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 위로 쌓은 성장
그림 <게르니카>는 입체적이다. 피카소가 그린 그림답게 추상적이며 모든 면을 한 폭의 그림에 평면적으로 담아 우리는 모든 면을 빠짐없이 볼 수 있다. 아직 어렸던 내가 본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참으로 욕심이 많아 보였다. 시신경 세포가 마치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집 피우는 것 같았다. 단 한 번의 시선으로 그림을 볼 수 있도록, 모든 면을 담아보겠다는 화가의 욕망이 느껴졌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자고로 작품이란, 시간을 들여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보는 그런 진득한 감상이 필요한데, 그런 노력 하나 없이 한 번에 보고 말 것이라는 객기처럼 나는 느꼈고, 혹은 기괴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당시 나는 피카소의 작품관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미술 시간 때 배운 피카소는 재미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차라리 <아비뇽의 여인들>이나 <우는 여인>이 상대적으로 좋게 느껴졌다.
그 후로, 내가 미술사를 좀 더 배웠을 때다. 그림 <게르니카>가 어떤 주제를 담았는지 알았을 때, 그제야 왜 욕심을 부렸는지 알았다. 절대 잊으면 안 될 사건을 낱낱이 눈에 담을 수 있도록, <게르니카>는 스페인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대학살 사건의 다수의 사상자인 민간인들을 기리기 위해 여러 면모를 입체적으로 폭력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순간, ‘고집’과 ‘객기’를 운운하며 작품을 지나쳤던 지난날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이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 하는 걸까. 이런 종류의 사건을 여러 번 겪은 뒤로, 나는 다시는 불호의 감정을 먼저 내비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게르니카>의 의미를 알고 있다 보니 궁금했다. 한이리 작가의 <게르니카의 황소>를 펼쳤을 때, 많고 많은 작품 중에서 왜 <게르니카>일까? 작품의 주인공인 케이트는 어째서 <게르니카>에 주목한 것일까? 없어지지 않는 호기심 때문에 나는 손을 떼지 못했다. 내 취향이기도 하다. 워낙 범죄, 스릴러, 미스터리물에 빠지기 시작하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편이라, ‘심리스릴러’ 인 <게르니카의 황소>는 ‘케이트’라는 한국계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세워 트라우마 극복을 전반적인 흐름으로 삼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흡인력 있는 <게르니카의 황소>는 케이트와 에린, 그리고 그들을 엮은 매개체인 그림과 게르니카의 황소까지. 인물과 사물의 미스터리한 관계성을 통해 독자에게 몰입감을 선사하고 생생하고 날카로운 문장으로 독자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심리스릴러 장르로 소설을 소비할 수 있겠지만, <게르니카의 황소>가 가진 다양한 상징성은 하나의 장르물이 아니라 상처로 점칠 된 인생을 사는 한 인간이 스스로 상처의 고리를 끊어내고, 타인에 의해 길러진 정신세계를 탈출해 상처의 진실을 마주해 성장하는 이야기를 예리하게 담았다고 생각된다. <게르니카의 황소>를 키워드로 나타내면 #무의식, #트라우마, #극복, #꿈, #현실, #범죄, #스릴러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에 끈끈한 선홍색 피가 묻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내 온몸을 마비시켰다. 여인이 내 목에 칼을 갖다 대었다. "어머니!" 내가 외쳤다. 어머니가 내 목을 그으며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주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내 목에서 솟구친 피가 내 눈을 적셨다. 핏빛 어둠이 나를 집어 삼켰다.
<게르니카의 황소> 중 27쪽
<게르니카의 황소>는 인물의 심리를 통해 사건을 전개한다. 전개가 중후반부로 치달을 때쯤,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난 의심을 신경 쓰느라 소설 속 시간을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대목이 '현실'인지, '꿈'인지 점점 분간할 수 없다. 케이트가 ‘진실’과 가까워질수록,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 지워지는 탓에 우리는 케이트의 생각을 통해 시간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게르니카의 황소>의 상징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황소’, ‘열쇠 다발’, ‘비밀 문’, ‘D.14’ - 케이트가 그린 그림 작품 넘버다’ - , 등. 반복적으로 케이트가 시간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증거들이자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황소’는 상징 속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황소’는 단순히 <게르니카> 그림 속 황소를 뜻하기도 하고, 꿈에서 케이트를 갈기갈기 찢은 황소이기도 하며, 아버지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황소 동상이기도 하다. 황소는 모든 순간에 그녀를 쫓는다. 혹은 케이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황소를 쫓아간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황소는 케이트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10살까지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후, 꿈속에서 자신의 몸에 구멍을 낸 황소의 뿔을 기억하며, 모든 영감을 그림에 쏟아부은 그녀는 정신과 약물로 인해 더 꿈속에서 황소를 만나지 못하자 더는 획기적인 작품을 그리지 못한다. 그림에 '삶'을 걸었던 케이트는 결국 아버지 서재에서 발견한 '작은 황소' 동상을 충동적으로 훔친다. 황소를 소유한 케이트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황소를 놓지 못해 약물치료를 거부했고, 정신병원을 운영하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쳤다. 어린 케이트가 미술관에서 우연히 본 <게르니카>에게 끌리는 것은 필연적이라 볼 수 있다. 온갖 폭력으로 점칠 된 유년 시절을 통째로 기억상실로 묻어두게 될 만큼, 게르니카에 매료된 그녀는 유독 황소에게 끌린다. 황소의 날카로운 뿔에 상처 입은 케이트는 새로운 집에서, 자신의 방에 놓인 게르니카 모작품 속 황소와 매일 눈을 마주친다. 마치 의식처럼 행하는 이 루틴은 무의식적 영감을 받기 위함일 수도 있고, 케이트가 꿈속에서 황소에게 입은 상처 난 구멍을 메우기 위함일 수도 있다. '황소'는 피카소의 작품처럼 입체적이다. 그것은 추악한 이면을 숨기고, 영감이란 탈을 뒤집어쓴 채 케이트가 쫓아오도록 유도한다. 또한, 케이트가 진실에 가까워지도록 쉼 없이 케이트를 자극한다.
