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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격하는지혜 Jan 16. 2021

몇 배나 더 달고 단단한 양파를 위해

잃었던 삶의 미각을 일깨우는 ‘리틀 포레스트’


있는 힘껏 살아낸 세상에서 밀리고 밀렸을 때, 도망쳐 숨을 곳 혹은 돌아갈 곳이 존재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혜원(김태리)에게 집, 엄마(문소리)와의 기억이 담긴 집은 내내 돌아가고 싶었지만 또 돌아갈 수 없었던 장소다. 하지만 도시락을 쌀 시간에 공부나 했으면 좋겠다며 정성을 담은 음식을 부담스러워하던 연인은 시험에 합격하고, 정작 인스턴트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준비한 자신은 불합격의 결과를 받아들면서, 얼마 안 되는 서울의 삶을 둘둘 말아 등에 지고 훌쩍 돌아와 버렸다. 아니, 도망쳐 들어와 버렸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이야기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1


상한 자존심도 자존심이고 무엇보다 혜원은 지치고 허기가  있었다. 허기를 채워야 했다. 겨울이 소복이 쌓인  안에서 혜원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일은 마음과 정성이 들어간, 기다림이 필요한 음식들을 만들어 먹으며 몸의 허기를 지워내는 것이었다. 수능 시험이 끝나자마자 자신을 떠난 엄마와의 기억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괴로움이 있긴 하다만, 그녀가 심겨져 자란 , 엄마의 뱃속과도 같은 이곳에서만 채울  있는 배고픔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귀퉁이 하나를 얻기 위해 우리 모두가 아등바등 살아간다. 숨 돌릴 틈도, 허기진 배를 ‘제대로’ 채울 틈도 없이, 이것이 주어진 삶의 본래 모양인 마냥 하루하루 열심히도 이어간다. 그러다 고단한 순간이 찾아온다. 쓰디쓴 실패를 경험한다거나 손에 꼭 쥐고 있던 무언가를 잃는다거나 등등, 마음이 꺾이는, 고장 나는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때의 우리는 걸어온 삶을 허무하게 느끼며 삶의 모든 동력을 멈출 만큼 지치기도 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2,3


"싹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키워서 미리 거름을 준 밭에 옮겨서 심는데 이것이 아주심기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이다.

아주심기를 하고 난 다음에 뿌리가 자랄 때까지 보살펴 주면 겨울 서릿발에 뿌리가 말라 죽을 일이 없을 뿐더러 겨울을 겪어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더 달고 단단하다."


이때의 우리에게, 혜원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망쳐 숨을 곳이 필요하다. 쉬며 허기를 채우고 원기를 회복하여 다시금, 아니 본래의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신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찾아 돌아가 온전히 가꾸어갈 수 있는 데에 이르도록 기다려주고 돕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영화에 따르면 양파가 더 달고 단단해지는 과정을 겪는 것과 유사한, 삶에서 상당히 중요한 순간으로, 겪고 안 겪고의 차이는 제법 크다. 하지만 모르고 지나는 사람이 꽤 많아서, 선뜻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겠다만, 어쩌면 겪는다는 거 자체가 축복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4,5


사회는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제공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리도록, 이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사회의 기준에 맞춘다면 고단한 순간, 살아오던 삶을 멈출 수밖에 없는 시기에 처한 사람들은 실패자일 수밖에 없다. 덕분에 우리조차도 혹여 우리 자신이 이 시기에 처할까, 실패자가 될까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다 어떤 것으로도 해결 받지 못할 만성피로감만 얻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던 일상의 노력,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고향으로, 없던 시골집이라도 만들어서 돌아가란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것이 멈추는 시기, 머무르는 계절이 찾아왔을 때 당황하거나 잠시 시무룩해질 순 있어도 절대로 자책하거나 좌절하지 말라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다. 삶의 재정비를 위해, 삶이 제 곳을 찾아가기 위해 맞닥뜨린 자연스러운 순간일 뿐이니 최선을 다해 그에 응하다 보면 어느새 '리틀 포레스트' 눈 앞에 도래할 테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6,7


엄마가 아빠의 병간호차 내려온 시골에 쭉 머무른 것은 혜원 때문이었다. 혜원이 이곳에 깊이 뿌리를 내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도망쳐 숨을 곳, 돌아갈 곳이 존재한다는 건, 언제든 넘어지고 멈추어도 된다는 위로와 언제든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겪어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삶을 살아가는 맛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리틀 포레스트’가 일깨운, 우리가 잊었던 혹은 잃었던 삶의 미각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춘하추동(왼쪽 위부터 차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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