일 개봉하였고, 105분의 러닝타임을 가진다. 영화는 단정하다. 흑백 처리된 영화는 빽빽한 빌딩 숲을 자랑하는 도시를 영상미로 잡았고, 감각적인 OST는 ‘파리’라는 장소와 조화롭다. 그리고 인물 중심의 앵글과 자연스러운 카메라 무빙이 인물의 심리를 대변한다. 아무래도 ‘사랑’을 다루는 영화이니 그만큼 배경은 깔끔하고 인물에게 중심을 맞췄는데, ‘균형’ 없이 못 사는 나에게 단정한 영상으로 안정을 선사한 만큼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을 욱여넣는다. 근데 또 그게 내 취향이라 입가에 취향을 가득히 떠 놓은 숟가락이 항시 대기 중인 것 같다. 배부른데도 계속 먹이려는 그런 느낌이라나. 또 물리지 않는 맛이라 하나라도 놓칠세라 꼭꼭 씹어 먹는다. 물론 욱여넣는 행위 자체가 지독하게 느껴져 질릴 사람도 있겠지만, 본인은 그렇지 않다. 현생만큼은 담백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작품 취향만큼은 지독한 게 좋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어안이 벙벙해 이게 도대체 뭐야? 라며 말을 되풀이하는 관객에 비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러스트앤본>을 얘기하며 감독에 대한 단상을 한 단락이나 적인 이유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감독은 등장인물의 밑바닥, 그러니까 누구한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런 감정을 집중한다. 혼자 알고 싶은데, 또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거나 답을 찾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감정의 골. 그 불쾌한 흑역사를 관객에게 모두 보이니, 밑바닥에서 마주치는 인물의 진심을 통해 괜히 우리도 낯 뜨거워진다.
영화는 네 명의 인물이 겪는 감정을 중심으로 풀어간다. 복학했지만 봄방학 파티에 쓰고 간 금발의 가발로 감당하지 못할 사건에 휘말린 노라,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는 에밀리, 가족과 커리어의 책임감에서 탈피해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카미유, 그리고 온라인 스트리머로 본인을 숨기는 앰버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파리 13구에 거주하며 감정 전달이 미숙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특히 심통을 부리는 루시는 카미유에게 대한 감정을 말해도 방법이 올바르지 않으니 카미유에게 제대로 닿지 않는다. 정치학을 배우고 콜센터에 다니는 루시는 외로워 보였다. 아무나 사랑할 준비가 됐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에겐 거절당하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심술밖에 없다. 룸메이트로 시작한 카미유와는 관계가 망가지고 볼 장까지 다 보고 나서야 그 둘은 서로를 친구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먼 길을 돌아온 셈이지만 필요한 과정이라 보였다. 감정의 골은 그들을 성장 시켰고, 루시는 할머니의 장례식이 다가오자 루시는 카미유에게 진심을 제대로 전달한다 “널 사랑했어, 지금도 사랑하고” 어찌 보면 루시가 제일 연약하고 순수한 악동 같다.
카미유는 책임질 것이 많아 보였다. 병원 신세를 졌던 모친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고, 어린 동생과 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해 박사과정을 밟기 위하여 생계와 공부를 병행 중이다. 그래서 가족과 일을 벗어난 자신만의 영역인 연애는 감정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엔 스테파니와 노라를 돌고 돌아 루시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카미유는 루시를 먼저 찾아간다. “사랑은 우릴 슬프고 기분만 더럽게 만들어” 카미유는 누구보다 사랑할 줄 알고 받을 줄도 알지만 그만큼 무게를 알아 시작을 보류한 것처럼 보였다.
루시와 카미유는 관계를 파악하기 쉬웠다. 감정이 어떠했을지, 왜 저런 선택을 하고 저런 단어를 내뱉어 서로를 상처 주는지. 왜 또 심통이 났고 왜 도망가기 시작했는지. 그러나 노라와 앰버는 아직 베일에 싸인 기분이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일했던 노라는 10년간 한 연인과 사랑했고, 어떤 계기로 파리로 돌아와 학업을 재개하는지 모른다. 금발 가발로 인해 사건이 생겨 앰버를 알게 됐지만, 어떤 상황과 감정으로 인해 현재에 이르렀는지 서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모종의 사연이 있어 보였고 그 사연으로 인해 카미유에게 이별을 고했다. “우리 둘 다 사랑이라 착각했어.” 노라에게 자신에 대해 환상을 가진 카미유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그리고 앰버를 만난다. 사실 앰버는 스트리머라는 직업 외에 밝혀진 게 없다. 금발 가발로 공통점이 생겨 화상채팅을 통해 친해진 노라와 앰버는 용기를 내어 현실에서 만난다. 그리고 보자마자 숨을 쉬지 못하며 쓰러진 노라는 앰버에게 키스해달라 하고, 둘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노라 역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리안느’ 역을 맡아 섬세하고 깊은 연기로 스타덤에 오른 노에미 멜랑(Noemie Merlant, 1988), 풋풋함과 탄탄한 연기력을 가진 루시 장(Lucie Zhang, 2000)은 가족과 자신만의 자유 속에서 갈등하는 에밀리 역으로 , 어쩌다 보니 영화 속 인물을 모두 엮고, 구심점이 되는 카미유 역에는 마키타 삼바(Makita Samba, 1987) ,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이자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앰버 스위트 역은 카미유 베토미에 (Camille Berthomier, 1984)가 맡았다.
영화는 파리의 젊은 사랑을 보여준다. 매체가 나에게 심어준 파리의 단상 그대로였고, 단 한 번도 방문해본 적 없는 곳이지만, 영화는 파리 13구란 공간에서 자유롭고 솔직한 매력을 담았다. 분위기에 취한다면 이십 대 초반인 사람에게도 인상 깊어질 영화이지만, 인간의 고독함에 집중하자면 아마 그 이상의 나이대가 공감할 법 싶다. 높다란 빌딩 속에 어느 것 하나 내 것 없고 사람에게 위로받고자 하는 현대인의 외로움이 녹아 있다.
감독은 그런 영화에서 ‘사랑’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고민해보았을 때, 나에게 답은 하나였다. 바로 ‘나’다 노라가 말하길, “우리 둘 다 사랑이라 착각했어”라는 대사와 앰버를 찾아가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사랑을 깨닫고 다리에 힘이 풀렸을 때, 노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상대에게 스킨십을 요구했다. 카미유와 루시는 사랑을 통해 관계의 진정함을 찾는 케이스라면 앰버와 노라는 사랑을 통해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마 비슷한 영화로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내용 자체는 중경삼림의 결이나 편집적인 요소는 더 무겁고 프렌치 하다. 2020년대의 탈을 쓴 1990년대의 바이브라고 해야 하나, 앞서 말했듯이 감각적인 외관을 <파리, 13구>는 굉장히 감상적이다. 대중적으로 유행하진 못해도 누군가에게 사랑에 관한 인생 영화로 회자할 법하다. 아마도 나에게 가장 최근에 본 영화 중 괜찮은 영화가 무엇이었냐고 물어보면 주저하지 않고 ‘파리, 13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