<게르니카의 황소> 중 ‘황소’는 일종의 트리거(trigger)이며, 키(key)역할이기도 하다. 케이트는 황소를 통해 상처를 입었고,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천재 화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황소를 통해 만들어진 정신세계를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기에, 케이트가 <게르니카>에 빠진 것은 필연적이라 말할 수 있다.
에린이 내 그림자라는 것. 내가 외면하려 하는 나 자신의 가장 열등하고 끔찍한 면이 인격화된 형태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 아침엔 너무 흥분해 잊고 있었던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모든 게 이해되었다. 에린이 왜 하필 내 어린 시절에 대해 물었던 건지. 왜 갑자기 화를 내며 날 쫓아냈던 건지. 왜냐하면 이건 꿈과 나의 거래이기 때문이다. 어제저녁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다. 나 자신의 가장 끔찍한 면을, 잊고 싶은 가장 끔찍한 과거를 마주하는 것.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견뎌내는 것이 바로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인 것이다. 꿈에서 잃어버린 그림을 현실에 되살려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게르니카의 황소> 중 103쪽
딱 한 점. 아니 두 점만 더 꿈에서 훔쳐내자. 그런 다음 나 스스로 멈추는 거다. 14번. 그래, 거기서 멈추는 거다. 13번을 그려내자마자 내 작은 황소를 강으로 가져가 던져버리는 거다. 그리고 그 길로 돌아가는 거다. 집으로. 날 기다리는 아버지에게로.
<게르니카의 황소> 중 125쪽
소설 밖에서 그녀는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일기로 기록하여 독자에게 전하는 전달자이며, 소설 속 인물로서 정신 병원을 운영하는 가족의 환자이자 입양된 막내딸이다. 또한, 그녀는 소설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이외 부여받은 역할로, 케이트는 에린과 수잔을 탄생시킨 창조자이자, 다시 그들을 죽인 살인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는 케이트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했다. 또한 작가는 케이트가 역할들을 모두 소화할 수 있도록, 역할을 모아줄 수 있는 요소를 넣어 소설의 중심을 잡았다. 바로 기억상실이란 요소다. 이 점을 통해, 많은 역할은 하나의 중심으로 모여 뾰족하게 주제를 담아냈다.
케이트는 끔찍했던 유년 시절로 자신을 파괴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기억을 봉인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10살 이전의 기억은 모두 아버지 ‘칼 번햄’에 의해 전해 듣는다. 케이트의 유년 시절에 대한 진실은 소설의 후반부가 되어야 진실을 알 수 있다. 왜 케이트가 케이크를 싫어하는지, 기시감이 드는 듯한 서술이 왜 반복되는지, <게르니카의 황소>에 모든 궁금증은 결말에서 알 수 있다.
케이트는 과거의 부재 위로 그림을 그리며 성장한다. 그리고 그녀의 직관은 케이트가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이 회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끈다. 그 방향은 케이트가 타인에 의해 도려낸 유년 시절의 기억을 되찾는 과정이자, 작가가 숨긴 진실을 주인공과 함께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작가는 이런 과정으로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회복력을 이용한다. 케이트는 무의식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망각하기 위해, 칼 번햄으로부터 전해 들은 유년 시절을 비극을 별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일기에 기록한다. 복용하는 약물로 인해 불투명해진 감정 때문일 수도 있다. 케이트는 소설 속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최대한 객관적인 기록으로 남기고자 노력한다.
단순히 케이트가 일기를 쓴다는 것이 현실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는 목적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다른 이유도 있어 보인다. 그녀가 기록을 증거로 삼아 진실을 파헤칠 수 있는 도구로써 사용하고, 기억을 상실한 유년기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는 본인을 아껴주기 위한 무의식적인 루틴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실제로 글쓰기가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다고도 하며 나 또한 글쓰기를 감정 기복을 다스리는 일환의 도구로 사용할 때가 있다. 그럴때면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로 케이트의 일기는 황소에게 입은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회복하고자 하는 케이트의 치유 본능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케이트가 그림을 그리는 것도 똑같은 원리라 생각한다. 꿈에서 가져온 그림이라 Dream의 앞글자를 따 D.1번부터 완성 순서로 이름을 붙인 그림은 D.138번까지 그렸고, 케이트의 작품은 세계적인 인정을 받아 이름 없는 화가로 그녀는 유명해졌다.
그녀는 본인이 가진 결핍으로부터 해답을 찾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가 처방한 약물을 버티며 미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노력은 단순히 온전하지 못한 정신으로 미쳤다 혹은 미치지 않았다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는 케이트가 본인도 모르게 결핍을 채우기 위한 궁극적인 목표를 가졌다고 본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나는 목발을 빼앗아 에린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동시에 이것이 꼭 현실인 것처럼 의아해했다. 어째서 저런 천박하고 역겨운 여자에게 이토록 위대한 재능이 주어진 걸까? 나는 저 엄청난 그림을 실제로 에린이 그리기라도 했다는 듯 강렬한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혔다.
<게르니카의 황소> 중 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